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We Circus Yet

아이는 울지 않았다.

"아저씬 누구세요?"

남자는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키는 그의 절반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았고 얼굴은 귀여웠다. 방 주인의 정당한 권리라도 주장하는 듯 조막만 한 손은 허리춤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남자는 헐렁한 트렌치코트에서 유리조각을 털어냈다. 허리에는 빨간 풍선이 묶여 있었고, 발은 바닥에서 1cm가량 떨어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분을 사방에 덕지덕지 바른 듯이 새하얬고, 그 위를 길게 그린 붉은 입술과 눈물 자국, 눈두덩에 그린 푸른 세모 모형이 덮었다.

남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허리춤에서 풍선의 끈을 풀렀다. 그 순간 남자의 발은 바닥에 가 닿았다. 아이는 그 광경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아저씨요."

남자는 답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올렸다. 방 안은 무척이나 고풍스러웠다. 눈을 어떤 곳으로 돌려봐도 값나가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아이의 취향이 아님이 분명한 인테리어였다.

그 안에서 물건들은 질서 정연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아이의 짓이라기보단 아이와 같이 있는 여자의 행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했다. 남자는 아이와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겁먹은 듯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분명 아이의 행동을 모두 통제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했겠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너무나 흔한 일이기도 했고.

그러나 여자애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질질 짜거나 울지 않았고, 되려 당돌했다. 방금 제 방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광대 분장의 이방인 앞에서도 전혀 물러서는 기색 없이.

"대단하구나, 꼬마야." 남자가 말했다. "난 방금 네 방에 침입한 거란다. 그것도 창문으로."

"그래도 난 안 무서워요."

아이는 당당했다. 여자는 숨을 헉 들이키고 흐느끼며 아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목청을 애써 돋구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진정해!¡Cálmese!”를 던진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여자의 입을 단단하게 묶고 있는 풍선 사슬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안 무서워한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지." 남자는 나직하게 말하며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무서워해야 할 때가 온단다."

"지금은 그런 순간이 아녜요. 우리 아빠는 어엄청 무섭거든요. 삼촌들도 많아요. 삼촌들은 아빠를 지켜주는 사람들이에요."

남자가 씨익 웃자, 과장되게 그린 붉은 입술이 기괴하게 구부러졌다. 여자의 흐느낌이 더욱 거세졌다.

"나도 아는 사실이구나, 얘야. 하지만 고맙다."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피하지 않았다.

"난 네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거든."


키리덴발Kiridenbal의 오후는 미적지근했다. 몇 번의 서걱거리는 소리 끝에, 중년 남자는 쓰던 편지를 마무리 짓고 고급진 편지 봉투에 편지지를 넣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서 늦여름의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야카슨 저택의 주인은 빅토리아 양식의 고풍스러운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 K. 야카슨Edwin K. Jakason은 온몸이 굳었던 감각을 느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경영도 경영이었지만 며칠 뒤 열릴 교회 부흥회 생각에 너무나 열중한 것 같았다. 그는 두통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야카슨은 씩 웃으며 그를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에게 딸, 에밀리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부흥회는 몇 년 만에 처음 열리는 일이고, 오린Orin 계급인 그로서는 이 부흥회가 더 없는 기회였다. 사람들과 친목을 유지하고 그 덕에 올라가는 권력, 이는 그에게 하나의 교리였고 공식이었다. 다른 분야, 이를테면 사교계나 골프 클럽 같은 분야에서는 모조리 맞아떨어지는 공식이 유일하게 적용이 불가한 곳이 바로 이곳, 키리덴발의 교회였는데 마침 부흥회가 열린다니.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이었다.

야카슨은 기지개를 피며 곧 에밀리와 경호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마침 점심시간이니 아침나절 동안 가정교사와 붙어 있었던 에밀리도 자유를 만끽할 때가 왔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과 붙어 있는 주방 한켠에는 서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산림 속에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대리석 이온Ion상을 유화로 그려낸 그 그림은, 마치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을 따라 한 듯한 느낌이었다. 구도와 의복은 확실하게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만이 달랐지만.

