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졸려쓰기귀차나

처음은 데비였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모임 장소로 향한 우리는 데비 대신 작고 붉그스름한 구슬들과 데비의 옷 한벌만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머지않아 모두가 알아챌수 있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눈알 하나가 구슬로 변해가고 있는 장면이 데비의 카메라에 찍혀있었기에.

그 다음은 베스였다. 어느날 베스가 온몸이 끊어질듯 아프다고 모임에 나오지 못하자 우리들끼리만 레스토랑에 갔을때, 우리를 위한 특별 코스가 있다고 웨이터가 말했을때, 그리고 메인 디쉬에서 익숙한 얼굴이 끔찍한 표정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나왔을때, 그제야 우린 깨달았다. 에피타이저 이름이 왜 갓 잘린 고기 조림이였는지.

보비는 그래도 편하게 간 축에 속했을것이다. 비록 그 시체는 너무나도 끔찍한 몰골이였지만 머리부터 터져 즉사했을테니 고통은 없었을것이 분명했다. 다만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건지 보비의 온몸에 박힌채로 반짝거리는 전선들을 한가닥 한가닥 뽑으면서 듣기 거북할 정도이 비명을 내질러대었다. 전선들을 모두 뽑고 난 뒤의 시체는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세상은 어쩌면 그저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공장처럼 생겼을지 모른다. 그 거대한 무채색의 굴레에서 나는 오늘도 기계에 새로 끼워맞추어질 톱니바퀴가 되기 위하여 끝없이 발돋움한다. 철내음과 기름 냄새를 내 지독한 장미향을 가릴 향수로, 굴뚝에서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를 내 볼품없는 붉은 꽃잎들을 가릴 옷으로 삼고 좁은 시멘트 바닥으로 내 몸을 이끈다.

수업을 알리는 요란스러운 종소리가 교사 곳곳에 울려퍼진다. 시끌벅적했던 복도와 교실은 곧 장례식장처럼 씁쓸한 적막함만이 감돈다. 무채색으로 물들어가는 이들이 똑같이 생긴 옷을 입고 똑같이 생긴 책과 볼펜을 들고서 차갑고 단단한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칙칙한 녹색 칠판에 시선을 맞춘다. 곧 무채색의 화가가 교실에 들어온다. 화가가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집어든 어두운 빛깔의 분필들이 칠판 위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마치 칠판을 녹색 대신 보다 더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하려는것처럼. 그럴때마다 모두들 딱딱하면서도 둔탁한 분필 소리를 음악삼아 그림의 단 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고개를 앞으로 내뺀다.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수 없을, 온몸의 감각을 녹슬게 만들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한번 요란한 종소리가 교사 곳곳에 울려퍼진다.

그것만은 무언가 달라보였다.


미美, 그 외에 그녀의 존재를 완벽히 표현할수 있는 말은 이세상에 없을것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검은 머리칼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차분히 찰랑거렸다. 마치 색은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눈부셨지만, 그녀의 특징중에서는 그저 한없이 작고 사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화장끼 한점 없는 그 얼굴은 이목구비를 모두 담을수 있을만큼 넓으면서도 붉게 올라온 화상 흉터가 한점의 어색함 없이 어울릴수 있을정도로 포용적이였다. 작고 살짝 올라간 코는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히 이 세상에 맞서는 그녀의 성격과 판박이였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 아래서 붉게 빛나는 입술에 그것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묻혀버렸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과 걱정이 섞여 조금씩 움찔거리는 모양이 마치 꽃밭 한가운데에 자라있는 크고 굳센 나무가 봄바람에 흔들리는 형상과 너무나도 쏙 뺴닮아 순간 영화속 한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정도였다. 저렇게 굳세면서도 외로워보이는 입에서 그런 의지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것은 가식이나 무의미한 겉치례 하나 없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녀의 표정이였다. 속마음을 들키고싶지 않은것인지 억지로라도 얼굴에서 감정을 지워보려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듯 노오란 걱정과 새빨간 부끄러움이 한데 섞여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이, 어색한 부분 하나 없이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이 눈을 깜박이는 매우 짧은 순간조차도 그 장면을 놓치고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 예술적이면서도 거짓 하나 없는 형상을 바라보며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한것을 깨달았다. 그 안의 보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자 꾹 닫힌 눈꺼풀이 더이상은 보여줄수 없다고, 이 이상은 네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내게 속삭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끔찍하면서도 분노서린 단말마를 내질렀다. 이 단조롭고 지루한 잿빛 세상에서 드디어 아름다운 빛 한줄기를 찾아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넌 여기까지라는 말이 어찌나 마음을 갈갈이 찢어발기던지 눈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차마 참아낼수 없었다. 심지어 내게 모진말을 내뱉는 눈꺼풀마저도 저리 아름답다니, 난 곧 내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한발짝, 그 안에는 내 인생의 최고의 욕망이자 빛을 잡아내고자 하는 내 안의 본질적인 욕구가 담겨있었다. 주변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길도, 배경도, 그리고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았다.


