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박힌 남자 구하기

그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가을이 펄쳐지고 있었다. 새들은 잠에 빠질듯이 낮은 자락으로 노래했고, 나뭇잎도 그에 화답하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평화로운 나날이었고, 동시에 끔찍한 나날이었다. 누군가 모순성의 한계를 시험하던 시기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벽에 박힌 남자가 발견된 때도 그해 가을이었다. 내가 아슈비나 첸의 기록을 담당하게 된 날 역시 그해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내가 결코 잊지 못할 날.


"왜 지금 못 들어간다는 거죠?"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지금 못 들어간단거죠?"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고 떨리게 나왔고, 동시에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듯한 이물감이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한기가 뼈를 찔렀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유령의 언어처럼 이리저리 부딪히며 반향을 일으켰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가 은행의 창구라 내 뒤에 누가 서 있어서 이런 식으로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구청에 어떤 증빙 서류를 제출하다 막힌 것은 아니다. 물론 꽤 비슷한 상황이긴 했다.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들킬까봐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 허우대 멀쩡한 놈이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서 쓰레기통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에게 애걸복걸하는 꼴이라니. 길고양이 행색의 꾀죄죄한 양을 하고 있는 고양이의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발길질을 하고 지나가거나 지나쳤을 노란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압박감이 일었다. 꼭 내 마음을 읽히고 있는 것같은 느낌. 나는 멋쩍게 고양이의 눈을 피해 뒷골목의 오물로 얼룩진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벽면에 들러붙은 검은 무언가의 모양을 연구하는 작업도 잠시, 고양이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울림이 들려왔다. 나는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며 내 신분을 증명할 서류 쪼가리와 '탐정 서기'란 글자를 조그마하게 박아넣은 직원증, 그리고 츄르 한 봉을 그러모았다.

고양이의 입이 열리더니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바리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이 고양이가 내가 살짝 움찔한 사실을 모르기를, 아님 모르는 척하기라도 해주길 바랐다.

"지금 미리 들어가 있는 손님이 있다. 첸 양에게 알림은 보내놨으니, 면담이 끝나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젠장. 미리 들어가서 좋은 첫 인상을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일을 그르쳐도 한참 그르쳤다. 고양이는 자기 볼일은 다 봤다는 듯이 그르렁거리며 몸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망할 고양이 같으니라구.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츄르의 포장지를 벗기고 고양이에게 건네주었다. 계획이 틀어졌다, 전부! 첫 업무에, 첫 탐정에, 첫 출근인데 손님 — 아마 의뢰인이겠지 — 을 받는 모습도 못 보다니! 나는 멍하니 고양이가 츄르를 핥아먹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앉아있어야만 했다.

무심결에 나는 어제 크리스-애덤 룽과의 저녁을 떠올렸다. 그때의 긴장된 마음이 저절로 생각나서 겸연쩍어졌다. 인사 책임자인 그와의 저녁 식사는 신입 직원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다. 얼른 안정적인 자리를 잡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자리였다. 물론 내 고질적인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나는 사옥이 있는 거리 뒷골목 레스토랑에서 — 그런 데에 뭐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 그를 만났다. 레스토랑은 크고 번잡하지는 않았지만 실속있었고 제 존재감을 강력히 주장할 줄 알았다. 룽은 갈색 머리를 포마드로 해서 넘긴 머리와 염소 수염을 길러 왜인지 모를 중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키가 크고 냉철해 보이는 그의 인상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룽에 한해서는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글쎄, 먹다가 코로 집어넣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내가 해내야 할 일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룽의 말투는 짧고 간결했다. 모든 것의 득과 실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도출해내는 것은 오로지 내게 맡겼다. 얼핏 느끼기에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의도한 것을 잘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전 지휘관들과는 다른 화법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일 다행인 사실은 그는 내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 이런 일은 결코 조언해주지 않았는데. 이런 젠장.

몇 분쯤 지났을까, 나는 내 귓전을 때리는 굵은 음색에 기억에서 벗어났다.

"첸 양에게서의 호출이다. 어서 들어오도록."