야카슨은 이온상의 얼굴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해보려고 애썼다. 입은 삐뚤게, 눈은 부리부리하게, 코는 찡그리게.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이온의 얼굴에 떠오른 강력한 카리스마와는 다르게.

이따금 야카슨은 그 그림의 창작자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사업차 프랑스에 갔을 때 누군지도 모르는 동양인에게서 산 그림이었는데, 처음에는 손해를 봤다 싶어 기함했지만 점점 마음에 들어갔다. 화가가 누군지만 알면 전체 작품집을 사도 좋았을 텐데. 야카슨은 그때 그 동양인을 붙잡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야카슨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고매한 학자들과 이름 높은 젠드, 벌루타르 같은 이들이 그의 집에서 그림을 보곤 극찬했다. 한 미술 평론가는 이를 두고 “권력에 이르는 길을 암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자세”라는 표현까지 쓰며 이를 추앙하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의 평가 역시 비스무리한 뉘앙스를 남겼다. 어찌 야카슨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야카슨은 바로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가로 50cm, 세로 30cm의 크기의 유화는 언제 보아도 방금 그려낸 것처럼 물감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쥐고 늘 서재에서 나올 때 그러했듯이 그림을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거대한 이온상, 마치 현재의 크리스트교를 거부하려는 듯이 보이는 이 불온한 풍채. 세상에 이미 너무 퍼져버린 사상을 추월하려는 듯이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야카슨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할 마음이 없었다. 되려 할 수만 있다면, 그와 수많은 낼캐교도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추월은 가뿐했다. 야카슨은 이내 그러한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워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금박을 입힌 액자 틀을 매만졌다. 점심시간은 어느덧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에밀리와 경호원들이 오질 않는 걸까.

야카슨은 비단 재질의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에밀리의 방 쪽을 쳐다보았다. 구불구불한 복도 때문에 딸의 방문은 바로 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야카슨은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아이를 데리러 가고 십분 정도 후면, 딸아이는 달려나오고 경호원들은 뒤에서 흐뭇하게 웃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엇이 이리 늑장인가.

그는 굽이굽이 꺾인 딸아이의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가정교사와 에밀리, 경호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적어도 오기 시작했더라면 에밀리의 높은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을 것이다. 야카슨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많이 이상했다. 그는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에밀리가 잘 있는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목구멍의 살점이 하나하나씩 도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카슨은 재빨리 다른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경호원 둘을 불렀다. 하필이면 오늘 총 정원이 일곱 명인 경호원 중 셋이 휴가를 얻었다. 고로 야카슨 저택에 있는 경호원은 넷. 야카슨은 결코 다음부터는 두 명 이상 휴가를 겹치도록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인의 성난 눈빛을 본 두 경호원은 재빨리 간소하게 무장하고 주인을 따라나섰다. 경호원은 재작년 낼캐 혐오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회합에서 듣고 난 뒤에 고용했다. 여태까지 그 덕을 본 적은 없다는 것이 야카슨이 후회하는 일이었긴 했지만.

그는 오늘 그 덕을 보길 바랐다. 그들은 재빨리 에밀리의 방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긴장한 숨소리가 야카슨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경호원 중 하나가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금방 유연하게 뒤로 넘어갔다.

야카슨은 딸의 침대에 앉아 있는 광대를 보았다.


광대는 문을 열고 멀뚱히 서 있는 세 얼간이를 보았다. 하나같이 벙쪄 있었고, 멍청한 기운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간이들 중 뒤쪽 가운데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거요!"

광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가 에드윈 야카슨이라는 것이렷다. 광대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는 야카슨과 두 머저리가 얼어붙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봐. 내가 웃으면 항상 분위기가 싸해진다니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면서."

광대가 입을 열자 셋은 모두 당황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호원 중 하나가 손을 유독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광대에게 겨누었다.

광대는 능청스럽게 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총으로 쏘려고까지 하는군. 잘 알겠소. 자넨 광대 공포증이라도 있나?"

