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유고(碧梧遺稿) — 소을촌기(瘙乙村記)

계축년(癸丑年) 팔월(八月) 열하룻 날.

날이 맑았다. 걸음을 거닐 때 멀리서 들려오는 밭의 바람 소리가 심신을 편안케 한다.

무령(戊嶺)의 서신을 받아 출발한 지 어느덧 이레가 지났다. 그는 나의 벗으로, 이름은 김술인(金術認)이고 호가 무령이다. 본관은 경주라 하였다. 임진년 이후로 서절구투(鼠竊拘偸)의 침탈을 입어 서로 생사 여부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흘 전, 기이한 용모를 한 자가 한 서신을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느덧 이십년이 지나 이제 계축년이 되어 받는 그의 서신 속 내용은 반가웠으나, 알기 힘들었다. 서신에서, 무령은 자신을 찾아오라 말하고 있었다. 두류산 심곡(深谷)에서 기거하고 있다며, 약도까지 그려진 서신의 필체는 분명 무령의 것이었다. 지리산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고을이라 하니, 문득 청학동(靑鶴洞)이 떠올랐다. 정녕 이 고을이 그곳이 옳다면, 무령은 필시 내게 이 세속의 풍상(風霜)을 떨치고 일어나 선계(仙界)로 오기를 주문하는 것이리라.

그런 연유로 나는 곧장 채비하여 전령과 함께 길을 나섰다. 오래 걸어야할 것이라 하여 짚신 두 켤레와 지필묵(紙筆墨), 옷가지 등을 챙겼다. 종 금이가 소금과 쪄서 말린 쌀을 싸주었다.

나는 사십여 년 전 무령과 한 사찰에서 만나 지기를 맺었다. 당시 젊은 유생이었던 나는 글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심기가 어지러워 연하일휘(煙霞日輝)의 미를 보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때는 마침 월침삼경(月沈三更)으로, 명월(明月)이 휘영청 떠올랐으니 이 몸이 절로 풍월주인(風月主人)이었다.

이때 저만치서 탑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가 하나 있었다. 탑 쪽으로 거닐며 보니 이는 곧 한 사내였는데,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르고 얼굴은 희었다. 기이하게도 머리 역시 희었는데, 흔히 노인들에게서 보이는 그러한 양태(樣態)는 아닌 듯싶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고아(高雅)하여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김술인이었다.

우리는 한 사판승에게 청주 한 병을 부탁했고, 곧 술잔을 비우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령은 과묵했으나 지나치지 않았고, 곧 역사와 경전에 해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가 아무리 문(問)하여도 무령은 답(答)하였고, 이에 막힘은 없었다. 이에 탄복하여 내가 그에게 나이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살아온 해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외다. 비록 공자께서는 오륜(五倫)을 말씀하시었으되, 진실로 마음과 마음이 만나매 길고 짧은 것이 뭇이 중하겠소.

이것이 옳다 여겨 서로 존대도 하대도 않는 동년배 친우로 남기로 하였다.

이제 그를 다시 보려고 하니 반가움과 염려가 앞선다. 오랜 기억 속 그날처럼 그는 기이하게 거기 서 있을 듯하여 반갑고, 혹여 전란의 여파로 전과 다른 모습일까 하여 염려스럽다. 그 고을, 청학동을 닮은 그 고을에는 어떤 무령이 있는 걸까.


계축년(癸丑年) 팔월(八月) 열세 날.

갑자기 비가 세차게 몰아쳐 주막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체하기는 싫었으되, 전령의 만류로 그저 근처 주막으로 들어가 젖은 몸을 말렸다. 주모는 허름해보이는 중년의 여자로, 방이 있냐고 묻자 무뚝뚝하게 두 사람이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을 정도의 방으로 데려갔다. 아무래도 보는 품이, 내 행색이 문제라기보다는 동행의 외양이 더 문제인 듯하였다.

