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모스크바의 노을진 저녁

 
 
 2011년 3월 4일, 그 날은 흩어졌던 구름이 잠깐 다시 눈을 흩뿌렸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저녁 노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저녁놀을 유리는 볼 수 없었고, 보았더라도 그리 좋은 감상으로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는다면, 그것이 그녀가 볼 수 있었던 러시아의 마지막 하늘이었다는 사실로 남았으리라.
 


 
 "아니… 당신 누구요. 대체 무슨 소리요? 영장도 없이 내 부하를 연행할 생각이거든 당장 그만두시오."
 "담당관, 이건 실제 상황이오. 마리아 세르코바 수사관은 재단 내규 및 내부보안부 기밀 규정을 다수 위반한 혐의로 러시아 지부 관리관 명의로 영장이 발부되었소. 확인해야겠다면 확인해도 좋소."
 "…내부보안부 사람이오?"
 "…숨길 필요는 없을 듯 하오. 지부 본부장 대리, 베르노예프요. 인사는 생략하겠소."

 베르노예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영장 서류를 들어보였다. 제리코는 서류를 빼앗듯이 집어들고는 당황한 낯빛이 역력한 채로 읽었다.

 "―적대 세력과의 무단 접촉 및 결탁. 수 차례의 무단 통신. 기밀 정보 제공―"

 채 서류를 다 읽기도 전에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간신히 참아낸 제리코는 서류를 책상에 내리치며 강하게 반박했다.

 "이건 무고요! 유리 수사관은 이 영장에 혐의로 제시된 행위를 이행한 사실이 전혀 없소. 감사 개시 전에 시행한 내부 감사에서는 아무런 혐의점도 찾을 수 없었소. 원한다면 기지 기록을 열람해도 좋소!"
 "유감스럽게도 당신 기지의 자료는 내규에 정해진 절차에 어긋난 자료요. 우리가 확보한 자료에 비해 신뢰도 면에서 하위에 있소. 그리고 우리 보고서는 보고된 즉시 그대로 저장되었지만, 제50기지의 기록은 권한이 있는 자가 수정했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겠소?"
 "그런 논리라면 나를 체포하시오! 이 기지에서 해당 자료를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건 나밖에 없소."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소. 제리코 교수, 당신에 대한 연금 명령 역시 내려져 있소. 마리아 수사관의 조사 결과에 따라 처분이 결정될 것이오."

 차마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제리코의 눈 앞에 두 번째 서류를 내미는 베르노예프의 태도는 여전히 냉정했다. 그는 유리를 돌아보며 내부보안부 방식의 미란다 원칙을 읊었다.

 "마리아 알렉세예프 세르코바 수사관. 당신은 현 시각을 기하여 피혐의자 신분으로서 내부보안부 러시아 지부 본부에 의해 신병이 구속되었소. 당신은 내부보안부의 인원 보호 규약에 근거하여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진술을 거부할 수 있소. 또한 이는 사문회에서 불리한 증거로 작용할 수 있소. 질문, 이의 사항은?"
 "…이것은 소환 감사입니까? 아니면 사문회 준비 절차입니까?"
 "후자요. 소환 감사 절차는 내부보안부 수사 절차의 3-b 예외 조항에 의거하여 생략되었소."

 유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문회 심문에서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오."

 베르노예프는 짧게 응답한 뒤 유리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2010년 10월 1일자부터 2011년 3월 1일자까지, 피혐의자는 총 52회 가량 허가받지 않은 통신을 시행했습니다. 조사 결과 통신 내용은 확보하지 못했으나 수신자는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2회는 신원 파악이 불가능했지만 50회는 얼마 전 체포한 엔트로피를 넘어서의 연락책과 접촉한 것이었습니다. 증거자료로 피혐의자의 통신 기록과 관련 조사 기록을 제출합니다."
 "수리합니다."
 "또한 피혐의자가 해당 기간동안 과학부와 내부보안부의 보안 승인을 이용해 엔트로피를 넘어서에 관련된 자료 다수와 SCP 데이터베이스에 반복적으로 접근한 것을 확인했으며, 이중 다수는 피혐의자의 당시 업무와 무관한 사실 역시 확인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체포된 엔트로피 측의 연락책도 피혐의자가 재단 자료 다수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당시 피혐의자의 데이터베이스 접속 기록과 증언 녹취 자료를 증거자료로 제출합니다."
 "수리합니다."
 "내부보안부는 이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피혐의자 마리아 세르코바가 엔트로피를 넘어서와 내통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사문위원회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어두운 조명이 깔린 사문회장에 내부보안부 러시아 본부 측 심문자로 출석한 베르노예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유리의 사전 심문에서도 증거 자료에 불합치하는 그녀의 증언을 전부 기각했고, 그녀의 내통 사실에 조금의 의혹도 없다고 확신했다. 잠시 간격을 둔 뒤 모니터 너머로 사문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피혐의자 세르코바. 뭔가 이의는 없는가?"
 "…해당 증거자료들의 보고 체계와 보관 절차를 확인하고, 제50기지에서 보관중인 자료와 대조하여 재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저 자료들은 명백히 사실에 불합치합니다."
 "제출된 증거자료들은 내부보안부 내규 35조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수집 및 보관되었으며, 어떠한 조작도 없었음을 확신합니다. 이에 대한 담당자와 최종책임자의 확인증을 추가 증거로 제출합니다. 50기지의 자료는 안타깝게도 현재 연금 중인 기지 내부보안부 담당관 개인에 의해 관리되어 내규에 규정된 증거자료로서의 효력이 없습니다."
 "심문 측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오."
 "내규 35조에 의거하여 내부보안부의 자료는 사안과 무관한 한 명 이상의 수사관, 기지 담당관에 의해 수집 및 관리되어야 하며 기지 관리관과 본부의 추가적인 감사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만 증거자료로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50기지의 자료는 피혐의자에 의해 수집 관리되어 규정상 증거 자료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
 "35조 별항에 의거, 해당 자료의 부분적인 증거 효력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른 수사관이 해당 기간동안 내부보안부 업무에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당시 제50기지의 내부보안부 자료는 제가 처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부에 보고된 자료 역시 제가 작성한 일차 보고서에 근거하며, 이것 역시 35조 b항에서 정의한 증거 효력 상실 조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두 자료 모두 단독으로는 증거로 삼기 불충분함을 주장합니다."
 "사문위원장님, 이전 판례에 따르면 두 자료가 충돌할 경우 더 많은 검토 절차를 거친 쪽의 자료를 증거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료에 조작이 가해졌을 수 있다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판례를 깨고 교차검증을 시행할 현저한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심문 측의 반론을 인정합니다. 피혐의자의 요청을 기각합니다."