‘자네’는 총을 겨눈 경호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호명 당한 사실을 깨달은 경호원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젓는다는 행동보다는 떠는 행동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야카슨이 그 경호원을 노려보는 것을 보고, 광대는 쇼를 시작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리를 흔들어 반동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 여러분." 광대가 운을 떼자 세 명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벗어던질 때가 된 것 같군요."

"헛소리하지 마! 내 딸 어떻게 됐어? 내 딸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미안한데 따님은 주무시고 계시오. 아주 푹 자고 있지. 덤으로 가정부인지 가정교사인지 모를 여자와, 두 덩치도."

광대는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었던 곳 뒤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침대 끝에는 여자와 경호원 둘이 널브러져 있었다. 야카슨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광대를 제치고 딸에게로 달려갔다.

광대는 그 모습을 응시했다.

"…아버지라…"

곧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광대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 긴장하고 있는 두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광대 공포증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녀의 손마디는 희게 바래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확연한 공포의 증상이었다.

광대는 더욱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동감이야. 더 다가오지 말 걸 요구하지."

다른 경호원이 말했다. 그는 권총을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죽 장갑을 끼고 살기 등등하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걸 보니 꽤 주먹을 쓴다는 것을 피력하는 듯했다. 광대는 그에게도 살짝 웃어 보였다.

"빅토리아 여왕님 같으시군."

광대가 속주머니에서 홀쭉한 긴 풍선을 꺼내며 말했다. 야카슨은 아직도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광대는 흘낏 뒤를 보며 그의 상태를 체크하고, 풍선을 불기 시작했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 풍선 좀 저리 안 치워?"

"필립 말로를 알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광대는 풍선에서 입을 떼더니 말했다. 그리고 바람구멍을 그들에게로 돌렸다.

곧이어 굉장한 바람이 두 경호원에게로 밀어닥쳤다. 둘은 중심을 잃고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광대는 바로 가죽 장갑에게로 달려들었다. 다시 홀쭉해진 긴 풍선을 잡고, 바닥에 부딪혀 정신이 없는 가죽 장갑의 목을 옭아맸다. 산소를 요구하는 켁켁거림이 가죽 장갑의 목에서 터져 나왔지만, 광대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옆에서 광대 공포증이 아등바등 기어가 날아간 권총을 붙잡으려 했다. 광대는 재빨리 장갑의 목을 조른 채로 공포증의 다리를 밟았다. 고통에 찬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공포증은 이제 두려움으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 그녀는 권총도 포기하고 막무가내로 광대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광대는 얼굴로 날아드는 스트레이트를 날렵하게 몸을 틀어 피했다. 이따금 정신을 잃어가는 가죽 장갑의 면상으로 막기도 하고. 가죽 장갑의 턱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숨이 막혀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도 장갑은 고통스럽게 웅얼거렸다.

마침내 공포증의 주먹이 가죽 장갑의 코를 명중하자, 외마디 소리와 함께 가죽 장갑은 정신을 잃었다. 광대는 장갑의 목에서 고무풍선을 풀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이는 광대 공포증과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체력은 떨어져 가는지 무릎에다 손을 얹고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광대는 광대 공포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흡사 어릿광대가 하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코트 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내 풍선 칼이 공간을 접기라도 한 듯 슉 튀어나왔다. 광대는 칼을 오른손으로 고상하게 쥐어들고 펜싱 자세를 취했다. 공포증이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렸다.

둘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광대는 무작정 달려드는 공포증을 가볍게 피하고 그녀의 턱을 올려쳤다. 공포증이 마치 돌덩이에 얻어맞는 것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그냥' 풍선 칼은 일으킬 수 없는 타격이 공포증의 턱에 전달되었다. 이는 곧 턱뼈를 거슬러 올라 소뇌로 전달되었고, 거기서 파동이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 뇌진탕이 공포증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광대 공포증은 가죽 장갑이 엎어져 있는 바로 옆에 쓰러졌다.

