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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2일

일요일 12시, 제12K기지의 사무실은 휴일을 맞이해 빈 자리로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그렇듯 누군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휴일 점심 식사 시간까지 일을 하는 이유는 다양할테지만, 모두 그닥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허수유 연구원은 다리를 쭉 뻗고 허리에 무리가 갈 게 분명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깡통 여러 개를 이용해서 만든 조각이 있었다. 알루미늄 캔을 철 캔으로, 철 캔은 알루미늄 캔으로 바꾸는 조각을 금속으로 만든 보관함에 넣어도 되는 건가? 혹시 모르니 플라스틱 보관함에 보관해야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벌써 1시간 넘게 하면서 이미 완성된 보고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9시부터 시작한 일이었지만 보고서에서 바뀐 건 쉼표가 2개가 추가된 것 뿐이었다.

보고서의 제출 기한은 아직 24시간 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허수유 연구원에게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이 다 떨어졌다고 보고한다면, 그다음부터 받을 일의 양이 몇 배는 늘어날 거라는 사실을 저 옆에서 작업하고 있는 불운한 동료들 덕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다른 동료들과는 다르게 허수유 연구원은 아직 점심 먹을 시간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지의 다른 시설을 둘러보는 일을 하기에는 성격 상 절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그냥 방에 들어가서 쉬는 것이겠지만, 이미 8시간 넘게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온 참이었다.

불면증은 아니었다. 불운한 사고였다. 재단에서는 어쩌면 흔할 사고였고, 그 이후 허수유 연구원은 4년 동안 하루도 잠들 수 없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신경질적인 성격과 하루 중 8시간이었다. 첫 1년은 건설적인 시간이었지만, 결국 누워있는 것 이상의 뭔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딱히 사고로 가지게 된 변칙성 때문만은 아니다. 4년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울해지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기… 그쪽한테 제가 뭔갈 맡겼는데 그게 뭐였나요..?"

남자가 내게 묻는다. 놀랍게도 이 질문만 여덟 번째다. 보통 사람들이리면 충분히 친해지고도 남을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냈으나 이 남자는 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이 남자의 잘못은 아니다.

"…제가 나중에 포스트잇에 써서 그쪽 책상에 붙여드릴께요."

"아, 네. 감사합니다."

명찰은 소용이 없었다. 이름을 알면 뭐하나 그게 10초를 못가는데. 아마 저기 건너편에서 일하고있는 사람들의 90%는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를것이다. 물론 불만은 없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있었다. 내게 할당된 서류를 대신 가져다주겠다던 직장 동료는 벌써 네 번째 "아 맞다!" 만 시전하는 중이고, 내게 도와달라며 서류뭉치를 건냈던 남자는 오래전에 끝낸 그 서류를 아직도 찾아가지 않고있다.

"시간이 좀 많이 남네.."

어짜피 내 할 일은 모두 끝낸지 오래였기에,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뭘 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에, 걸림돌이라곤 내 마음속에 싹트는 아주 작은 죄책감 뿐이기에. 곧바로 이어폰을 귀에 꽃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벌써 2년전 이야기다.

항밈은 생각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였다. 처음 그 문서에 노출되었을때, 나는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때, 모두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았을때, 그리고 부서 전체에 커피를 돌리던 신입이 내게만 커피를 주지 않았을떄, 그리고 내 생일날에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의 축하 문자도 오지 않았을때, 그제서야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의사는 내가 우울증이랬다. 내 팔에 붉은빛의 오선이 그려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알게된 사실이였다. 의사는 내가 주기적인 상담을 받는게 좋을거라고 말했다. 비극적이게도 그 의사 또한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략 여섯번 정도의 상담이 의사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취소된 후에야 나는 겨우 노란 약통 하나를 받을수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저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괜시리 불안해지는 탓에 자세를 고쳐앉고 문서 작업을 하는척 연기한다. 또 그 남자다.

"지은 씨? 저기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요.."

이제 아홉번째다.


나름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