하루,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침

 
 
 2011년 3월 3일, 그 날은 긴 폭설 끝에 화창한 하늘이 구름을 걷고 나타난 날이었다. 유리는 코트 앞섬을 세게 여미며, 양 옆에 높이 쌓인 눈벽을 무심하게 지나쳐 제50기지의 주건물로 향했다. 눈발은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사흘 동안이나 숙소에 갇힌 채 그간 밀린 서류 업무를 처리한 유리는 오랜만에 쐬는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맞으며 추위에 대한 불평과 묘한 반가움이 뒤섞인 잔잔한 콧노래를 불렀다. 엘가의 곡조는 러시아의 하늘에 울려퍼지기엔 약간 안 어울리려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행진곡을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건물 크기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은 문을 열고 주건물 현관에 들어서자 따뜻한 훈기가 유리를 반겼다. 아침 7시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적잖은 인원이 이미 바쁘게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50기지는 비생물계 유클리드 개체 다수를 보관 및 연구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폭설을 피해 일시 퇴거를 단행했지만, 예상보다 폭설이 길어져서 관리 공백이 생긴 것은 상정치 못한 피해였다. 다급히 뛰어다니는 시설관리반 직원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A동 3층 구역의 수도관이 동파되어 난방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금속 개체 일부가 빙결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사흘 전에 텅 비워둔 자신의 현관 라커에 코트를 벗어 걸고는 복도로 나섰다.

 "유리 연구원. 좋은 아침일세."
 "제리코 교수님. 휴가 잘 보내셨어요?"
 "뭐… 그렇지. 숙소에 틀어박혀서 인사파일 뒤지는 것도 휴가라면야."

 비슷한 처지로 폭설 기간을 보낸 제리코 교수가 가볍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피곤에 절은 그의 농담같지 않은 답변을 유리는 웃어 넘겼다. 제리코는 별 신경도 안쓴다는 듯 그대로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서류 검토는 다 했지? 이따가 오후 업무 시작하기 전에 자료 정리해서 내 연구실로 오게."
 "네. 이번에는 주목 사항이 상당히 많던데요."
 "아무래도 간격이 좀 길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걸 감안해도 조금 많은 것도 같네만…"
 "조사 기간 연장을 고려해봐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음. 필요할 것 같으면 바로 말하게. 서류를 준비해야 하니. 먼저 가겠네."

 제리코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가볍게 목례한 뒤 유리도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교수님, 유리 연구원 방문입니다."
 "들어오게."

 전자음과 함께 잠금 해제된 문을 열고 유리가 들어섰다. 손에는 『과학부 2010년 제4분기 기지신문 특집기사 목록 』이라고 적힌 두툼한 파일철을 들고 있었다. 그럴 듯 하지만, 과학부에선 사용하지 않는 문서명이었다.

 "특집기사 목록이라, 이번에도 참 능글맞은 제목인데 그래."
 "말도 마세요. 본 작업보다 서류철 이름짓는 게 더 고역이라니까요."
 "왜, 난 지금까지 거쳐간 부하직원들 중에 자네 작명 센스가 가장 재밌던데. 지난번에는 분실 휴대전화 목록 아니었나?"
 "전 기억도 안나는데… 그냥 매년 같은 걸 쓰면 편하긴 편할 텐데요."
 "어쩔 수 없지. 내부보안부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불만이면 나처럼 서류 옮길 일 없는 직위까지 승진하면 되네만."

 제리코 교수는 약간 놀리는 투로 싱글거리며 말했다. 일반 인원들이야 그를 과학부 4팀장인 게으름뱅이 괴짜 과학자 양반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의 두번째 직책은 바로 내부보안부 러시아 제50기지 담당관이다. 그나마 원래 직책을 겸직하는 유리 연구원이나 마카로프 박사와는 달리 완전히 내부보안부 업무에 집중하도록 배정된 인물이다.

 "후후, 올해는 저도 느낌 좋다고요. 지난 분기 연구 실적도 좋았고, 내부보안부 일도 일사천리. 이중근무 시작한 이래로 지금처럼 잘 풀린 적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유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현장요원에서 연구직으로 이동한 뒤 그녀의 업무 성과는 제50기지 과학부 4팀 연구원으로서도 내부보안부 제50기지 전속수사관으로서도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가? 뭐 자네 일이 잘 풀리면 나야 좋지. 자네가 빌빌대면 뒤치다꺼리는 내 몫이니 말이야."
 "으음― 농담은 그쯤 하고 검토 시작하죠, 교수님."
 "알았네, 이 사람아."

 뾰루퉁한 표정으로 유리가 재촉하자 교수도 껄껄 웃고는 자신의 서류철을 꺼내어 펼쳤다.
 