나의 동행이자 전령인 사내의 이름은 박융(朴隆)으로, 두류산 고을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수다스럽지 않고 말투는 느릿느릿하다. 이 자의 심성이 유순하고 명민하니 참으로 요순 시대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만 이 모습이 참으로 기이하다.

우선 죄인이 자자(刺字)를 당한 것마냥 이리저리 일그러진 적갈색 문양이 피부에 그려져 있고, 혈맥(血脈)이 보통 사람보다 많이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힘이 장사다. 오는 길에 쓰러진 장송(長松)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사내는 이를 나뭇가지 줍듯 쉬이 길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참으로 신묘한 이 재주에 놀라 그 내력을 물었지만, 박융은 그저

— 태어날 때부터 이 모양입니다요.

라고만 답할 뿐, 뚜렷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무령에 대해 물었을 때도 시원스러운 설명을 듣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가 내리기 전, 나는 박융에게 무령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자는 무령이 마을에 찾아온 손님이라고만 말할 뿐,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할 때 안색이 창백하고 손을 떨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 중 현재의 무령을 아는 자는 오직 이 박융이라는 사내 뿐이다. 그런 박융의 반응이 두려움을 나타낸다면, 과연 무령은 지금 어떤 상태란 말인가. 혹여 전쟁의 상흔(傷痕)이 너무나도 심하여 괴물처럼 변해버린 게 아닐까. 나는 덩달아 어떤 두려움에 휩싸인다.

밤이 다 되서야 주모가 안으로 저녁상을 들였다. 박융과 겸상했다. 된장을 풀고 선지와 고사리, 숙주를 넣고 끓인 국밥이었다. 박융은 잘 먹었다. 나는 물려 많이 먹지 못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계축년(癸丑年) 팔월(八月) 열여섯 날.

구름이 끼었으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차차 걷힐 듯하다.

멀찍이서 두류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류산은 곧 지리산으로, 일찍이 이인로가 말하기를 그 테두리는 무려 십여 고을에 뻗치었기에 달포를 돌아다녀야 대강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일전에 박융에게 청학동에 대한 이야기를 일러주었더니,

— 어찌 보면 그 말이 우리 소을촌(瘙乙村)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요.

라고 하였다. 소을촌은 박융이 사는 마을이다. 박융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두류산 속에 있으며 길이 좁고 보통 사람들은 길마저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오래 전에는 산아랫마을과 연이 닿아 서로 오갔다는데, 이 때문에 아랫마을 노인들은 소을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으리라고도 하였다. 이는 역시 『청학동』에 나온 바와 같아 기뻐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소을촌이란 고을의 위치는 그러하되, 이 마을의 풍속과 산물(産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박융에게 물었더니 무령에 대해 물었을 때와는 다르게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소을촌은 고려 광종 때 세을진인(世乙眞人)이라고도 하고 용자(龍子)라고도 하는 한 이인(異人)이 두류산 꼭대기로 흘러들어와 만들어낸 한 부락(部落)이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바로 그 이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박융은 마치 비밀이라도 말하듯,

— 옛 어르신들은 그 도사님이 처용(處容)이라고 했습지요.

라고 하였다. 처용이란 신라 헌강왕 대의 인물로, 전해내려오기를 아내를 탐한 역신을 몰아내었다고 하였다. 이 설화와 함께 처용가(處容歌)와 처용무(處容舞)가 내려오고 있는데, 한 때 궁중에서 이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처용의 탈을 쓴 무동(霧童)이 다섯가지 색으로 차려 입고 오방(五方)으로 벌여 서서 가락에 맞추어 추었다. 진기한 광경이었다.
여하튼 그러한 내력이 있는 처용이 어째서 이 마을의 전설에 등장하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마을의 업(業)은 대부분 화전을 일구거나 나물을 뜯어 먹고 사는 것이나, 도축(屠畜)하는 자들도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 그 작은 고을에도 백정이 있더냐?

하였더니, 박융은

— 예, 백정이 있읍니다만 그것이 다른 고을에서처럼 천한 족속이 아니오라…

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에 내가 재차 물어보니 박융은 이렇게 말하였다.

