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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라일 콜린스, D대학 사학과 교수이자 고고학자인 나는 동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업도 있었다. 나는 빛을 감시하는 어둠의 존재, 주간 경비대원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은 실존한다. 내가 처음으로 각성하면서 마법이나 괴물, 신화와 전설 같은 게 모두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인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이런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나 현상을 다른 존재라 부르며, 다른 존재는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모두들 능력을 각성하면 별 이유 없이 우리의 힘은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진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규칙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빛과 어둠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분류라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더 적당히 표현할 방법도 딱히 없기에 불만은 없다.
빛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는 타고난 재능과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같으며, 결국 그 내면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빛의 마법사가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 살인마일지도 모를 일이고, 어둠의 저주술사가 남몰래 고아를 보살피는 얼굴 없는 천사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언뜻 보기에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이 선과 악의 대립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태초에 서로를 잘 몰랐던 빛과 어둠은 서로를 오해하여 대립했으나 곧 자신들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고 위대한 협약을 맺었다. 협약에 의거하여, 빛의 세력은 야간 경비대를 두어 밤에 활개 치는 사악한 어둠의 존재를 처단했고 어둠의 세력은 주간 경비대를 두어 낮에 자신의 능력을 악용하는 빛의 존재를 심판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진 오늘날, 주간 경비대가 어둠의 존재를 체포하거나 야간 경비대가 빛의 존재를 재판에 넘기는 일이 늘어가면서 주간과 야간이라는 수식어의 의미가 희석되고 있지만, 뿌리 깊은 전통의 관성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세력에 있는 범죄자 소탕을 상대의 손에 맡기고 있었다.
나는 저주에 재능이 있는 어둠의 존재이다. 또한, 나는 세상의 균형을 깨트릴 만큼 큰 규모의 능력을 부리거나, 자신의 능력을 악용하여 평범한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우리의 존재를 평범한 사람들에게 노출시킬만한 빛의 존재를 잡아들이는 주간 경비대원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항상 변한다. 위대한 협약으로 빛과 어둠의 무조건적인 대립이 공존으로 변했듯이, 이른바 '대접촉'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다른 존재들의 사회도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과 그들이 포섭한 다른 존재들이 비밀리에 힘을 합쳐 우리의 존재와 능력의 근원인 어스름의 힘을 연구하여 이미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의 방심이 불러온 것은 위대한 협약으로 탄생한 '황혼 의회'의 붕괴와 그에 뒤따른 학살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세계 오컬트 연합(The Global Occult Coalition)", 일명 GOC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 UN의 산하기관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모두 파괴하여 인류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극단적인 이념을 가진 이 불한당들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합류를 강요했고 거부하는 다른 존재를 색출하여 처형했다. 우리는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작원은 이미 지난 한 세기에 걸쳐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철저한 계획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합류를 거부한 다른 존재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이런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존재가 있었으니, 이 세상에는 우리조차 몰랐던 다양한 종류의 "다른" 존재가 있으며, 이러한 존재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오며 생존자들에게 접촉한 "SCP 재단"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황혼 의회와 여러모로 닮아있었다. 다른 존재들을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숨기고 지키는 것은 지난 3천 년간 우리가 해 오던 일이었고, 이 "재단"이라는 자들은 ‘확보(Secure), 격리(Contain), 보호(Protect)’라는 구호 아래 지난 수백 년 동안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같은 일을 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기꺼이 능력과 경험으로 보답하며 힘을 합쳤다. GOC의 학살로부터 도망친 마지막 남은 생존자의 무리는 이제 "마법사"가 아닌 "연구원"으로 불리며, "경비대"가 아닌 "기동특무부대"로 불린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사라진 지금 서로를 감시하는 경비대의 존재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목뿐이었던 공존의 이면에 있던 뿌리 깊은 대립을 드디어 완전히 청산한 우리 빛과 어둠의 다른 존재들은, 생존 그 자체라는 공통된 목적 아래 진실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진정한 공존을 약속했다.