드디어! 나는 부리나케 가방과 옷차림을 추스르고 고양이 앞에 섰다. 고양이는 자기가 지키고 있던 쓰레기통 위에서 물러나더니 턱짓으로 뚜껑을 가리켰다. 열라는 의미인 듯 싶었다. 뚜껑을 열자 텅 빈 어둠 속에 어떤 물체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니체의 말이 불현듯 뇌를 스쳤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그닥 친숙한 물건은 아닌 듯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고양이가 꼬리로 아킬레스건을 쳤고,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어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걸 꺼냈다. 꺼내보니 그냥 책이었다. 이게 뭐람.

<메리 포핀스>

"심호흡을 하고, 책을 열어라."

나는 고양이가 시키는 대로 했고, 곧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발에 닿는 차가움, 눅눅한 습기, 어둠, 그리고 코를 찌르는 비누 냄새가 이곳이 화장실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변기에서 오른발을 빼며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그러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갑자기 내 눈에 내리꽂히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한 순간이었다. 나는 문 저편의 빛의 영역에서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참 기이한 등장일세, 서기. 어서 올라와."

마침내, 나는 아슈비나 첸을 만났다.


아슈비나 첸은 180cm에 가까이 가는 큰 키에, 회색 빛 머리칼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렇게까지 나이를 먹은 것 같지는 않다.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연륜에도 그러하다.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그녀의 움직임과 지성에 그 원인을 기하는 것 같다는 아주 작은 추측만 할 수 있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도 그러했다. 나이를 먹은 듯, 아닌 듯, 모순적인 기묘한 분위기.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내 키와 거의 가까운 나머지 나는 잠시 뒤로 물러서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사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그녀의 세계로 누구든지 들어가게 할 수 있을 만한 그 눈빛, 마술사의 눈빛이었다. 나는 되도록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려고 애썼다.

"안녕하세요, 첸 양. 저는-"

"시어도어 카프카 윌슨, 오늘 처음 온 서기관. 지금 시각은 7시고, 난 자네를 6시 반까지 오길 원했는데."

손발이 다시 차가워지고 온몸의 피부가 펄쩍 뛰는 듯했다. 나는 경직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준비했던 말들이 어느새 내 두개골 너머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때를 되돌아보았을때, 내 표정이 그 어떤 선인장보다도 멍청했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정말 죄-"

"쉿, 서기. 시간은 그닥 중요한 게 아냐. 사과해준다니 고맙군. 정말 중요한 건 자네가 얼마나 능률이 뛰어난가겠지."

"아…어…"

그녀는 회색 머리칼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재빨리 말했다.

"말은 적을수록 좋지. 이리와, 서기. 자네가 꼭 봐야할 것이 있다네."

그리고 그녀는 내 옷깃을 쥐곤(그렇게 강력한 아귀힘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디론가로 끌고 갔다.


"어…"

"그래, 나도 알아."

"벽에 이… 신사분이 왜 끼어있는 거죠?"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탐정을 바라보았다. 탐정이 고개를 으쓱하는 걸 봐서는 의도한 무언가가 아님은 확실했다. 첸 양이 나를 이끌고 온 거실은 매우 넓고 또 고풍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오피스텔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그 넓은 거실 한쪽 면에는 큰 창이 있었다. 저 멀리서 벚나무가 잔뜩 피어있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거실 안에는 작은 탁자와 철제 의자 두어개, 작은 소파 세 개가 놓여있었다. 소파 옆에는 조립식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찬 커피잔과 에너지 음료 몇 캔이 놓여 있었다. 그 오밀조밀한 공간의 한쪽 벽면에 어떤 인간이 끼어있었다.

"살아있던가요?"

"어, 살아있네. 건강상태도 양호하고, 단지 약간 쇼크 상태가 온 것 같긴하더군."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벽에 박힌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퍼뜩 떴다. 무척이나 실례됨을 알고는 있으나, 나는 그의 모습에서 죽어가는 자벌레의 형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으악!"

"깼군." 첸 양은 사무적인 어투로 말하고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부터 당신의 뻣뻣한 육체를 그 고풍스러운 벽에서 빼낼 건데, 괜찮겠습니까?"

남자는 뭐든 상관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가 오른팔을 끌게." 왼팔을 붙잡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조금 불쾌하고, 또 걱정되는 마음으로 남자의 오른팔을 끌어내었다. 남자가 벽에서 우당탕 굴러나올때까지 우린 그를 잡아당겼다. 남자는 정신이 영 없는 것같았다. 하지만 누군들 벽에 박히면 그런 반응이 아닐텐가? 나는 힘을 써서 놀란 오른팔을 무의식적으로 붙잡았다. 아슈비나 첸은 전혀 힘든 기색도 없이, 그 남자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쿨럭거리며 말했다.