저 하늘 위로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나비들은 어떤 느낌일까요
아무런 소리없이, 그리고 동시에 미소를 띄우며
한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서 저 위로 날아오르는
그 찬란한 모습들이 너무나도 눈부십니다

아마도,
어떤 나비는 누군가의 빛이자 축복이였겠죠
어떤 나비는 누군가의 분신이였을것입니다
어떤 나비는 누군가의 버팀목이였을것이고
어떤 나비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만큼 많은 이들의 빛을 받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나비는 평생 속할 무리를 찾지 못했을수도
어떤 나비는 빛대신 캄캄한 어둠만을 바라보며 살았을수도
어떤 나비는 저 먼곳만을 향해 달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졌을지도
어떤 나비는 눈물먹은 축축한 몸을 평생 이끌며 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둠속에서 절망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그들은 깊게 빠져드는 외로움 대신 높이 치솟는 용기를
그들은 젖은 몸을 허물없이 드러내며 꾸밈없는 진심을
이 넓은 세상에 흩뿌리며 살았었겠지요

혹독한 바람과 천적들을 견뎌낸 번데기에서 부화한
그 피와 땀이 짙게 베인 미련없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저 노을진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나비들의 모습을 본
붉은 햇빛과 화려한 춘풍이 축복해주는듯한 그 모습을 본
그 누가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그 누가 눈물짓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녹색 나뭇잎을 먹으며 하늘을 꿈꾸는
저들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픈
작고 연약한 녹색 애벌레의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래를 킨다
흥에 겨워 눈앞을 가린다
이제 내 세상은 명대신 암으로 가득 차올랐다
형형색색의 소리가 내 귀를 뚫고 들어와 나의 암색 도화지를 잔뜩 색칠한다

검은 파도들이 잡색의 무음를 타고 춤춘다
흑색 물고기들이 누리끼리한 색의 상어를 잡아먹는다
잿빛 눈알이 적빛으로 치장된 입에게 비웃음을 짓는다
눈물서린 웃음이 분노에 찬 눈빛을 가린다

이제 내 눈은 지상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오직 내-

이것은 내 허물속의 결심
이것은 내 불사의 맹세
이것은 내 순백의 열정
그리고 이것은 네 손바닥 위에 놓인 수정구

네 마음따라 굴려지며 이리저리 나돌다가
금세 질려 저 쓰레기더미에 몸을 맡기게 되어도
그 탓에 산산히 조각나 흉한 몰골이 되어도
나는 부동으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터이니

오직 너만을 위해 내 몸과 영을 불사를수 있길
오직 너만을 위해 내 차가운 숨을 끝맺을수 있길
오직 너만을 위해 내 껍질을 벗어던질수 있길
그리고 오직 네게서만 내 존재가 의미를 찾을수 있길


네가 처음 내게 미소를 띄워주었을때
나는 평생동안 내 가슴에 쌓아올렸었던 잿더미를 털어버렸다

네가 처음 내게 머리를 기대었을때
나는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네가 처음 내게 네 진심을 전하였을때
나는 한참동안 미소와 눈물을 멈출수 없었다

네가 처음 내게 입을 맞추었을때
나는 평생동안 입을 씻지 않을것이라 맹세했다

그러나 나는, 오 나는
나는 널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던걸까

내가 처음 네 손목에 핀 적색 백일초를 보았을때
네가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을때
나는 내 가슴에 핀 부추꽃을 억지로 뜯어내었다

내가 처음 네 등을 물들인 푸른색 물감을 보았을때
네가 잊어달라고 내게 부탁했을때
나는 내 마음을 물들이는 푸른색 물감을 애써 무시하였다

내가 처음 네 팔 위를 달리는 쇠붙이를 보았을때
네가 날 안으며 모른척 해달라고 내게 부탁했을때
나는 내 손발을 옥죄어오는 사슬을 끊어내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천장에 물구나무선 너를 처음 발견했을때
그러던 어느날 네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때
그제서야 나는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수있었다

아아, 결국 이 시에 운율이 형성되었구나
만약에 그날 내가 중간에 저 운율을 끊어내었더라면
비록 이 시를 망쳤을지언정 넌 아직 내 곁에 있었겠지
아, 이제 나는 널 따라갈까 한다


뿌옇게 차오른 안개가 내 눈앞을 가린다. 하늘도, 땅도,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 하나의 형체만이 저기서 날 바라본다. 아니, 사실 바라보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제 내 세상에는 저것만이 남았다. 안개를 해쳐나가며 들숨으로 붉은 분노를 마시고 날숨으로 속에서 불타버린 잿가루를 내뱉는다. 한걸음, 그녀와의 첫만남이 머릴 강렬하게 스친다. 그녀의 미소는 검게 타올라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두걸음, 그녀와의 첫날밤이 심장을 강타한다. 분홍빛으로 물든 침대 위 행복이 검게 타올라 역겨운 거짓말만이 남았다. 세걸음, 네걸음, 이제 걸음수를 세는건 더이상 의미없다. 곧 너에게로 간다.


어느날 아침, 지도 끝자락에 틀어박혀있는 자그마한 촌마을 해변가에 퍽 오래되어보이는 시체 한 구가 떠밀려왔다. 역설적이게도, 그 모습은 겨울밤에 홀로 불타버린 작은 나비를 연상시켰다. 그 나비는 썩은 냄새가 났다.

경찰차는 의외로 마을까지 십 분도 채 안되어서 도착하였다. 아마 경찰들도 별볼일 없는 촌구석에서 갑자기 변사체가 발견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한것처럼 보였다. 묘한 적막이 마을에 내려앉았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앞다투어 경찰들을 그 현장으로 안내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ㅡ심지어는 발소리조차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