내 이름은 라일 콜린스. D대학 사학과 교수이자 고고학자인 나는 동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업도 있다. 나는 SCP 재단의 기동특무부대 Σ-716 “은퇴한 경비대(Retired Watch)의 최고 책임자이다.
…(전략)… 새롭게 발생하는 미등록 SCP-Σ716-2 개체(이하 다른 존재)는 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GOC와의 충돌 없이 기존의 다른 존재 사회의 방식대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안전가옥을 제공한다. 원하는 경우 검증을 거쳐 재단에 합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후략)…
-SCP-Σ716 어스름의 특수 격리 절차 중.
“안녕, 라일. 3구역에서 7구역으로 넘어가는 길 있지? 이끼가 좀 끼었잖아. 거기서 넘어질 뻔해서 그런데 혹시 내 머리 위에…”
“아주 깨끗합니다, 박사님. 저주는 없어요. 이끼가 낀 돌길은 원래 미끄럽습니다.”
나는 자신이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나의 업무를 방해하는 패트릭 박사를 안심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내 눈에는 패트릭 박사의 머리 위에서 옅은 잿빛 연기가 불규칙적으로 꾸물대고 있는 것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것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를, 일상적인 사소한 저주였다. 세상에 그 정도 저주조차 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힘’이 있고, 짜증을 부리며 충동적으로 내뱉고 별 생각 없이 함부로 꺼내는 사소한 욕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 힘이 담기기 때문이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날 만나는 소나기, 5초 차이로 놓치는 버스, 청소를 하다가 아이의 레고를 밟아 느끼는 발바닥의 고통 등의 사소한 불행 상당수가 바로 그런 일상적 저주의 결과물이다. 우리 모두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저주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무자각 저주’도 모두 눈에 보이는 우리 다른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나처럼 저주를 다루는 자라면 아무래도 말과 행동에 있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소한 저주조차도 우리 다른 존재들에게서 비롯되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진 않더라도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얌전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사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가. 아, 오늘 탐사는 자네 혼자라고?”
“네, 박사님. 자랑 좀 하자면 그렇게 깊은 어스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그럼 바로 시작하겠네.”
나는 패트릭 박사가 기록을 시작한다는 손짓에 맞춰 방호복의 전원을 켜고 어스름으로 진입했다. 세상의 다채로운 빛깔이 탁해졌고 초점이 흐려졌다. 자신의 한계에 근접한 깊은 어스름 특유의 기분 나쁜 추위와 더위가 동시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파리와 모기가 나를 귀찮게 굴었다.
“기록 시작합니다. 비상호출장치 점검 중…이상 없습니다. SCP-Σ716의 환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시각은 일공시 공육분, 기록 번호 Σ716-u-02. 탐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스름은 다른 존재들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켈트족은 어스름을 그림자 세계라 불렀고, 그 유명하신 플라톤은 이데아라 부르며 어스름이야말로 세상의 근원이라 했다. 대접촉으로 어스름을 알게 된 재단은 SCP-Σ716이라는 일련번호를 붙이고 겹차원 우주 혹은 딸림평행우주라 분류했다. 하지만 내가 어스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공허뿐이었다. 공허하고 공허하며, 또 공허할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결코 세상이나 우주를 볼 수 없었다.
“탐사 T+82분. 원래의 좌표로 돌아왔습니다, A, C, D 지점 점검 완료, B 지점은 장비를 새로 갖춰 내일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복귀합니― 어라? 거기 누구야? 주간 경비대 라일 콜린스다. 위대한 협약에 따라 검문에 응하라.”
형식적인 순찰 임무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와 다시 원래의 세계로 천천히 돌아가려는 찰나, 실험실의 벽 뒤에 숨은 인간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나는 이미 해체한지 오래인 주간경비대를 들먹였다. ‘주간 경비대 라일 콜린스다.’ 조금 낯뜨겁긴 해도 옛 추억때문에 아직 버리지 못한 나의 조그만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림자의 주인공은 나를 무시한 채 기둥 뒤로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밖으로 도망갈 곳이 없으니 분명 나의 접근을 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며 그를 제압할만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조금 빨랐다.