 
 "상부에는 일단 별 문제되는 사항은 없었군."
 "다행이죠. 그게 제일 골아픈 상황인데."
 "그렇지. 그래도 차후에 중요 기밀 정보의 흐름 위주로 한 번 쯤은 다시 검토하는 게 낫겠어."
 "보안부 기지경비대 샘슨 대원은 수신자 신원 불명의 통신 기록이 다수 있습니다."
 "통신 수단은?"
 "개인 휴대전화같습니다."
 "젠장. 스마트 시대랍시고 그 핑계로 전자기기 자율화한 것까진 좋다 해도, 보안 계통의 노고는 조금 생각해줬으면 싶은데 말이지."
 "글쎄요, 작년 11월 감청장치 설치 동의 받은 다음에도 우회해서 통신한 걸 보면 고의적인 것 같습니다."
 "어디… 흠. 확실히 그렇군. 소환 감사 명부에 추가하게. 관련 증거 수집 필요 체크해두고."
 "네."
 "라이콥스키 요원은 과거 기록 일부가 말소되어 있는데, 내부보안부 승인으로 접근한 게 맞나?"
 "네, 확실합니다. 4등급 승인으로 접속했는데 말소 처리되어 나오더군요."
 "그러면 됐네. 5등급 검토 신청으로 올려두게. 그리고… 니콜라이 이바노프. 응? 정보부 이바노프? 이 친구 과학부 소속 아니었나?"
 "작년 9월 인사이동 때 옮겼습니다. 정확하게는 정보부 관할 특무부대에 파견으로 나가 있죠."
 "본인 신청이었나?"
 "네. 모집 공고에 지원했네요."
 "정보부에 기동특무부대인데, 자원해서 파견까지 나가서는 기지 근무인가… 뭔가 이상한데."
 "그래서 목록에 올려 뒀습니다만… 작년 11월 이전에 몇 차례 수신자 불명 통화를 한 것 외에는 달리 문제삼을 것은 없었습니다."
 "이 정도 정황으로 당장 소환 감사 영장을 내긴 무리겠군. 이 건도 검토 신청으로 올리게."
 "네."

 유리는 랩탑 자판을 바쁘게 두들기며 엑셀 파일을 작성했다. 제리코는 서류철의 첫 장을 다시 펴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목록을 다시 훑었다. 12월의 탈주 사태로 연기된 4분기 감사까지 총 5개월 분량의 내부보안부 업무를, 그것도 일반 업무와 함께 처리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제리코 교수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1차 검토에서 확정한 소환 인원만 15명에, 거동수상이나 기록미비로 상부에 검토 신청을 올려야 할 대상도 29명이나 되었다. 보통 분기당 검토 신청 10명 이내, 소환 조사는 연 1회 약 2명 정도로 그친다는 걸 생각하면 평소의 두배 쯤 되는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분명히 많은 수치였다. 지난 2010년도 3분기 감사의 주목 사항이 대개 후반에 몰려있던 점까지 생각하면 지난 반년간 제50기지 내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분석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교수가 물었다.

 "글쎄요, 이건 확실히 너무 많은데요."
 "그건 누구나 보면 아네. 간단하게나마 분석을 해 보라는 걸세."
 "음… 대부분의 주목 사항이 외부와의 비공식 접촉이나 일반적인 업무 양상에서의 이탈이니, 뭔가 있다고 하면 요주의 단체와의 작당을 의심해볼 만 하겠네요."
 "전적으로 동의하네. 외무부나 정보부에서 보낸 메모는 달리 없었지만… 이래선 오히려 우리 쪽에서 메모를 보내야겠군."
 "마카로프 박사님과는 의논해보셨어요?"
 "마카로프는 과학부 업무가 밀려서 이번 감사는 불참하기로 했네."
 "하필이면…"
 "그렇군. 하필 이런 때에."
 "마카로프 박사님이 5팀… 배정된 연구동은 A동 3층 구역이네요."
 "잠깐… 뭐라고?"
 "어, A동 3층 구역이요. 이번에 동파 피해로 마비되었다던데."
 "내한 설계에 기지 전체에 난방까지 가동했는데 동파가 자연히 일어날 리가 없네. 멍청이, 내가 왜 이걸 놓쳤을까?"

 제리코 교수는 머리를 몇 번 긁고는 몸을 홱 돌려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들이 검색어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나열되었다.

 "교수님, 대체 어떤…?"
 "제50기지 주건물 A동 3층. 지난해 10월 이후부터 유난히 기능 이상이 잦았지. 10월 301호 출입구 개폐장치 유압실린더 파손, 11월 305호부터 7호까지 격리실 1차 잠금장치 및 폐쇄회로 카메라 정지."
 "12월… 누전으로 인한 3층 전체 정전과 대규모 격리 해제 사태. 그리고 3월 동파와 기능 마비…!"
 "그렇지. 상식적으로 이정도 정비 태세에서는 그중 하나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야. 하지만 그뿐만이 아닐세."

 제리코는 목록을 조금 내려 유리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을 본 유리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정리한 목록이군요?"
 "그래. 주목 사항의 시기적 분포를 보게."
 "…10월 초, 12월 전후, 2월 말에 집중되어 있군요. 특히 외부와의 접촉 건이."
 "아무래도 이건, 의혹 수준으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네."
 "하지만 두 명이서 조치하기엔…"
 "무리한 일이지. 이런 타이밍에 마카로프가 이탈한 게 과연 우연일런지…"

 유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통자와 외부 세력이 기지 시설의 이상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 적발 사례도 간간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부보안부 고위관계자가 책임자로 있는 구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그를 감사 업무에서 이탈시킨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내부보안부 인원의 신원정보를 파악당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리의 표정을 읽은 제리코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만에 하나 적대세력이 내부보안부 명부를 가지고 우리 업무를 방해하며 그 틈에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면 이건 우리 기지만으로 끝날 일은 절대로 아니겠지."
 "어떻게 해야 하죠?"
 "감사는 예정보다 서둘러 진행할 걸세. 오늘 저녁까지 제출 서류를 완성해서 레줄 관리관과 지부 본부에 곧장 제출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검토와 승인 절차를 마치고 대대적으로 소환 감사를 시행해야겠지. 만약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지난 분기 감사가 미뤄진 것이라면 1개월 앞당긴 이번 감사도 빠르다곤 할 수 없는 셈이니…"
 "알겠습니다. 서둘러서…"

 유리의 말은 그 순간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사내에 의해 중단되었다.
 
 
 "지부 본부에서 나왔소. 마리아 세르코바, 암호명 유리. 당신을 내통 및 기밀 파기 혐의로 체포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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