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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중후한 빛이 막 방에 들어온 젊은 남성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을 찡그리며 빛을 헤쳐나가자 그다음으로 목도한 것은 어두운 나무색의 책상과 크림색 노트북 그리고 한 여성이었다.

“아, 일찍 오셨네요.”

기품있는 방 안에서 혼자 중앙에 앉아있는 중년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목까지 오는 단발에서 풍겨오는 말끔한 인상과 다르게, 악수로 보여주는 강한 힘과 유연함이 사무직만 전전 하던 손이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덕분에 항상 도움받고 있습니다.”

짧은 머리의 젊은 남성은 다부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비록 의미 없는 인사가 방안을 가득 채웠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고 중앙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이번 만남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라는 사람과 이제부터 의미를 채워 넣으면 된다는 사람의 대담이였다.

“저희 같은 변변찮은 극단에 신경 쓰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아닙니다.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활동하시는데 변변찮단요. 그것보다 이번에는 저번에 인도해주신 타입…음… 현실조정자 말씀입니다만.”

여성은 남성을 쳐다보았다. 의미 없는 이 대화를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바꿔보려는 남성의 시도임을 알았다. 하지만 이 대화는 의미 없는 대화가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문제라면 사안이 사안인 만큼 중대하게 처리 해주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세계 오컬트 연합만큼 믿음 가는 분들은 없으니깐요”

남성 또한 표면만 듣고 판단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본인의 발품을 무급으로 만드는걸 보고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러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극단 측에서 저희를 항상 도와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남성은 활강하는 어린 매처럼 내려와 지상의 먹잇감에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었다.

“저희도 항상 GOC와 원만한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전’ 단원을 인도한 것이 GOC측의 이익이 되었다니 상당히 기쁩니다.

여성은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 했지만, 남성은 자신이 포착한 먹잇감이 함부로 도망가는 것을 허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에 극단 측에서 수사에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정기 면담은 그것에 관한 일정이나 기타 사항을 조율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성 또한 어떤 비유와 이입도 허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대화에 그것은 사치였다.

“예, 알겠습니다. 단장님께 전달 드리겠습니다. 극단원들을 전부 소집하는데…”

“수사권만 보장해주시면 됩니다.”

이 젊고 미숙한 남성의 불쾌한 언사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인지라, 모든 대화에 의미는 있어야만 한다는 몸짓이였다.

“단원들을 소집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계신 건 압니다. 그러니 유랑극단은 GOC의 수사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명시적인 표현만 해주시면 그 뒤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굳이 번거롭게 단장님께 결제받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단장님과 의논 후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단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의무가 있어서 함부로 결정하기 힘든 점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에 남성은 한숨과 함께 다음에 꺼낼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여성은 이 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저희도 GOC와의 원만한 관계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 단원들 중에 중동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지, 니 드웨쥬가 ORIA와의 마찰로 인해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방책을 GOC측이 지원해주신다면 저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디 이런 변변 찮은 극단을 상대하는 사람이, 그리고 부서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똑같이 변변찮은 법이다.

“우선 ORIA의 제압에 저희 GOC는 총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따로 극단을 위한 지원은 우선 알아봐야 하겠습니다만…”

“저희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원숙한 여성의 불쾌한 언사 역시 의도적인 것인지라.

“GOC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범법 현실조정자의 인도를 비롯한 각종 수사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수를 지키기 위해 아픈 손가락을 잘라내는 심정을 감추는 것 또한 그 의도이다.

“이는 민간인을 각종 위협에서 지키기 위한 GOC의 활동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ORIA와 같은 불법 무장 단체에 맞서는 것 역시 GOC가 추구하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인것도 저희는 알고있습니다.”

어차피 명분은 이쪽에 있으니 급할 것도 초조할 것도 없었다.

“부단장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번 조사로 얻은 정보의 가치를 꽤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떨어지는 법입니다. 저희는 조금의 시간 지체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남성을 조금만 답답하게 한다면

“저희는 진정한 예술의 기치는”

남성이 젊음과 어리숙함의 혈기에 못 이겨

“자유로운 활동에서 나온다고 보고있기에 해당 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

제풀에 쓰러질 것이고

”본 요청 역시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화의 의미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사무실을 나서자 나오는 것은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었다. 남성의 뒤에는 방금 나왔던 사무실, 아니 밴이 있었다. 밖보다 안이 더 넓은 건 둘째 치고 이제 저 밴은 뒤돌아보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슉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도망치는 것 하나 만큼은 일품인 것이다.
 


 
남성과의 사투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여성은 몸을 의자에 묻고 한숨을 푹 쉬었다. 고고하고 우아해 보일 것 같았던 모습과는 상반된 자세로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째 피곤해 보이는구만”

이번엔 익숙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뜨려고 밴을 아무 곳으로나 이동시켰더니 익숙한 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단원 전체에 대한 무제한적인 조사를 요구해왔어요. 대답은 유보해뒀지만, 다음 정기 면담 때 또 같은 요구를 하겠죠.”