"여기가 아슈비나 첸 양의 사무실이 맞습니까?"

탐정의 시선이 일변 남자를 향해 강렬히 향했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의 시선, 아니, 그것보다는 한층 더 상위의 존재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그 한 번의 동작, 시선을 던짐으로써 마치 비수를 날린 것처럼 강력한 영향을 이 현실에 내뿜고 있었다. 남자도 그것을 알아챈 듯이 엉기적대며 몸을 주춤 일으켰다.

"네, 맞습니다. 내가 아슈비나 첸입니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첸 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지의 의뢰인, 탐정은 의뢰를 받고 바로 출발하고, 나타나는 고난, 역경! 언제나 꿈꿔왔던 일이 현실에 그대로 인화되고 있었다. 나는 남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이마에 한 방울 구슬땀이 흘러떨어지고 있었다. 긴장을 막 푼 것같았다. 남자가 일어나서 양복에 묻은 나뭇재를 털자 나는 그제야 그의 외견을 눈여겨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땅딸막한 키에 살집이 있어보였다. 표정은 그닥 좋아보이진 않았다. 당연히 벽에 박히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나이는 조금 있어보였지만 그게 아마 극심한 피로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나이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서 이 남자의 이미지를 제대로 박아넣고는 노트를 열어 여백에 조금 적어넣기 시작했다.

"근데… 저 분은 뭐하시는 분입니까?"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의뭉스러운 얼굴로 첸 양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 속에서 무슨 천둥이 일어나고 있던지 간에 의심을 몰아낼 작정으로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아… 저는 서기입니다."

"서기요?"

"네. 그… 이분의 서기죠. 뭐, 사건을 기록하는… 뭔지 아시죠?"

남자는 의심쩍은 얼굴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천둥이 조금 잦아든 모양이었다. 첸 양이 그를 작은 소파 중 하나로 안내하곤 말을 걸었다.

"그럼… 그 용건이 무엇인가요?"

남자는 주위를 불안한 듯 지나칠 정도로 세세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첸 양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존재를 까먹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저런. 남자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어제 일어난 일입니다. 해럴드 뱅커가, 아, 그분은 제 아버지의 친구분이십니다, 어찌 되었건 그분이 어제 2시경 벽에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처럼요?"

첸 양이 한 쪽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물었다. 남자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애써 밝게 대답하려는 것을 보니 자신이 모욕당했다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둘의 대화를 받아적고 있었다.

"뭐 형태야 그렇지요. 하지만 아무도 그분이 어떻게 벽에 박혀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경찰도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들 하더군요.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그분, 아리아나 레이븐 양밖엔 없습니다! 빨리 그분께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시체를 부검해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탐정이 짐짓 모르는 척하자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어투에는 여전히 불안과 걱정이 실려있었다.

"그분이 지금 박혀있는 벽을 부숴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공구란 공구는 전부 빨려들어가버린다고 하더군요. 정말… 이상해요. 레이븐 양은 이런 이상한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빨려들어간다."

첸 양이 남자의 말을 끊고 중얼거렸다. 나는 기록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그녀의 얼굴이 밝게 변하고 있었다. 눈빛은 첫인상처럼 되돌아와 있었다. 첸 양은 갑자기 기억난 듯 남자를 보더니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어디죠? 그리고 댁 이름은?"


자신을 제임스 베크라고 소개한 남자가 돌아간 후, 첸 양은 느긋하게 겉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무얼 할지 몰라 그냥 뻘쭘하게 저 멀리 벚나무길에서 두 남매와 유모가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감상하고 있었다. 바깥이 가을임과 다르게 이곳은 봄이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고 만연한 봄이었다. 그런 봄의 그늘이 이곳, 탐정의 집을 가리고 있으니 어째 몽환적이고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쩌면 벽면에 걸린 여러 개의 흑백사진이 그런 분위기를 증폭시켰는지도 몰랐다. 나는 흘끗 사진들을 보려하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첸 양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 남자, 아무래도 그쪽 인간같네."

"네?"

"그쪽, 그러니까 재단 말일세."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첸 양이 빙긋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 재단이라뇨? 그러니까, 그 범정부조직 말씀이세요? 변칙 물체들을 잡아넣는?"

