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안개 낀 성남의 새벽

 
 
 2011년 3월 5일, 그날은 옅은 안개가 머언 풍경을 뿌옇게 흐려놓은 날이었다. 새벽 비행장의 활주로 위로 엷게 깔려있는 그 박무 속으로 경비행기는 랜딩 기어를 뻗었다. 10시간에 걸친 야간 비행이 끝난 그 시점에 유리는 노곤함을 느꼈다. 정신적인 충격 탓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밤새 잠을 설친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내색할 수도, 휴식 시간을 얻을 수도 없었다. 비행기가 활주로 끄트머리에 멈춰서자 군의 협조를 받은 재단의 하얀 호송차가 안개를 헤치고 다가왔다.
 


 
 브릴러 박사는 취조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는 하얀 탁자 위로 밝은 조명이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브릴러는 수갑을 찬 채 탁자 앞에 앉아있는 유리를 흘낏 한 번 보고는 들고 온 인스턴트 커피와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문을 꺼냈다.

 "만나서 반갑네, D-3325."

 유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자리에 앉은 브릴러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며 유리를 지켜보다가 이내 서류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D계급으로 정식 배치하기 전에 가볍게 정신 감정을 치를 걸세."

 유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브릴러를 올려다보았다. 브릴러가 할 말이 있냐고 묻듯이 말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하자, 유리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신 감정은 연초에 정기검진의 일환으로 이미 시행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으로 압니다만."
 "규정상 소집 후에 반드시 검사를 해야 해서 말일세."

 브릴러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한국어가 유창하군."
 "그렇습니다."
 "언제 배웠나?"
 "…어렸을 때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유리는 그런 것 까지 묻냐는 듯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브릴러는 그녀의 감정 표현을 무시한 채 서류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러시아어 검사지를 가져 왔는데…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될 뻔 했군. 가져온 게 있으니 이걸로 진행하겠네."
 "…배려 감사합니다."

 유리는 뚱하게 답례했다. 브릴러는 필기를 마치고 서류를 거꾸로 돌려 유리에게 밀었다. 유리는 못마땅하게 검사지를 건네 받았지만, 곧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검사지 위의 여백에는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을 끌 겁니다]
 [협조해주세요]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 살짝 눈만 들어 브릴러의 표정을 살폈다. 브릴러 역시 감정을 숨긴 채로, 화답하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취조실 거울유리 너머의 참관실에서는 두 사람이 유리와 브릴러를 지켜보고 있었다. 러시아 지부의 D계급 인원 호송 담당자 빅토르 요원이 기지 쪽의 담당자로 동석한 서아인 행정관에게 착잡한 듯이 말했다.

 "저는 설마 그녀가 내통자일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은 처음 겪으셨나봐요."
 "그렇습니다."
 "종종 겪는 일이 될 거에요. 익숙해지는 게 편하죠. …이번에 호송해온 D계급 인원이 20명이었죠?"
 "그렇습니다. 급히 수송하느라 인원이 조금 적습니다만, 추가로 요청하신다면 두어 번은 더 지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일단 충분할 것 같네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이만 다른 취조실로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군요, 여기는."
 "그래요. 여기는 내가 마저 지켜볼테니."
 "감사합니다."

 빅토르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인은 그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도 잠시 더 동향을 살핀 뒤에야 회선을 열고 취조실 안을 향해 방송했다.

 『좋아, 나갔다.』

 그러자 페테르 박사는 사뭇 진지하게 일그러뜨리고 있던 표정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딱히 별다른 낌새는 없었죠?"
 『전혀.』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 검사지는 이제 됐습니다."

 브릴러는 유리에게서 검사지를 회수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유리가 질문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거죠?"
 "자세한 사정은 알려주지 못하지만… 집행 연기라고 해두죠. 명확하게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당신은 실험에 투입되지 않고 수감되어있을 겁니다."
 "그럼, 재조사를 하는 겁니까?"

 유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완전히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려던 그녀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내부보안부의 정식 재조사는 아닙니다. 공식적으로는 이미 완결된 사안이죠. 대신 고위 관계자 몇 분이 미심쩍어하시는 부분에 대해 우리 사령부 단독으로 검증 작업을 시행하기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브릴러는 서류철을 정돈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 유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렸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할 며칠 동안은 임시로 기억소거를 해 둘 겁니다. 무죄가 밝혀지면 곧 해제할테니 크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10분 쯤 기다리고 있으면 기억소거반이 도착할 겁니다. …좋은 소식으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브릴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유리는 한순간 온 몸의 흥분과 긴장이 풀리는 것을 실감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억울하고 서글픈 감정은 완전히 누그러져 있었다.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녀의 혐의가 터무니없는 누명이라는 사실은 금세 백일지하에 드러날 것이 틀림없었다. 유리는 세 손가락을 모아 성호를 그으며 부디 진실이 밝혀지기를,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도했다.
 


 
 2011년 3월 5일, 그날은 다시금 눈을 머금은 먹구름이 하늘에 드리운 날이었다. 예보에 따르면 모스크바 국제공항 뿐만 아니라 서부 전역에 폭설이 예상되어, 이날 출국하는 사람은 적어도 사흘 동안은 러시아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구름으로 가득 메워진 창 밖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항공사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아에로플로트 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예약한 한국행 표를 받으러 왔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남자는 품에서 위장 신분으로 발급된 여권을 꺼내보이며 말했다.

 "이바노프. 니콜라이 이바노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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