— 백정은 소을촌에서는 절대 천한 이들이 아닙니다요. 되려 백정을 하고파 하구, 그리 되려고 노력하지요. 백정은 고기를 만들고, 고기를 변하게 하고, 고기를 토대로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늘이 인민(人民)을 낼 때 네 부류로 나누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였다. 이 도아(屠兒)의 업을 진 자들은 이 부류에 끼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인민이 아닌 바, 세간에서는 전민(田民)들마저 이 치들을 멸시한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이러한 백정들이 오히려 대접을 받는다니.

— 그 고을에는 세속(世俗)과 다른 질서가 흐르는 모양이로구나. 정녕 유학의 도가 그곳에도 있는게냐?

— 아이구 나으리, 아닙니다요. 비록 어수룩한 촌민들이나 훈장님두 계시구…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으되 우선은 갈 길이 멀었으므로 이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팔월(八月) 열일곱 날.

해가 높게 떴다.

산기슭에 도달했다. 듣던 대로 등정하며 보는 모든 곳들이 가히 선경(仙境)에 비할 수 있었다. 마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문답하던 기산 영수(箕山潁水)를 보는 바와 같았고, 이와 더불어 영월음풍(詠月吟風)할 마음이 절로 살아났다. 박융에게 물으니 앞으로 하루 정도는 더 걸어야 마을이 나오리라고 하였다.

산 아래에 있는 한 사찰에 묵어가기로 하였다. 여독(旅督)이 쌓인 나머지 잠시 잠들었다. 저녁 때에 박융이 흔들어 깨웠다. 한 요사(寮舍)에 모여 스님들과 절밥을 먹었다. 밖에 어둠이 짙게 내렸다.

시간이 어느새 삼경(四更)임에도 오침(午寢)한 시간이 길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가 탑 주위를 거닐었다. 그 옛적 과거를 준비하던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처럼 이 사찰의 경색(景色) 역시 청풍명월(淸風明月)에 가까웠다. 오래 전 무령을 만났을 때도 기억이 난다.

다시금 떠올려봐도 무령은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그 절에서 친분을 맺고 헤어진 다음에도 우리는 서로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의 삶의 궤적은 범상치 않았다. 어느 날은 함양에서, 어느 날은 대마도에서, 어느 날은 요동에서 서신이 왔고 결코 한 해 안에는 두 번 이상 같은 곳에서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어디론가로 바삐 이동하고 있었다. 이따금 서신에 쓴 그의 시조는 나그네의 애상(哀想)을 깊이 담고 있었다.

鄕有風流柔
鄕無我遲回
愿人世之革
某日貫鄕顧

온 곳이 있는 바람은 부드러이 흘러가는데
온 곳이 없는 나는 방황하기만 하누나
인간 세상의 변혁을 바라노니
어느 날에 고향을 돌아볼 것인가

분명 그는 무언가를 위해 그 먼 타향을 바삐 오가며 살고 있었으리라. 그때는 미처 묻지 않았으나, 홍진(紅塵)을 떠나 돌이켜보매 추량(推量)만이 어지러울 뿐이다.

내가 관직에 있을 적에 무령을 천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학식과 덕기(悳器)로 보매 필시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아도 부패하지 않으며, 임금을 보좌하여 정도(正道)로 나아갈 수 있게끔하는 재상의 덕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제세현(諸世賢)이 있다면 바로 김무령일 테였다. 그러나 무령은 내 권유를 거절하였고, 끝끝내 관직 생활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는,

— 이미 오랜 나날을 거처 없이 지내는 여객(旅客)의 처지로 지나왔으니 이제 와 어찌 부귀를 얻으려 하겠나. 군왕(君王)을 돕기로서니 내 영좌(領座)를 따를 일이 급하고, 군민(群民)을 보살피기로서니 내 제자를 가르칠 일이 급하니 그런 말 말아주게.

라 하였다. 아까웠으나 더 권하지 않았다. 무령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선비였다.

이제 하루, 조금만 기다리면 오랜 벗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으리라. 삼경의 달빛 아래서 이 글을 쓴다.


