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시아?"



머리를 울리는 두통과 이명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 꿈인지 생신지 비몽사몽한 와중에 부스스 눈을 뜬 시아는 낯선 풍경에 당황한다. 회색 천장과 둥근 전등, 몸 위로 덮여진 실크 이불. 그래, 여기는 개인 회복실이었다.

"어쩌다 내가.."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조금씩 기억을 되짚으려 노력한다.

매캐한 가스, 흐려지는 시야

물밀 듯 들어오는 그 날 밤의 기억에 속이 울렁거린다.

"시아, 거기 있어?"

다시금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한 시아. 그래, 로저의 목소리였다.

"로저? 당신이에요? 로저!"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뛰쳐 일어나느라 침대 위에 차려진 아침 식사가 죄다 엎어진다. 시아는 병실 한가운데 엎어져 얼빠진 표정으로 멍 때릴 수 밖에 없다.

"…여기야 시아"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따뜻한 옥수수 스프가 한껏 끼얹어진 태블릿이 엎어져 있다. 재빨리 건져내는 시아.

"어우 젠장"

무거운 몸으로 무리를 했는지 어질어질하다. 침대 시트에 올라타 털썩 걸쳐 앉는다. 화상 회의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운 로저의 모습. 시아는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질 못한다.

"O5-11, 이게… 어떻게 된거에요? 당신은 분명… 앗,"

길고 긴 밀폐와 질식의 밤, 폐가 터질 듯 들어오는 악취의 끈적임

이제야 그날 밤의 기억이 돌아온다. O5-11이 죽었던 휴양지, 에스파뇰라의 작은 펜션에 주차된 검은 승용차. 숙소 구석에서 찾은 먼지 쌓인 연탄에 불을 붙이는 시아.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는다. 제███기지 이사관이었던 시아 유(Sia Yu)는 O5-11의 부사수 직무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마흔이라는 상대적 어린 나이에도 천재적인 경영, 지휘 능력으로 촉망 받던 몇 안되는 지휘관이었다. 시아는 O5-11, 로저 셸던(Roger Sheldon)를 존경하며 따라다녔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새롭게 배우는 모든 것에 시간을 매진하며 이를 영광이라 여겨왔다. 그녀의 열정은 고아원에서 재단으로 들어온 그 첫 날처럼 식은 적이 없었고 사람을 구하는 일이 이렇게 행복하단걸 느끼며 하루 하루를 살아왔다. 하지만 O5-11이 죽고 십여년이 지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평의회의 만장일치로 O5-11이 된 시아는 연달은 지휘 실수로 사람들을 죽음에 내몬다. 감독관 시절, 아끼던 특무부대원을 잃은 것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연구원들이 죽고, 중대급 부대가 전멸하고, 도시급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다. 단 한번도 이런 실수를 겪어본 적 없는 시아는 매일 밤을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시아는 O5-1의 기억 소거 처방 권장을 거절하고 그 죄책감을 혼자 짊어지려 했다. 젊은 시절, 수색 작전 중 폭발 사고로 왼다리를 잃었을 때도 열기를 잃지 않았던 그녀가 입술이 바짝 마른 채 사무용 칼을 집어든건 역시, 차원이 다른 거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로저를 잃어 의지할 곳 없이 고립되었던 탓도 있었을게다. 칼을 집어들기 무섭게 손등을 긋는다. 네 차례쯤 베고나니 보좌관이 그녀를 뜯어말리며 칼을 뺏아 던진다. 살 틈 사이로 피가 올라온다. 뜨거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얼굴이 시뻘개진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단단히 붙잡힌 여린 손목이 저려온다. 보좌관은 시아의 간곡한 부탁에 지휘 보고를 올릴 수 없었지만 그 판단은 곧 시아에게 마지막 결심을 하게 만들 시간을 벌어주는 꼴이 되었다.

"미안해요. 저는 그저 너무…"

"굳이 말할 필요 없어. 괜찮아. 참 오랜만이야, 그렇지?"