“이토록 비밀스러운 장소에 사악한 어둠의 존재까지! 내가 우려했던 그대로군! 빛의 힘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주간경비대’ 운운하는 나보다 더 낯뜨겁다는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터져나온 푸른 섬광이 검의 형상을 이루더니 내 손짓을 따라 그를 포박했어야할 밧줄을 보기 좋게 베어버렸다. 그는 그대로 마법으로 만든 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그의 빠른 움직임을 피할 수 없었던 나는 다급히 어스름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박사님, 미등록 개체입니다!”
나를 공격했던 자는 자신의 공격이 어떻게 빗나갔는지를 빠르게 파악하고는 곧바로 패트릭 박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박사 여시 사태를 대강 파악하고서 허둥지둥 비상벨을 눌렀다.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지나치게 깊은 어스름에서 한 번에 본래의 세상으로 되돌아온 반작용으로 심한 두통과 어지러움에 시달리는 나와 달리, 푸른 섬광으로 만들어진 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그는 전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야, 야! 너 지금 경비대한테 칼질하는 거야? 옛날 같았으면 재판에 갈 것도 없이 바로 즉결처형이야, 이 새끼야! 괜히 일 키우지 말고 그냥 순순히 같이 가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는 마치 위대한 협약이나 경비대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며 끊임없이 나를 공격했다. 다행히 그도 어스름에서 빠져나온 부작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던지 처음처럼 날카로운 공격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다. 재단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역시 나처럼 무리한 차원이동 때문에 일시적으로 뇌가 환경을 인지하는 능력에 무리가 생겨 모든 면에서 감각이 다소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어느새 현장을 수습하러 투입된 무장 경비원이 달려와 돌격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가격하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나만 신경 쓸 만큼 둔해져 있었고, 결국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하며 풀썩 쓰러졌다. 처음의 빛나는 검은 보이지 않고, 투박하게 깎은 나무 막대만이 그의 손에 남아있었다.
“아니, 2급 현실조정자랍시고 항상 감시당하고 계신 분이, 겨우 막대기 들고 설치는 깡패 하나를 제압 못 해서 고생이십니까?”
경비원은 허세와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실험실 탁자에 얽혀 함께 넘어진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전히 어스름에서 급하게 빠져나온 부작용이 남았던 나는 일어나면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잠시 휘청거렸다.
“나는 사학자야. 싸움 같은 거 못 해.”
“그리고 기동특무부대 하나를 통째로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시잖습니까.”
“맞아, 같은 논리면 미국의 국방부 장관은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무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생체병기겠지.”
“허. 거 말 되네. 그나저나 이 자식, 여긴 어떻게 침투했을까요?”
경비원이 의식을 잃은 불청객에게 내가 건넨 수갑을 채우며 말을 꺼냈다. 수갑에는 나의 강력한 저주가 서려 결코 그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들 터였다. 그 것만으로는 불안했는지, 경비원은 품에서 주사기를 꺼내 이틀정도 다른 존재가 힘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드는 중화제를 투여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들어오면서 들키지도 않은 걸 보면 계속 어스름을 통해 여기까지 온 건 분명해. 어스름에서는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하단 것을 생각하면, 치밀하게 짜인 효율적인 동선과 그에 따른 계획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난 GOC에서 보낸 공작원이라 생각했지. 마침 오늘이 깊은 어스름까지 들어가는 날이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 녀석은 들키지도 않았을 걸.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흥분해서는 이렇게 쉽게 존재를 들키고 제압당한걸 보면 또 훈련받은 공작원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행동하는 건 GOC 공작원은 개뿔, 재단은 커녕 위대한 협약이나, 다른 존재조차 모르는 것 같았어.”