"뭐, 그런 셈이지."

이제 그녀는 양말을 신고 긴 머리를 머리끈으로 묶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가 머리 정돈을 다 끝낼 때까지도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벽에 박혀 있었잖나. 원래 정식으로 루트를 타고 오는 인간들은 문으로, 창문으로, 혹은 화장실로(이 대목에서 그녀는 내게 장난스럽게 눈짓했다.) 오기 마련인데, 그 작자는 갑자기 대뜸 벽으로 출몰했지. 아무래도 여기 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했을텐데,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아무래도 이쪽 판 거물들 중 하나일거야. 우리 하는 일이 워낙 비밀스럽잖나."

첸 양은 흰 스웨터에 연보라색 코트를 걸치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꼬나물었다. 내게도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원체 흡연자가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 지금은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재단이라니? 가끔 풍문으로 다른 단체들과 접촉할 때가 있다고는 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바로 일어나는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비록 재단이 정확히 뭐하는 데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허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뱀의 손 같은 치들은 우리 정식 루트를 애용해. 그러니 저런 식으로 등장은 안하겠지. 그럼 뭐가 있지? 연합이나 재단 뭐 이런 놈들이겠지 않겠나. 다른 놈들은 상정할 가치도 없어. 우릴 모르니까. 조금이나마 아는 애들은 세명이야. 그중에서 연합은 우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 심지어 우리 이름도 모를걸세. 그러니까 들어올 염려도 없지. 남은 건 재단이야."

그녀는 다시 담배를 피우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그녀가 흡연하는 이유가 혹시 추리에 더 빠질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첸 양이 연기를 내뿜고 말할 때, 그 명쾌한 추론에 나는 오롯이 빠질 수 있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게 최면의 일종일까? 그녀가 그렇게 제 지성을 드러낼 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연기 속에서 아슈비나 첸은 매혹적으로 모든 것을 밝혀낼 줄 아는 것만 같았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라이터의 딸깍거리는 소리에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아름답다니. 물론 아름다운 사람이 옳았다. 그렇다고 나는 상사에게 사랑이나 호감따위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단단이 못 박아 두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첸 양은 두번째 개비를 피우며 결론지었다.

"뭐 기타등등 불안해하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그 작자가 내 소위 '변칙' 물품에 관심을 보인 것도 있고. 의심가는 건 많았네."

"어… 그럼 어쩌죠?"

첸 양은 한 쪽 눈을 치켜세우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긴 뭘 어째."

"그…재단, 그러니까 다른 단체의 의뢰잖아요?"

구멍이 크게 뚫려 있던 벽이 갑작스레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등을 돌려 벽의 잔해를 살피려다 어느새 크고 굵은 글자 모양으로 W, A, L, L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게 뭐람. 내가 뭘 어쩌지도 못하고 어버버하고 있을 때 첸 양이 나서서 문자 하나하나를 주워 하나로 정립되게 했다. 그러자 다시 온전한 모양의 벽이 생성되었다. 놀라웠다. 첸 양이 돌아서서 나를 보고 말했다.

"그렇다고 못 받을 이유가 있나."

나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생각해볼때 너무 위험했다. 혹시 이게 덫이라면? 잡아가기라도 한다면? 죽이기라도 한다면? 거실의 큰 창이 열려 봄바람과 함께 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날카롭고 조금은 물렁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꼭 막고 싶었다. 재단이 어떤 존재이던 간에 상사가 죽는 경험은 한번으로 족했다.

"내가 함정에 걸어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나? 상관없네, 서기. 날 죽이거나 해코지하고 싶었다면 저들의 부대를 불러다가 여기다 주둔시켰겠지."

"그럼… 이건 뭘 위한 의뢰죠? 저들도 분명히 해결할 방도가 있을거 아녜요?"

아슈비나 첸은 나를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콱 박혀 움직이지 않을, 내가 평생을 기억할, 그 비웃는 듯하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옅게 지으며 말했다.

"시험."