계축년(癸丑年) 팔월(八月) 스무 날.

구름이 높고 안개가 자욱하다. 이 고을의 특질(特質)인가.

한밤중에 소을촌에 도착하였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인지라 무령은 보지 못하였고, 다만 이 마을의 이장 댁에서 짐을 풀었다. 이장의 이름은 박대직(朴待直)으로, 이순(耳順)이 넘어보였으되 서른 정도의 사내처럼 활발하였다. 지금 그의 사랑채에서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지난 삼 일간의 기억이 계통 없이 되살아난다.

열여덟 날에 박융과 함께 사찰을 나온 후, 우리는 고을로 가는 길을 찾아 산 위로 한없이 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선계(仙界)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길 양 옆에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줄지어 피어나 있었다.

경치를 보고 있자니 공교롭게도 왜란 때가 떠올랐다. 왜란, 이라는 단어가 떠오름과 함께 나는 봉래산(蓬萊山)에서 순식간에 지상으로 적강(謫降)하는 듯했다.
임진년의 일을 생각하면 많은 장면들이 떠오르나 개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상(像)은 바로 한 살구꽃이었다. 그때, (누구)의 막하에 들어가 싸우던 때에 어느 이름 모를 산에서 보았던 한 송이 살구꽃.
때는 시대의 암울한 빛이 세상을 뒤덮어 죽음이 난무할 시절이었다. 왜적의 칼날은 죽음과 삶 그 어느께에서 번뜩였고 무죄한 백성들만이 그 제물이 되었다. 무심(無心)한 듯 피어있었던 그 살구꽃 한 송이는 마치 그 백성들의 피를 마시고 자란 것만 같았다. 무심하기에 사악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문득 박융에게 물었다.

— 전란에 너희 마을은 무얼 했느냐?

— 소을촌 사람들은 원체 아랫고을에 내려가질 않습니다요.

— 그러함은?

— 그러닝개루… 마을을 지켰습지요.

— 시혹 왜적의 침탈을 입지 아니하였는가?

— 그러믄요. 그 왜적들이야 이리로 올라온다 할지언정 들어오는 방법을 모르며, 애초에 이 마을이 진짜루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어찌하겠습니까?

— 그리 온전하였다면, 어찌 의병조차 일으키지 않았단 말이냐?

— 아유, 저희가 무슨 도움이 되었을지…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소을촌은 필경 요순 시대에 걸맞는 마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다시금 노자가 이 고을을 칭송하였을 것이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려는 선비들이 이 곳으로 오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심하였다. 그게 문제였다. 무심하였으므로, 이들은 선(善)하였고, 선하였으나, 행(行)하려들지 않았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두움을 느꼈다.

미시(未時)가 되자 절에서 싸준 좁쌀로 요기를 하였다. 산 중턱에 다다랐으나 박융은,

— 아직 멀었습지요. 꼭대기에 다다라서두 그 들어갈 길을 찾느라 시간이 걸릴 것이구…

라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산길이 험해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한 것을 박융이 잡아주었다. 나는 탄식하며, 무령이 이곳을 어떻게 통과하였는가 의아해했다. 분명 이 길을 혼자서 가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경우처럼 인도하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하다면, 무령은 어떻게 이 고을과 연을 맺었단 말인가. 밖과의 교류도 없이 살아가는 이 자들과.

그러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유시(酉時)에 다다르고 있었다. 산길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박융은 이러한 시간대에도 익숙한 듯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내 얼굴에 염려하는 빛이 돌기라도 한 듯, 박융이 말했다.

— 앞으로 두 시진 내에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 않으셔두 됩니다요.

우리는 계속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새 하나 지저귀지 않아 종내(終內) 들리는 것은 오직 어둠이 나린 숲 속은 내가 알 지 못하는 이물(異物)들로 가득 찬 듯했다. 인간의 기척은 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어떤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그 근원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무언가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지척(咫尺)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벽오(碧梧), 자는 양구(養久) 인(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