나는 문득 몇 년 전 러시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능력을 각성했으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 의도치 않게 은둔하던다른 존재가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어 위대한 협약도 알지 못한 채 망상적인 사명감에 사로잡혀 무고한 어둠의 존재들을 해치고 다녔던 것이다.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빛의 전사였기에 신출귀몰하는 그를 잡지 못해 러시아의 주간 경비대가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야간 경비대 소속의 빛의 마법사 하나가 그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설득에 성공해버려서, 주간 경비대의 자존심을 확 구겼다나. 이 불청객 역시 어쩌다보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빛을 선, 어둠을 악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혼자만의 전쟁을 벌여오던 다른 존재일지도 몰랐다.
“아― 몰라― 머리아파― 나중에 저 자식 깨어나면 물어볼 게 한두가지가 아니군 그래. 여기 정리하고 바로 갈 테니 잘 가둬놔. 젠장, 방호복도 찢어졌어. 오늘 오후에 있을 추가 탐사는 글러먹었네요, 박사님.”
패트릭 박사는 투덜거리며 내가 벗어 건넨 방호복을 쓰레기통에 우겨넣었다.
…(전략)… 예를 들어, 간단한 도래 작용에서, 예컨대 당신들의 분대를 여기로 이동시킨 것들은 30명의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거나… 1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시행하는 1시간짜리 난교가 필요합니다. …(후략)…
- ████████████ 교수의 기적적 작용에 관한 강의 녹취록 중.
“아, 콜린스 대위님. 마침 잘 오셨어요. 저 친구도 이제 막 깨어나서 들어가 보려던 참이었거든요. 저 녀석한테서 낯선 기운이 느껴져서 대위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참입니다.”
실험실에서 벌어진 소동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사무실로 찾아가자 빛의 마법사 케이트 이안이 나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소지품에 신분증이 있었는지, 윌리엄 데인즈라는 이름이 조사 대상으로 적혀있었다. 나는 면담을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케이트와 함께 취조실로 향했다. 최종 보고서가 통과되려면 내 결재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어차피 면담 기록을 검토해야 했기에, 그냥 현장에서 직접 면담을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윌리엄이 하나 남았던 방호복을 찢어주시고 실험실을 엉망으로 만들어준 덕에 오후에 있을 예정이었던 추가 탐사 계획도 취소되어 시간은 많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인즈씨의 면담을 맡은 케이트 이안입니다. 적대행위의 가능성이 높은 인간형 변칙개체 면담의 표준 안전수칙 제4조 2항에 따라 3급 현실조정자인 제가 면담을 맡게 되었으며, 5항에 따라 데인즈씨께는 ‘다른 존재’로서의 능력을 억제하는 중화제를 투여했습니다. 인간형 변칙개체 면담의 표준 윤리수칙 제2조 1항에 따라 고지해드립니다. 변칙적인 능력을 활용한 실질적인 위협이 있다고 판단될 시, 저 역시 비슷한 능력을 활용하여 데인즈씨를 제압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사망을 포함한…”
케이트가 살갑지만 기계적인 어투로 면담에 대해 설명했다. 정말 쓸데없는 절차였지만, 윤리위원회의 시정 명령을 무시했다가 되돌아올 불이익-특히 예산 감축은 상상도 하기 싫었기에 나는 케이트의 설명을 끊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았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 문제가 없다면 아무 탈 없이 집에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약 20분 전 자백제를 투여했으니, 괜히 침묵하시거나 머리 쓰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윌리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각성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2개월 전.”
자신의 힘에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것이니만큼 취향이 독특한 숙련자가 아니라면 결코 윌리엄처럼 능숙하게 다룰 기술이 아니었다. 2개월이면 스승 없이도 자신의 힘에 이해가 생길 수는 있지만, 혼자 수련하는 것으로 그렇게까지 강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시간이니 윌리엄은 그야말로 자신의 힘을 다루는 것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천재가 틀림없었다. 나는 비로소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 이외에 다른 베타형 SCP-Σ716-2… 아니, ‘빛의 존재’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다. 너에게서도 빛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날 속일 생각 마라.”
“아, 그건 중화제 때문에 데인즈씨의 감각이 무뎌져서 못 느끼시는 것일 겁니다. 저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빛의 존재입니다. 다음 질문 하죠. 어둠의 존재를 만난 적은 있습니까?”