수십 분 뒤, 우리는 베크가 일러준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이 아슈비나 첸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크고 강대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글쎄, 굳이 천재가 아니더라도 바리톤 음색의 고압적인 고양이가 한 여자의 손에 제 볼을 부벼대며 가르릉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누가 대빵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왔다. 생각보다 현장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쓰레기통이 있는 곳이 페니 가였는데, 거기서 100미터도 안 될 거리에 있는 던월 가가 그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택시가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수사하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눈에 들어올 때서야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놈의 재단이 어떤 양으로 나타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경찰들이 있는데 공격은 하지 않으리란 마음에서였다. 반면에 첸 양은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내 평온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얼굴이 경찰들을 확인한 순간 급격히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녀는 성큼성큼 폴리스 라인이 쳐진 현장으로 넘어갔다. 나는 값을 치르고 부리나케 그녀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젊은 경관이 나와 그녀와 나를 가로막았다. 젊고 머리를 바짝 깎았는데, 아무래도 자기가 여기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자신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실례지만, 뉘신지?"

첸 양은 한숨을 쉬더니 한 마디를 툭 던지고 계속 가던 길을 갔다.

"그건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닐세."

경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내가 그의 어깨를 턱 붙잡았기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와 함께 이야기 하시죠."

"아니, 당신 친구는 뭐하는—"

경관의 말은 내가 들이민 서기 명함에 가로막혔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풀려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이라 나조차도 그가 잠시 반기절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려주고 있었다. 서기 명함의 정신 재해성 문구가 효과를 발한 덕이다. 룽의 조언 첫 번째 : 짭새 처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첸 양은 벌써 시체를 대면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그녀 옆에 서지는 못하고 멀찍이 서서 시체를 보며 걸어왔다. 시신은 노인이었다. 오래되고 주름진 얼굴이 축 늘어져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현장은 더욱 기이해보였다. 우선, 그의 왼손은 마치 장을 찍은 듯이 손바닥만이 나와 있었고, 오른팔이 쭉하고 뻗어나와있었다. 다리는 벽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고 신발 끄트머리만이 삐죽이 나와있었을 뿐이었다. 시신 주위엔 페인트로 여러가지 낙서들이 그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페인트 통이 쓰러져 있었다. 꼭 누군가가 시신을 파묻어버리고 기념으로 그림을 잔뜩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구역질과 혐오감보다는 당혹감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한거지? 그리고 이유는 뭐지?

갑자기 팔이 뻗어나와 내 어깨를 잡아채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팔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키가 조금 작았지만 말라서 키가 더 커보이는 사람이었다. 금발 머리를 짧게 쳐서 날카로운 인상이 더해진 듯 보였다. 남자의 얇은 입술이 움직여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아… 전요, 그러니까…"

내가 바지 주머니에서 서기 명함을 부리나케 꺼내려던 그때, 첸 양이 시신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경감님."

그러자 경감이라고 불린 남자가 인상을 쓰더니 첸 양을 뜯어보았다. 눈이 커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녀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아슈비나 첸?"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경감을 바라보았다. 둘의 얼굴에 비슷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니, 아니다. 경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미된 울상이 피어올랐다고 봐야겠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경감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왔지, 탐정?"

"의뢰받았습니다. 이 노인의 죽음을 조사해달라더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노인의 시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꼭 그러면 그의 죽음을, 그의 사인을, 그의 원한을 다 알 수나 있다는 듯이. 나는 슬그머니 경감에게서 떨어져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첸 양과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아직 범법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뭐라도 적을 준비를 했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또 사건 뺏어가겠단 말이군, 그럼?"

"그런 셈이죠, 나 알잖습니까."

"배은망덕하긴." 경감이 투덜거리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좀 그렇긴 하죠."

그리고 첸 양은 고개를 틀어 경감을 바라보곤 외쳤다.

"이 작자에 대한 사실 다 넘겨줘요. 목격자도 면담하게 해주고, 증거도 좀 공유하고."

경감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지금 경찰 자료를 무단으로 넘겨달라는거야?"

첸 양의 얼굴에 별걸 다 물어본다는 표정이 서렸다. 그녀의 태도는 점점 돌변하고 있었다. 짝다리에, 허리에 손을 대고 인상을 조금 찌푸린 모양이 아주 뽕을 뽑겠단 투지가 서려있었다.

"네."

"아니… 그건 곤란하지."

"내가 도와준 게 몇입니까? 그냥 이번 한번만 도와준다고 생각해봐요."

"저번에도 그런 말했어."

"그럼 이번에도 도와주는 셈 쳐요."

경감은 정말로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날카로운 인상은 어디가고 당황한 표정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연민을 느꼈다.