광대는 물끄러미 둘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고는 돌아섰다. 사람이 느끼는 공포와 긴장,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행위예술은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야카슨은 아직도 반응하지 않는 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흔들어 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광대가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야카슨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돌리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광대는 물끄러미 그 눈빛을 맞받았다.

"내 말은," 광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강도 높은 수면제니 그렇다는 거지. 전신 마취하고 같은 원리요. 믿는 건 당신 마음이지만."

"…뭘 원하는 거요?"

야카슨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요점을 잘 짚는 성격이로구만."

광대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 야카슨의 목에 풍선 칼을 들이댔다. 야카슨의 눈이 황당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저 뒤에 쓰러진 두 친구들 보이시오?"

광대가 뒤를 가리켰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야카슨의 눈에 한 줄기 공포가 깃들었다.

"당신이 우습게 여기는 이 보검이 한 짓이지. 자, 그럼 여기서 나갑시다."

광대는 야카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광대의 보폭을 따라가지 못하고 야카슨이 버둥거렸다.

마침내 서재 앞, 주방에 왔을 때 광대는 야카슨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는 주위를 살폈다. 목표물은 주방에 있다고 들었다. 주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마침내 광대는 야카슨이 늘상 바라보고 서 있던 그 그림을 찾아냈다.

"그 그림은 안 돼!"

광대는 고개를 돌려 야카슨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야카슨의 상태는 그가 당초 봤던 것보다 많이 나빠져 있었다. 고급진 가운은 마구 주름져 있었고, 단정하게 올린 포마드 머리는 헤집어져 있었으며, 귀티가 났던 얼굴은 어느새 꾀죄죄하게 변해 있었다. 야카슨은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놀랐는지 광대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압니까, 선생?"

광대가 말을 걸자 야카슨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광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죠. 첫째는 누군가가 나를 여기로 보내도록 시켜서."

"…청부란 말이오? 돈이 목적이라면 내 얼마든지 줄 수 있소.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도 없는 일로 만들 수도 있—"

광대가 풍선 칼로 야카슨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소리 없는 비명이 야카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우리 규칙 하나 정합시다." 광대는 자기 얼굴을 아파하고 있는 야카슨의 얼굴에 들이댔다. "내 말은 끊지 말기."

야카슨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내 아버지의 작품이 여기 걸려 있어서."

"아버지? 그럼 당신 아버지가 이 그림의—"

이번엔 오른쪽. 소리 있는 비명이 야카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어깨를 부여잡고 주방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혹시 학습 능력이 없다는 소리 많이 안 듣나?"

광대는 다시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멍하니 그림을 감상했다. 거대한 이온상의 이미지가 광대의 망막에 박혔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이제 꼭 말해야 하는 대목이다. 기필코.

"세 번째는 당신이 예술도시 바라트에 진출했던 기업 “폴리모프”의 대주주였다는 점."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오? 나는…"

광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확 그를 향해서 몸을 틀자, 야카슨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매가 떨어지지 않았다.

파블로프의 개는 눈을 다시 떴다.

그때 매가 왼쪽 어깨에 직격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어깨를 부여잡고 악을 쓰는 야카슨을 내려다보며, 광대는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입에서 나직하게 이야기가 쏟아져 내렸다.

"당신은 그냥 돈만 벌면 장땡이었겠지… 그러나 당신이 불을 붙인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요…"

"당신은 변칙예술가가 아니니 ‘최후의 위대한 쿨전’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이 후원했던 돈 많고 쓰레기 같던 새끼들과 억압받고 탄압당하던 가난한 예술가들이 싸운 일이었지."

야카슨은 침입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광대의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의 색깔이 섞여갔다.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그 싸움에서 죽었어. 개중 몇 명은 그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죽었어! 그 개 같은 새끼들이 마구잡이로 죽이려고 싸움 전부터서 사방에다 그래피티를 그려놨었지. 그 새끼들은 그걸 스포츠라고 생각한 거야…"

마침내 광대의 얼굴은 완전한 분노의 빛깔로 점철되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의 목에서 성난 목소리가 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꼭 그 안에 들어갔어야 해. 당신은 꼭 거기서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자기 부모를 찾았던 음색을 기억해야 한단 말야!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이 고막이 터지고 벽과 몸이 하나가 되어가면서 느꼈을 그 공포를 느껴야 한다고!"