“모두 17명. 저 거울 뒤에서 우리를 몰래 지켜보는 저 사악한 마녀를 빼면 모두 처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자네가 정말 빛의 존재라면 어째서 어둠의 존재와 협력하고 있는 것이지?”
윌리엄이 고개를 돌리더니 코팅된 유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나의 눈을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하게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중화제로 힘을 잃은 상태임에도 꽤 영향력 있는 저주로 변할 만큼 강한 살기가 그의 말에 담겨있었다. 케이트도 이를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초연함을 되찾고 질문을 계속했다.
“위대한 협약과 대접촉에 대해 모르시는군요. 심문이 끝난 후 기초적인 교육을 통해 빛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가 어떤 일을 함께 헤쳐 나왔는지 배우실 겁니다. 질문을 계속하죠. 평범한 인간이 당신의 힘을 알고 접근한 적이 있습니까?”
“… 있다.”
“누구였죠?”
“자네가 설령 빛의 존재가 맞다 해도, 자네처럼 타락한 자에게 알려줄 수는 없다. 위대한 협약이니 대접촉이니 하는 헛소리로 나를 현혹할 생각은 마라.”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힘이 빛과 어둠으로 나뉘는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하여 의식적으로 무시하지만, 그래도 빛과 어둠 이외에는 딱히 표현할 수가 없기에 생긴 문제가 있었다.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빛은 정의요 어둠은 악’이라는 식의 내용의 창작물이 범람하는 세상이니만큼 오랜 세월 쌓여 온 사회적 인식과 고정관념은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지는 우리 다른 존재들에게 있어 꽤나 골치 아픈 갈등 요소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재단에 합류하여 기동특무부대 Σ-716 “은퇴한 경비대”가 창설된 이후, 주간 경비대 출신의 대원들은 일반인 대원들에게 있어 한동안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둠의 존재’라느니 ‘흡혈귀’, ‘저주’같은 꼬리표가 붙은 자들을 격리해야 할 개체가 아닌 동료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재단의 인원들이라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인간의 정신과 의지는 약물의 힘을 이겨내기엔 너무도 연약했고, 케이트의 오랜 심문 경험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케이트의 끈질긴 질문과 자백제는 간단히 효과를 발휘하여 윌리엄의 그 알량한 ‘정의감’에서 비롯된 저항은 2분도 채 가지 못했다.
“어둠의 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빛의 존재를 본 것은 내가 처음이라며 아주 기뻐하더군. 그는 신비로운 힘을 인류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학문에 정진하는 ‘기적학자’라 소개했네.”
‘기적학자’라는 말에 케이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기적학자. 말 그대로 기적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기적학이란 마법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마법을 기적학이라 부르는 자들이라면 다름 아닌 세계오컬트연합, 일명 GOC일 터, 다른 존재의 사회를 분열시키고 합류를 거부한 나의 동지들을 학살한 자들이다. 처음에는 여러모로 어설픈 부분이 많은 데인즈가 GOC의 공작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자신들의 세력으로 포섭하고 훈련시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존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포섭하지 않고 속임수로서 누군가를 공작원으로 활용하는 그들에게, 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다른 존재를 백지와도 같은 상태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것을 단단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면담이 끝난 후 윌리엄을 수용실로 보낸 케이트는 곧바로 면담실에 남아 기다리던 나를 찾아왔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니요, 이제는 지원 요청이 아닌 보고를 해야 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에너지의 정체를 처음에는 도통 모르겠던데, 저 녀석의 입에서 기적학자라는 말이 나오니까 확실히 감이 오더군요. 그런데 그게, 하… 이거 참…”
케이트는 지난 몇 년간은 보여준 적이 없었던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교육생 시절에는 꽤나 자주 보여주던, 바보 취급을 받을까 불안하여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 있을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바쁘다. 뜸 들이지 말고 후딱 말해.”
“GOC 소속의 기적학자 녀석들과 같은 종류의 힘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왜,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타입 블루’라 부르는 인간형 변칙개체.”