"안 돼. 진짜야. 안 돼."


그리고 우리는 최초 목격자와 면담을 시작했다. 요 근방에 사는 소위 "예술가" 무리였는데,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 시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하나같이 조금 겁에 질려 있고 초조해 하는 품이 아무리봐도 평소 들었던 예술가들의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조금이라기보단, 많이.

"경찰에게 이미 다 말했습니다. 뭘 또 말하라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어투로 한 남자가 말했다. 키가 크고 갈색 머리를 짧게 깎았다. 아이보리색 셔츠에 정글 무늬 페도라를 썼는데, 그게 좋아서 쓴 건지 아님 예술가다워 보이기 위해서 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목구비는 뚜렷했는데,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고 있어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겁을 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적의를 불태우고 있는 남자에게서 흔히 엿볼수 있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적의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탐정? 이때까지 붙잡아 둔 경찰? 아니면, 친구들?

"여러분이 보았던 것, 느꼈던 것, 들었던 것. 내가 여기 있지를 않았으니 말일세."

첸 양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한눈에 봐도 우위가 정해진 문답이었다. 초조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사람을 이길 수 없기 마련이다. 또다른 남자가 입술에 침을 적시고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한 또 다른 남자는 검은 머리에 키가 조금 작았고, 다부져 보였다. 말편자 모양으로 콧수염을 다듬은 양이 지적으로 보였다.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음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처럼 이 상황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말투는 빠르고 떨렸다. 동양적인 이목구비에서 나올 법한 억양 대신에 나온 영국식 발음에 나는 잠시 놀랐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노트에 쓸 준비를 했다. 첸 양은 보면 모르냐는 투로 대답했다.

"탐정."

첸 양은 조금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가 몇마디를 덧붙였다.

"변칙 사건 전문, 프리랜서는 아닐세. 요 판이 워낙에 레드오션인지라."

물었던 이는 묻기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첸 양은 신경쓰지 않고 거기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물어갔다. 첫째로 질문한 사람은 알렉스 케인, 둘째의 영국 발음은 존 션토, 잠자코 있었던 세명은 차례로, 레티샤 콜슨, 션 오컷, 그리고 제인 린랜드였다. 예술가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마 밤새 잡혀 있어 피곤했을 얼굴들의 일그러짐에서, 나는 스스로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길고 장황했으나 정작 알맹이는 별로 없었으므로, 여기 다 옮기기보다 내 자신이 각색을 불가피하게 해야했단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알렉스 케인은 17일(어제) 11시 30분에 작업실에서 나와 션 오컷을 만났다. 둘은 다른 세명과 만나기로 한 펍으로 가고 있었다. 오랜만의 술 약속이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중간중간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시간을 소요해서, 결국 12시를 조금 지난 즈음에 약속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펍은 던월 가에서 조금 떨어진 윌링턴 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거리가 술집이 밀집해 있었으므로 근방에 사는 예술가들은 그곳으로 모이곤 했다.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아, 스무살적부터 이곳을 제 집보다 많이 드나들었다. 펍에는 레티샤 콜슨, 제인 린랜드, 그리고 존 션토가 와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의 일을 마치고 바로 와 알렉스와 션보다 일찍 올 수 있었다. 이들은 세시간 정도 술과 안주를 시켜 먹고 펍을 나섰다. 모두 던월 가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으므로, 전부 같이 돌아갔다.

바로 그 길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담벼락을 유심히 바라본 것은 콜슨이었다.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있어, 새로운 인식재해 기법을 도입한 낙서인가 싶었다. 그러나 일렁이는 것은 그녀의 의식이 아니라 정말 벽이었음을 깨닫고 친구들을 데리고 벽으로 다가갔다. 벽과 비슷한 색깔의 천이 한 단면을 덮고 있었다. 일렁임은 천이 바람에 조금씩 부딪히면서 발생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조금 특이한 날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일상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준비를 위해 작품에 천을 덮어놓았을수도 있었다. 혹은, 중간에 그리다 말아 정신재해나 밈따위의 유해한 요소가 새어나올 수 있는 작품을 가려 놓았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천 너머에서 일렁이는 누군가의 인영, 공허하고 막혀가는 듯이 들려오는 간헐적 헐떡임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천을 걷어냈다. 곧이어 초로의 노인이 단말마를 헐떡이며 녹초가 되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반신욕을 하듯 벽에 박혀있었다. 제각기 다른 정도의 놀람이 예술가들의 얼굴에 서렸다. 이곳 던월 가에서 모든 종류의 예술은 제한받을 권리가 없었지만 다른 입주자들, 혹은 민간인들을 다치게하거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작품들은 적어도 던월 안에서는 전시되면 안된다는 불문율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노인은 약에 취한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오컷이 노인의 어깨를 흔들고 눈 앞에 손을 흔들어댔지만, 노인은 그저 창백한 얼굴을 들어올리며 신음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개가 꺾이더니 눈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죽었다?"