광대는 야카슨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죽을 때까지 미쳐가면서 ‘난 쿨하지 않아’를 외쳐야 하는 인간은 당신이야."

광대는 쓰러진 야카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모든 건 당신이 벌인 일이나 다름없어. 이 더러운 새끼."

야카슨은 멍하니 광대를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키며 얼굴에 묻은 침을 실크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누군가 했더니 미친 예술가였군그래." 야카슨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때 많이들 죽었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게 내 책임이라니.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나는 단지 높은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에게 지원과 명예를 가져다준 것뿐이오."

“우선, 난 미친놈이 아니오, 선생.” 광대가 말했다. “미친놈은 우리 시장에 포화 상태거든.”

광대가 칼을 휘두르자 야카슨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저절로 야카슨 무릎을 꿇는 형국이 됐다. 광대는 그의 멱살을 그러쥐고 뺨을 후려쳤다. 억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야카슨의 뺨이 부어오르기 시작하자 광대는 야카슨의 멱살을 놓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다시금 분노로 떨려 나왔다.

"그리고 높은 경지 운운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당신 같은 사람은 예술을 평가할 자격이 없어. 당신의 마음에 드는 예술을 한 작자들만 밀어주면서 뭐? 높은 경지?"

번개와도 같은 동작으로 광대는 야카슨의 목덜미에 주사기를 꼽았다. 그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더니, 곧 유아적 기쁨이 어리고, 코피를 흘린 뒤, 엎어졌다. 광대는 몸을 굽혀 엎어진 야카슨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에드윈 야카슨. 당신은 뭐가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해. 떠오르는 어떠한 이미지는 있겠지. 하지만 전부… 전부 허상이야. 허상을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겠지, 에디. 그냥 모두 낮잠을 잔 거야…"

서서히 코골이로 변해가는 야카슨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광대는 그의 목에서 히스테리la histeria라고 적힌 주사기를 뽑았다. 주사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뒤, 광대는 야카슨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말요, 야카슨 씨. 미친놈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광대는 코 끝을 긁적였다. 손톱에 붉은 물감이 묻어나왔다.

"오늘 약을 안 먹었거든."

에드윈 K. 야카슨은 코를 골았다.


야카슨 저택의 주인은 빅토리아 양식의 고풍스러운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 K. 야카슨은 허리가 뻣뻣한 감각을 느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경영도 경영이었지만 며칠 뒤 열릴 교회 부흥회 생각에 너무나 열중한 것 같았다. 그는 두통을 느꼈다.

그리고 기시감도 느꼈다.

머릿속 한 군데가 간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긁적이다 못해 두개골 안쪽을 좀 긁어내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야카슨은 졸린 눈을 비비며 서재에서 나왔다.

그림은 여전히 건재히 자리해 있다. 여전히 어떤 의미로서 그곳에 작용하고 있다. 물론 그가 조금만 더 자세히, 편집증적으로 그림을 세세히 살폈다면 기이하게도 그림에 윤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야카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기까지 했다.

야카슨은 팔짱을 끼며 그 자리에 오래 서 있기로 마음먹었다. 잠을 깨기 위해서였다. 곧 점심이 될 테였고, 그렇다면 아침나절 동안 가정교사와 붙어 있었던 에밀리도 자유를 만끽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창 밖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붉게 타오르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야카슨은 멍하게 창문으로 다가가 노을이 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오래 잔 모양이었다.

야카슨은 한숨을 쉬며 그림으로 다가갔다. 이래저래 오늘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그림이 걸린 벽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리고 그는 그림 아래에 4B 연필로 쓰인 문구 하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리처드 룽Richard Leung 다녀감. 좋은 쇼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