남성은 익숙한 듯이 한쪽 벽면 책장 서랍에서 찻잎과 다도 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컬트 연합? 그 친구들은 한동안 잠잠할 줄 알았는데.”

“마음 같아선…”

여성은 말은 삼켰다. 꺼내면 둘 다 힘들 것을 알기에. 그러나 이상 속을 떠도는 사람에게 현실을 자각시켜주는 것도 본인의 의무이니.

“…2대 단장을 무덤 속에서 꺼내오고 싶어요. 본인이 저지른 일 좀 보라고.”

“난 자네가 전 단장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차를 우려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 남성은 아직도 꿈속을 유랑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좋아하죠. 그 사람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는걸요. 문제라면… 참… 상류 사회에 있으면서 전… 담대한 줄 알았어요. 여러 가지 볼 꼴, 못볼 꼴 다 보고 다녔으니깐요.”

“확실히 자네를 처음 봤을 땐 지금보다 꼿꼿하고 날카로운 척하고 있었지.”

여성은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말이죠.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렇기에 연주자로서, 슬럼프가 찾아온 연주자로서 극단과 만남을, 그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히 하고 있어요.”

여성은 의자를 그대로 뒤로 젖혀 천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 머리 위의 생각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때 제가 본 극단은 지금 같지 않았어요. 그때는 더 작고, 더 아담했죠.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했어요. 가끔 실수도 했지만 웃어넘길 만한 그런 것들이었다고요! 그런데 지금은요? 우린 뭘 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 음악을 하기 위해 모인 거 아니었어요? ‘GOC’니 ‘뱀의 손’이니 ‘ORIA’니 도대체 뭐냐고요! 그나마 우리한테 신경 덜 쓰는 재단은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나요? ‘요주의 단체’ 라고요 ‘요주의’! 단지 모든 사람들이 음악을 즐겼으면 해서! 그렇게 시작된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다고요! 이게 우리의 목적인가요? 별의별 알지도 못한 집단들에게 쫓기고 시달리는 게?”

여성은 고고하고 우아했다. 고고하고 우아해야만 했다. 극단의 얼굴은 그래야만 했기에, 그러기에 보여주지 못한 답답함과 설움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2대 단장 그 사람은 이걸 알고 있었을까요? 아뇨! 알고 있었으면 외교 담당에 절 앉히기만 하고 대충 미봉하지 않았겠죠. 전 외교관 출신도 아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어요. 단지 마법을 보고 디즈니 세상을 꿈꾸던 어린 음악가였어요. 하지만 입단하고 처음 만난 건 SCP 재단이었죠.”

여성은 다시 똑바로 앉았다. 남성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여성은 이제는 제대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우리 단원들을 억압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의 음악을 뺏어가려고 하고 있죠. 내부에서 터지는 실수는 저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더 끔찍하게 변하고 있어요. 수습을 도와주는 재단 측에선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일로 신경 안 쓰는 거 같지만, 그래서 더 무서워요. 지금 만으로도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얼마나 많길래 그런 반응인 걸까요? GOC에서 새파란 직원이 우리를 담당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그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는 얼마나 큰 거죠? 저희가 그것을 목도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여성은 본인의 말이 점점 두서 없어지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욱 더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저희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음악을 들려주는 유랑극단이에요. 세상을 위협하는 마법사나 하늘을 불태우는 괴물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돌아가고 싶어요… 작디 작은 그 떡갈나무로요…아무것도 모르던…내 주위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던 그때로요…”

남성은 몸을 돌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섰을 때는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나서였다.

“커피가 더 좋았으려나?”

“…그냥 주세요”

“…세상은 말일세.”

남성은 왼손의 머그컵을 건네고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빠르게 움직이는 법이라네. 우리가 가만히 있었다면 분명 도태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이야기도 없었겠지.”

여성의 격앙된 마음이 따뜻한 머그컵에 점점 풀어져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지.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독자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법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 속에 깊게 들어온 만큼 우리의 이야기도 깊어졌다고 말이야. 물론 그만큼 주인공인 우리들의 고생도 깊어졌지만…”

남성은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썩 만족스러운지 웃음이 배어 나오면서 이야기했다.

“… 확실한 건 더 많은 사람이 우리 덕분에 행복해지지 않았나?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 우리를 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넨 기억하고 있을테지. 그들을 두고 갈 수 없는 법이니깐.”

남성은 아직도 이상을 유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은 더 이상 현실로 끌어내리기를 포기하였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본인도 이상을 유랑하고 있기에.

“…일이 너무 커졌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니깐. 이 커다랗고 요동치는 세상 속일지라도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는 게 우리의 이야기 아니겠나? 물론 우리가 잔 실수가 많긴 하지만”

남성은 차 한잔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선 말했다.

“그것이 떡갈나무가 작은 우물에서 뛰쳐 나온 이유 아닐까 생각이 드는 구만”


방문이 닫히고 다시 여성 홀로 남겨졌다. 두 명의 남성이 지나갔지만, 그 어떤 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여성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남은 차를 들이키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거울을 보고 화장과 옷 매무새를 고쳤다. 그렇게 고고하고 우아한 여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