첸 양은 이야기를 경청하며 어느새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새어나왔다. 가을 바람이 비실대며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시신이 박힌 벽 한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 같으면 의도해서 몸을 떼어냈을텐데, 참 특이한 양반이다. 어쨌든 그렇게 함으로써 주변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는 성공한 듯싶었다. 예술가들의 안색이 좀 더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네. 정말 순식간이었어요. 아무래도 저희가 발견하기 전에 공격당한 것 같긴 했어요."

린랜드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키가 작았는데, 대신에 말투와 눈빛으로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보라색 후드티를 입고 위에 회색 코트를 입었다. 예술가라기보다는 디자인학과생 초년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같았다. 눈이 퀭해서 여차하면 코트에 얼굴을 묻고 잘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갈색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밤새 취조받은 일이 꽤나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단해보였다. 새벽부터 벽에 박혀 죽은 인간을 조사하기 위해 나왔으니, 고단하지 않으면 더욱 이상할 터였다.

"공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첸 양이 짐짓 궁금해하는 체하며 물었다. 뒷짐을 지고 묻는 모습에 나는 내심 감탄했다. 정말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그녀의 눈빛을 보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눈동자에 광명이 들지 않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하는 그런거요. 벽에 매다 꽂고서는 옆에다 전염성 낙서나 정신재해 따위를 붙이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거에요. 저기도 낙서가 있는 걸로 아는데…?"

케인이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공격을 묻는 탐정을 매우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뺨을 거칠게 문지르고는 페도라를 고쳐썼다. 그의 말투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지만 나는 왜인지 조급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강함을 위장하는 무언가. 어쩌면 불안이 아닐까? 그럼, 무엇에 대한 불안?

첸 양은 기지개를 펴더니 시신이 박혀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리곤 예술가들에게 말했다.

"아름답군. 이런 그래피티도 어떤 기법으로 분류될 수 있나?"

증인들은 잠시 당황해했다. 그들의 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이를테면, '기법으로 수사해서 잡으려는건가?' 따위의 걱정 어린 마음. 행여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나는 첸 양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서기 준비생 시절 읽었던 판례를 떠올렸다. 어떤 아이의 죽음, 경찰은 주위를 맴돌고 있던 예술가 하나를 용의자 신분으로 잡아넣었다. 놈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재료로 조금 가져가려고 진술했다고, 경찰이, 검사가, 판사가 그렇게 말하고 적었다. 놈은 사형당했다. 굉장히 불경스럽고 괴이쩍은 생각이었지만, 그 예술가도 이들처럼 굉장히 무고해보였을지, 또 불쌍해보였을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 놈이, 죽은 아이의 시체를 예술에 활용하려 한 놈이 이렇게 당황스러워 했을지, 제 앞날을 걱정했을지 궁금했다.

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오컷이 한 발자국 걸어나와 짙고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사조로 구분해요. 저걸 스티믈라식 그래피티라고 부르죠. 대체로 60년대와 70년대에 횡행한 그래피티들인데, 단순하고 이미지적이에요. 학벌 좋은 그래피스트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것들이죠."

오컷은 검은 머리를 조금 길게 기른대다 검은 코트를 입어 일종의 이모스러운 느낌을 낸 건가 싶었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그에게서 내가 줄곧 생각해왔던 변칙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딘가 병적이지만 어딘가 정상이고, 어딘가 지적인 모습. 그야말로 상충되는 요소들의 집합체였는데, 이상하게도 잘만 맞물려 있었다. 윗입술 전체를 덮는 콧수염이 잘 정리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깔끔한 사람인 것 같았다. 케인과 맞춘 것인지, 비슷한 모양의 페도라를 쓰고 있었다. 정글 모양이 아니라 단색인 것을 보아하니 일부러 기묘한 느낌을 주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 그렇군. 고맙네. 특이하군. 난 언제나 변칙 예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기회에 배우게 되는군그래. 음, 그럼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나?"