“다른 존재는 어스름을 거친 생명 에너지가 아니면 쓸 수 없어. 기적학자들은 어스름을 거친 생명 에너지를 쓸 수 없고.”
“저도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윌리엄의 몸에서는 분명 GOC의 기적학자 녀석들과 같은 파장의 생명에너지가 방출…”
바로 그때, 케이트의 말을 끊으며 큰 폭발음과 시끄러운 경보와 방송이 섞여 온 시설을 가득 채웠다.
[…1급 현실조정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응팀은 즉시 3-a2 구역으로…]
“3-a2 구역이면, 설마 방금 그 자식이?”
“그럴 리가요. 대위님의 마법으로 윌리엄의 힘은 완전히 봉인됐고, 중화제까지 잔뜩 맞았는데.”
현실의 시공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깊은 어스름으로 들어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물질의 의미는 희석되기 때문에 많은 다른 존재들이 다급한 상황에서는 약간의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어스름을 통해 움직이고는 했다. 나와 케이트 역시 어스름으로 진입했고, 곧 “은퇴한 경비대” 소속의 다른 대원들의 모습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3-a2 구역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현장에 진입했고, 이내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르는 이 무고한 자들을 해치기는 싫었으나, 어쩔 수 없었네.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도록 하지. 그리고 거기, 케이트라 했나? 자네가 정말 빛의 존재라면 반드시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믿네.”
윌리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주변으로는 신체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잘려 나갔음에도 숨이 끊기지 않은 채 고통받는 일반인 경비원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이 불행한 자들이 죽어가며 사방으로 흩어져가는 생명에너지는 윌리엄이 준비하는 마법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이나 대가가 필요한 마법은 기적학자들의 것이었다. 이는 윌리엄이 다른 존재이자 동시에 ‘인간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적학자와 같은 마법을 부리는 다른 존재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십여 개의 새로운 빛덩어리가 생겨났고, 나는 비슷한 일을 대접촉의 시대에 이미 격은 적이 있었다. 빛이 걷히고, 그 자리에는 총을 들고 군복을 입은 채 현대식으로 무장한 인간 마법사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전략)… 확보에 실패한 상당수의 ‘다른 존재’ 개체는 GOC에 합류하거나 사살당했으며, 이외에 추적이 불가능한 일부 개체는 사망했거나 뱀의 손, 혼돈의 반란 등과 같이 재단의 정보력이 닿지 않는 세력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략)…
-SCP-Σ716 ‘어스름’의 설명 중.
“이게 누구야. 라일 콜린스 아니신가? 갚아야 할 빚이 있었는데 잘 됐군.”
공간이동을 해 온 마법사의 무리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접촉의 시기, 전투 도중 나의 저주로 오른쪽 팔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된 GOC의 기적학자 루카스 프라울리였다. 이것으로 윌리엄이 GOC에게 놀아난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 명확해졌다.
“여, 루카스, 오랜만! 네 오른팔,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러워 보이는데 이참에 그냥 아예 잘라줄까?”
나는 빈정대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 기둥을 엄폐물로 삼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탐지 능력이 뛰어난 케이트가 기적학자 11명과 6명의 다른 존재 변절자, 일반인 전투원 22명이 공간이동 해왔음을 텔레파시로 알려왔다.
“사람 안 죽이고도 큰 규모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더니, 고작 40명도 안 되는 인원을 이곳에 데려오겠다고 저 양반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 한 번 보지그래? 여기 케이트의 마법이면 그냥 커피가 좀 많이 필요한 하루를 보내는 정도의 체력 소모로도 충분한데 말이지.”
“어차피 우리 손에 죽었을 녀석들인데, 이왕이면 이렇게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서로가 어떤 변칙적인 방어 수단을 가졌는지 알 수 없어 섣불리 발포하지 않고 총구만 겨눈 채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루카스와 나만이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학생처럼 재잘거렸다.