"예 로저씨, 하지만 당신은.."

"죽었었지"

"맞아요. 그런데.."

"살아났지"

"…"

"두 달 전.. 수 많은 연구원들과 변칙 전문가들이 나를 되살려냈어. 십 수년이 걸렸다고 하더군. 나는 그간 죽음의 진실을 경험했고… 나는 그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 네 소식을 들었다. 운 좋게 네 태블릿을 해킹해서 연락할 수 있었고, 시아. 너는 그 진실을 감당 조차 못할거야. 하지만 나는 결국 방법을 찾아냈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 믿고 있지. 지금 평의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시간도 부족하고, 너는…"

병실 문이 벌컥하며 열린다. 황급히 태블릿을 덮는 시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건 흰 가운에 가죽 구두를 신은 O5-1이었다. 그의 오른손엔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O5-1, 무슨 일로…"

"O5-14, 아침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O5-1은 바닥에 엎질러진 수프와 굴러다니는 방울 토마토, 빵 조각을 보고 인상을 쓴다. 케이크 상자를 방 중앙의 둥근 탁자에 두며 말을 잇는다.

"별로 입맛에 안 맞았나 보군.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죄송합니다. 그보다도, O5-14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싶습니다."

O5-1의 주름이 깊어진다.

"이틀 전 윤리위원회 주관 징계 회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자살죄에 대한 심의 말입니다.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이메일을 확인해보십시오."

시아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한다.

"O5-11의 자리는 다른 적임자가 맡게 되었습니다. 완쾌하는 대로 징계가 시작될 것이고 O5-14라는 새로운 직책으로 업무에 복귀할 것입니다. 국소적 A급 기억소거제가 처방될 것이고, 당신의 자살에 동기 유발이 될 모든 기억이 잊혀질 겁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자연스럽게 업무에 복귀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재단의 기억소거제 권장에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윤리위원회의 감시, 추적 소대에 의해 불시에 조치될 테고 그러기 전에 제가 직접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더는 평의회가 위원회에 휘둘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O5-14, 아마 하루 내지 이틀이면 소거 절차가 시작될테니…"

O5-1이 다음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만지며 뜸을 들인다. -14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O5-1은 그런 그녀를 못 쳐다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걸어간다.

"정말 유감입니다. 때가 되면 의료진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문 앞에 멈춰선 O5-1은 문고리를 잡으며 말한다.

"치즈 케이크는 꼭 먹어보십시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지 않습니까?"

그러곤 나가버리는 O5-1, 시아는 말을 잇지 못한다. 숨 죽이며 듣고 있던 로저가 시아를 부른다.

"시아, 상황이 커질대로 커졌어. 내가 나서서 해결할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 여유가 될 때 찾아갈게."

그러곤 교신을 끊어버리는 로저.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병실. 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 휠체어에 올라타지만, 조금 뒤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왠 뜬금 없이 치즈 케이크를… 잠깐,"

시아는 휠체어를 굴려 탁자 앞으로 간다. 포크로 케이크를 마구 뒤적거리자 빵 사이에 어설프게 끼어있는 작은 주사기가 건져 나온다. 투명한 액체가 차있는 플라스틱 통엔 기억제, W등급이라 써져 있다.

"세상에, 이거면."

재빨리 꺼내들어 뒷목에 주사하는 시아. 약물을 모두 주입하곤 주사기는 변기에 내려버린다.

"고마워요 -1, 덕분에. 덕분에 노예 생활은 면했어. 어떻게든 탈출구는 있을거야. 그리고 로저씨와… 로저..씨… 잠깐, 로저?"

갑자기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 뒷목부터 뼛속까지 한기가 느껴지며 천천히 하얘지는 기억.

"뭐야 이게, 뭐가 어떻게…"

눈 앞에 과거의 사건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붙잡아보려는 만큼 사라지는 기억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