 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들은 자신의 해명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 자신으로서도 이 상황을 뒤집을 마땅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 해도 문서상으로는 모든 증거가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리는 이제 체념하고 판결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피혐의자에게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변조기를 거친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피혐의자가 주장하는 제50기지의 자료에 근거하면, 내통자는 누구라는 결론이 나옵니까?"

 그 순간 사문회장은 얼어붙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곧 베르노예프가 그 질문에 이의를 제기했다.

 "해당 자료는 증거 효력이 없음을 방금 확인했습니다. 그 질문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난 그냥 개인적으로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심리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음. 피혐의자는 답변하시오."

 위원장까지 이렇게 나서자 베르노예프도 별 도리가 없었다. 전원이 유리를 쳐다보고선 대답을 기다렸다. 유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답했다.

 "감사를 완수하지 못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 현 시점에선 샘슨, 라이콥스키, 이바노프. 이 세 명으로 추릴 수 있습니다."

 다시, 정적이 돌았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충분합니다."

 젊다기보단 어린 목소리의 사문위원은 베르노예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답했다. 일부러 어둡게 조정된 조명과 모니터 때문에 잘 알긴 어려웠지만 그녀가 뭔가 타이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유리는 느꼈다.

 "그렇다면 의결하도록 하겠소."

위원장은 뜸을 들인 뒤 의사봉을 살짝 집어들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다양한 증거를 다각적으로 고려해 볼 때, 피혐의자의 이적 혐의가 인정되므로, 피혐의자 마리아 세르코바에게 D계급 강등 처분을 내릴 것을 본 사문회는 의결한다. D계급 강등 처분의 관례에 따라 피혐의자는 강등 후 타 지부에 배치될 것이다. 이상."
 


 
 영롱한 노을빛이 구름 뒤로 모습을 숨겼을 무렵, 모스크바 기지 한 켠의 비행장에선 경비행기의 이륙 채비가 한창이었다. 유리 연구원은 가슴팍에 D-3325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는 D계급 전용의 노을빛 점프 슈트를 입은 채 결박된 양 손이 잡아끌려지면서 비행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점프 슈트 차림의 다른 D계급들과 함께 그녀가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킬리 박사는 옆에 함께 서있던 소년에게 말했다.

 "저 비행기, 한국 사령부로 가는 게 확실하지?"
 "그래. 방금 관리관님께 요청해서 D계급 인원 지원 청구를 넣었으니 최우선적으로 한국으로 향할 거야. 원체 수감자 수급이 안되는 나라니까 달리 의심할 사람도 없겠지. 하지만 D계급으로 강등된 이상, 한국에 가더라도 서둘러서 후속 조치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순 없을 거야."
 "알았어. 그건 내가 챙길게. 수고했어, 쯔산."
 "그런데 킬리, 대체 왜 이 일에 그렇게 열심인 거야? 일면식도 없는 수사관의 혐의에…"
 "농담하지 마. 중요한 건 저 수사관이 죄를 뒤집어쓴 게 아니야. 진범이 혐의를 벗어나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게 됐다는 거지."
 "하지만 저 연구원이 무고할 지 모른다는 것도 추측일 뿐이잖아."
 "쯔산, 내부보안부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마. 일단 수사관으로 임명되었을 정도의 인재가 그 정도로 증거를 남기고 다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그리고?"
 "신경쓰이는 일이 더 있어. 방금 그녀의 증언 들었지?"
 "음.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중요한 건 보고 라인이야. 따로 조사해본 결과에 따르면 제50기지와 러시아 지부 본부 사이의 내부보안부 보고 계통에는 정보부의 이바노프가 끼어 있었어."
 "이바노프? 마지막에 언급된 그 사람이잖아."
 "그래. 보통이라면 정보부 행정관은 그게 내부보안부 자료인 줄도 모르고 전송만 하는 역할일 뿐이지만, 이 사람의 행적은 좀 수상해. 제출된 증거자료마다, 자료의 해당 일자와 보고서의 제출 일자 사이에 2일 정도 간격이 있어."
 "…그 사이에 보고서를 건드렸다?"
 "빙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증명할 수가 없는 문제야. 일관적으로 딜레이가 있는 점은 분명 수상하지만… 행정 업무상 전송이 늦어지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잖아. 내부보안부 문서는 중급의 처리 우선도로 설정되어 있으니 말이야. 무엇보다 문서가 조작된 시점을 알 수 없다면…"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킬리는 한 호흡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제50기지 측의 기록 자료를 가져와줘."

 창문 밖으로 경비행기가 프로펠러 소음과 함께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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