“그, 너네가 대규모 마법 부릴 때 쓰는 거 있잖아, 에버 뭐시기 하는 거. 그건 고물상에 팔아 엿 바꿔 먹었냐? 하긴, 마법사란 양반들이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다니 그건 그거대로 쪽팔리는군.”
“마법이 아니라 ‘기적학’이야, 콜린스. 언제까지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말을 쓸 텐가? 그리고 에버하트 공명기로 구현하는 기적은 자네들의 알량한 현실조정능력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력하다는 것은 이미 자네들의 지도자들을 꺾은 것으로 충분히 겪지 않았는가?”
“아아, 네, 네. 그럼 그 잘나신 ‘기적’으로 이것도 한 번 막아 보시지.”
나는 루카스를 향한 적대심에 구체적인 의지를 담아 방아쇠를 당겼다. 물론 이런 초보적인 공격이 통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나의 저주가 서린 총알이 기묘한 검은 궤적을 그리며 정확히 그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총성을 시작으로, 복도는 탄피 속의 화약이 터지며 살의가 가득 담긴 납덩어리를 밀어내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양 측 모두 나름의 능력으로 서로의 화기를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가며 좀처럼 사상자가 생기지 않는 지루한 총격전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 변절자 새끼들!”
총격전이나 마법전보다는 육탄전에 더 소질이 있는 몇몇 다른 존재들이 답답한 마음에 총을 내던지고 어스름에 진입하여 경비대 시절의 무기를 꺼내 들고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낯익은 인물도 있었다.
“이야, 선배, 오랜만이야. 추적이 안 되길래 대접촉 때 죽은 줄 알았더니, GOC에 붙어먹은 거였어? 동지를 배신한 소감이 어때?”
나는 어스름을 통해 근접해온 GOC측 대원의 공격을 받아치며 인사를 건넸다. 곰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졌고,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주술에 능한 옛 주간 경비대의 선배였다.
“UN의 공식적인 합류 요청을 무시했다가 무고한 동지들을 죽게 만든 황혼 의회야말로 배신자야.”
피하는 것이 고작인 나와 달리, 필요에 따라 곰과 인간의 형상을 번갈아 취하며 공격을 몰아치는 선배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이런 직접적인 방식의 전투는 확실히 내 체질이 아니었다. 게다가, 죽을 땐 죽더라도 할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성질머리 덕에 나불거리느라 호흡이 가빠져 상황은 더욱 힘들었다.
“적어도 재단은, 우릴 ‘박멸’한답시고 설치지는 않아. 우리를 ‘보호’하겠다 나섰지.”
“그래. 인간들은 멸종위기의 동물도 보호하지. 실험실과 동물원에 가둬두고 말이야. 같잖은 일련번호로 불리며 실험쥐처럼 사는 인생, 별 의미도 없을 텐데 지금 끝내주마.”
“닥치세요, 이 영감아.”
결국은 윌리엄과 조우했을 때처럼 피할 곳이 없는 구석까지 몰린 나에게 선배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찰나, 케이트가 거대한 불덩어리를 던져 전투에 끼어들며 나를 구해냈다. 폭발의 충격으로 멀찍이 밀려난 거대한 곰이 다시 사람으로 변해 케이트를 노려보며 케이트의 것보다는 다소 작은 불덩어리를 허공에 띄워 응수했다. 물론 이런 공격 마법을 전문으로 다루는 케이트의 것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원거리에서 공격해오는 마법사에게 가까이 접근할 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쳇. 너희 야간 경비대 연놈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산 속에서 한 100년쯤 곰으로 살다 오셨습니까? 없어진 지가 언젠데 웬 경비대 타령?”
케이트는 여유롭게 공격을 받아치며 짧은 공간이동으로 거리를 넓힌 후 새로운 불덩어리를 날렸다. 나의 옛 선배는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것 같았다. 케이트도 꽤나 전투 경험이 많았기에 나는 케이트를 믿고 곧바로 다시 어스름으로 진입하여 지휘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루카스에게 접근했다.
“어딜!”