오컷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스티믈라식 그래피티, 배우는데 얼마나 걸리겠나?"

"글쎄요, 한달 간 네 시간씩만 투자하면 너끈히 배울 수 있을겁니다."

"오, 시도해봐야겠군. 그럼 능숙해지면 십분이면 그릴 수 있겠지? 빨리 그리면 느낌이 살텐데."

"오, 그 정도도 안 걸립니다." 오컷은 더욱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분이면 충분하죠."

"아, 정말 고맙네."

첸 양은 오컷에게 웃어보였다. 굉장히 고마운 모양이었다. 오컷은 조금 고개를 까닥이고는 제 친구들에게로 걸어갔다.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저 질문에서 뭐가 나온다고 물은거지? 첸 양의 행동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넘어서서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녀는 내게 고갯짓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대체 여기서 뭘 얻은거람.


"알렉스 케인이 범인이야."

첸 양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대답했다.

"뭐요?"

"케인이 범인이라니까, 아냐?"

경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나는 둘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노트의 표면만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엔진음이 덜덜거리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웅웅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갖가지 기기들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지친 얼굴로 탐정을 곁눈질했다. 첸 양은 이 상황이 돌아가는 꼴이 좀 우스워지기 시작한 듯 보였다. 우리는 경찰 트럭에 타 있었다. 경감이 약속한 자료를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자료를 전부 넘겨주고 나서, 갑자기 그는 무슨 비밀이라도 된다는 듯이 목소리를 죽여 케인을 범죄자로 지목했다. 경감은 내심 자신의 주장에 강력한 자신감이 있는 듯했다. 첸 양이 그의 의견에 동의라도 해줬다면 괜찮았을 텐데. 물론 탐정은 그러지 않았다.

"허… 일단 들어나 봅시다. 왜 케인이 범인이라는 거죠?"

"자, 일단 내가 준 이 기록이나 봐봐. CCTV 기록이야."

첸 양은 경감이 건넨 서류 뭉치를 받아들고 들추기 시작했다. 세세히 읽진 않는 듯이 보였다. 얼굴 표정도 못마땅함이 가득해, 나는 미리 경감의 의견의 명복을 빌었다. 경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알렉스 케인은 션 오컷을 11시 30분에 만났다고 말했어. 그런데 그걸 보면 놈이 11시에 집에 나선 것을 알 수 있지. 30분의 공백이 생기는 셈이지."

"그런데 케인이 그걸 아는데 거짓말을 했다고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긴 하지. 경찰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테니까."

"CCTV가 있잖아요?"

경감은 이제부터가 즐거운 구간이라는 듯이 한껏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던월은 예로부터 쿨쟁이 놈들의 소굴이었어. 인식재해따위로 카메라가 파손되는 경우가 허다했어. 그래서 CCTV는 원래 없지! 놈들도 그걸 알고 있어. 그게 없으니까 여기로 오는 놈들도 있고. 그래서 여기 치안이 좋지 못한 편이긴 했어. 하지만 최근에 비밀리에 인식재해 방지 시스템을 부착한 CCTV를 설치했는데, 거기에 놈이 찍힌 거야. 자, 거기 봐봐. 30페이지. 놈이 집에서 나오고 있는 사진이 있지? 시간은 10시 59분. 맞지?"

나는 첸 양이 들여다보고 있는 자료를 어깨 너머로 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각은 경감이 말한대로였다.

"뭐, 좋아요." 탐정은 툴툴대며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해요. 다만 명확하지가 않다는 거죠. 아직 걸리는게 많고."

경감은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자네도 계속 검토하다보면 결국엔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거야. 내기도 할 수 있어."

탐정은 픽하는 소리와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동안 웅웅대는 소리만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사이를 관전하고 있었다. 경감은 헛기침을 하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 좀 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첸 양은 특유의 웃음을 띄면서 미동도 않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잠깐 경감과 눈을 마주쳤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는 그도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안 지나 첸 양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경감님. 어쨌든 자료 고마워요. 그리고… 의견도. 나중에 봅시다."

나는 얼른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뒤로 흘낏 쳐다본 경감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