나는 곧바로 루카스의 뒤로 다가가 어스름에서 그의 목에 단검을 꽂으려 했으나 강한 반발력에 손에서 단검을 놓치고 말았다. 제법 강한 저주가 서린 물건이었기에 녀석이 두르고 있을 방어 마법쯤은 간단히 뚫을 것이라 기대한 나는 꽤나 실망했다. 무기를 잃은 나는 또다시 어스름으로 숨어들어 그에게서 멀어졌다. 멀리서 다른 존재 한 명이 내가 루카스에게 접근한 것을 눈치채고 총구를 겨누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의지가 자각하지 못한 채 저주로 변하는 것은 조절할 수 없는 생리현상에 가까운 것이다. 저주에 재능이 있는 내가 나를 노리는 살기를 놓친다면, 기적자 녀석들이 마법을 부리는 데에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이, 같은 어둠의 존재끼리 총 쏘기 있어?”
나는 자연적인 저주로 변한 살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다급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구체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단순한 저주들을 되는대로 쏟아부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 맞춰 걸린 저주에 녀석은 자신이 뒤집어쓴 인위적이고 지독한 악운을 날려버릴 틈을 가질 수 없었다. ‘때마침’ 녀석의 발밑에서 공간이동을 위해 희생된 경비원이 숨을 거두기 직전 경련을 일으켰고, ‘우연히’ 녀석의 발목을 쳐서 순간적으로 자세가 약간 흐트러졌다. 총이 흔들리면서 그가 쏜 세 발의 총알은 궤적이 약간 바뀌었고, 그중 두 발은 그대로 벽에 박혔지만 ‘우연히’ 한 발은 GOC측 일반인 전투원의 심장을 관통했다. 녀석은 곧바로 나의 저주를 해제한 후 다시 총구를 나에게 겨누었으나 이미 나의 옛 선배를 바싹 구워버린 케이트가 나에게 합류하여 그의 총이 만들어낸 불꽃에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총알을 밀어내야 했을 방아쇠가 만든 작은 폭발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대신 그대로 큰 폭발로 변해 총을 터뜨렸고, 녀석은 그대로 한 손을 잃었다.
루카스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나에게 마법이 깃든 총알을 선물하려 했지만 상황은 거의 정리되고 있었다. 누가 사용한 것인지 모를 염력으로 루카스의 총은 그대로 분해되어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다른 공격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완전히 제압당해 바닥에 바짝 엎드린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기습적이었다 한들, 마법이 생리현상인 다른 존재들의 숙련도에 비해 ‘인간 마법사’가 가지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서툴 수 밖에 없었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숙련도의 차이로 벌어진 격차는 우리에게 적절한 대응 태세를 갖출 충분한 시간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윌리엄을 포함한 두 명의 다른 존재와 두 명의 ‘기적학자’, 6명의 일반인 전투원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시작은 거창했으나, 상황은 허무할 만큼 쉽고 간단히 정리되었다. 윌리엄은 자신의 편에도 다른 존재가, 그것도 ‘어둠의 존재’도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위님, 이거 GOC에서 작정하고 벌인 공격치고는 너무 허술하지 않습니까?”
“고작 이런 규모로 감행한 조잡한 공격이 실패할 거란 사실을 GOC 측에서도 모를 리가 없지. 더군다나, GOC와 재단은 마냥 적대적이기만 한 관계는 아니야. 공식적인 UN의 산하 기관이니만큼 명목상으로나마 재단과는 엄연한 협력 관계라고.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를 이런 대범한 짓을 무턱대고 벌일 리가 없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이 작전에도 분명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있을걸?”
“은퇴한 경비대”의 대원 하나가 마지막 발악으로 숨겨둔 권총을 꺼내 자신을 쏘려는 포로에게 반격하여 일반인 전투원의 생존자 수를 5명으로 줄이며 물었다. 나 역시도 다급한 상황이 지나가고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비슷한 의문이 들었기에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게 루카스 이 개자식이 나에게 가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독자적으로 통제에서 벗어나 벌인 일탈이라는 뻔뻔한 핑계는 아니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