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꿈 경연] 민들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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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일 가까이 조용하기 짝이 없던 입원실은 하루 반절 새에 북적대기 시작했다. 각종 장비를 들여오는 연구진들, 촬영과 기록을 준비하는 의료진들, 타 부서에서 참관해 토론을 펼치는 박사들. 고요히 잠든 여인을 가운데에 두고는 말이다. 히츠 박사는 오랜만에 겪는 시끌벅적한 상황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으나 팔머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어날 기색조차 없었다. 근 2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연구진들이 마지막 장비를 들여왔고, 그는 팔머의 손을 꼭 한 번 쥐고는 일어나 비켜주었다.

수면변칙부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기면증. 뇌 활동 그래프는 재해 인자의 공격을 받은 패턴을 나타냈으나 겉으로 보기엔 잠에 빠진 것으로만 보인다. 상급 부서의 인식재해 대응 절차가 처방되었고, 대부분은 호전되었기에 정식 변칙 현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팔머 박사는 희생자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인지 투과 해석. 20██년 고안된 의료 기술로, 재해 인자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개발 진행.

"…사전에 스캔한 뇌 데이터를 기반으로 손상된 구조를 복원한다." 히츠 박사는 손에 든 계획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읊었다.

이번 시도도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내일 팔머가 내일 눕게 될 곳은 병실이 아닌 안치실이 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히츠 박사에게 있어 오늘은 마지막 병문안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가파른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찰나, 환자실은 정적에 가까워졌다. 그녀가 도착한 것이리라. 멀대 같은 연구진들 틈에서 비집어 나온 것은 신경과학과의 시즌 박사였다. 오늘 실험을 주최하고 계획한 그 담당자였다. 그녀가 팔머 옆에 다가가 앉자, 보조 연구원 린치가 주사기 하나를 건네주었다. 시즌은 주사기를 두어 번 흔들고는 히츠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효과가 있을까요?" 히츠 박사가 질문으로 응했다.

"여전히 실험적인 방법입니다만,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시즌 박사가 답했다.

히츠 박사가 입을 달싹이려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론적으론 완벽한 처방. 임상 시험도 성공적이었지만, 마음 한편의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히츠는 뒤로 물러나며 주머니 속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이번에도 안 된다면…'

갑작스러운 비프음이 히츠의 정신을 환기시켰다. 전원이 들어온 기계는 불쾌한 소리로 존재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히츠는 불길한 예감은 접기로 했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뿐이었다. 시즌 박사는 소형 태블릿을 확인하고는 팔머의 혈관에 투명한 액체를 주입했다. 두어 명의 연구원은 팔머와 장치를 연결했다.

히츠는 보조 연구원이 만지는 디스플레이를 어깨너머 물끄러미 지켜봤다. 연구원 린치가 코드를 타이핑하자 디스플레이에는 조잡한 이미지와 미묘한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는 듯한 뇌 지도의 3D 모형. 팔머의 것이었다.

"연동되었습니다, 박사님." 린치가 보고했다.

시즌 박사는 끄덕이고는 태블릿으로 밈 인자 몇 가지를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보고서의 비유대로라면, 심폐소생술과 비슷한 계열이랬다.

그 자리의 모두가 검은 화면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병실은 수술실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고, 외부에서 온 박사들도 팔짱 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방은 정적 외엔 심박 측정기 소리뿐이었다.

어두운 뇌 지도 한 가운데, 작은 빛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곤 곧장 빛줄기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연노랑 빛이었다. 참관 박사들은 놀라워했고 시즌 박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빛은 한 줄기로 시작해, 점점 식물 뿌리 같은 형상들이 곳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병실 내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맙소사." 히츠는 그저 울컥했다. 팔머에겐 이 정도의 진전은 한 번도 없었다.

보조 연구원 린치가 외쳤다. "등측면 전두피질 활성화되었습니다! 미상의 재해 인자에 따른 기억 손실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좋아, 측두엽은?" 시즌이 물었다.

"이제 반응 보입니다. 복구 인자 렌더하겠습니다." 다른 연구진이 보고했다.

시즌은 팔머의 신경에 연결된 청각 장치를 살폈다. 스위치를 올리자, 마치 북소리 같은 진동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팔머의 심박에 맞춰 울리는 중저음은 운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노란빛도 운율에 따라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완기 진입. 피험자는 완전 자각 상태입니다." 연구진이 보고했다.

두 번째 약물을 주사하던 시즌은 끄덕였고,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이에 보조가 무언가를 타이핑했다. 디스플레이에는 형상 하나가 더 등장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뇌 모형 옆에 나타난 것은 이전에 팔머를 스캔했던 지도였다. 녹색 빛깔로 반질거리는 아름다운 모형. 팔머의 부활이 이제 코앞에 다가왔다. 히츠는 진심으로 희망했다.

"복구 인자 렌더링 완료. 다들 귀 막으세요!" 시즌 박사가 큰 소리로 경고했다.

"셋, 둘, 하나. 주입."

병실은 순식간에 들리지 않는 폭음으로 가득 찼고, 그 자리의 모두에게 아찔한 추락 감각이 느껴졌다. 동시에, 뇌 모형엔 폭포 같은 녹색 물결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부 구조까지 차오르던 물결은 굉음이 가라앉자 다시 흘러내려 버렸다. 구멍 난 독에 물 빠지듯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부분이 당황했다.

"다시." 오직 시즌 박사만이 내색하지 않고 다시 전원을 올렸다. 하지만 여러 시도에도 녹색 빛은 어둠 속에 녹아들 뿐이었다. 복구 인자는 전혀 먹혀들지 못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밈 처방이 전부 무효 되고 있습니다." 린치가 소리쳤다. 심박 측정기는 그의 상태를 대변하듯 규칙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히츠의 심박도 요동쳐댔다.

다급해진 시즌 박사는 새 약물을 주입했지만 팔머의 뇌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병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던 뇌 지도는 식어버렸고, 마지막 남은 앙상한 노란빛마저 깜빡이다가 사라져버렸다. 팔머는 또다시 흑색의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 스캐너는 그에게서 어떤 신호도 잡아내질 못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 히츠는 또 한 번 똑똑히 겪고 말았다. 안타까운 심정은 같겠지만 그 자리의 누가 히츠에 비할 수 있겠는가. 참관 박사들은 서류를 내던지곤 하나둘씩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시즌은 무거운 마음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2011년 2월 2일부, 엥시 팔머 박사는 뇌사 판정, 표준 기증 절차에 따라…"

시즌 박사의 말문을 막히게 한 건 히츠였다. 언제 꺼냈는지 모를 이어폰은 팔머의 스캐너에 연결되어있었다.

"잠깐, 뭐 하는 거에요?" 그녀가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개발한 청각 인자에요. 박사님은 내가 직접 찾아올 겁니다." 히츠 박사의 발언에 병실이 웅성댔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 상황 자체를 흥미롭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히츠, 이성적으로 판단하세요. 후회할 겁니다."

"시즌 박사님, 저는…"

저 멀리, 코드를 뽑으려 달리는 눈치 빠른 린치 덕분에 히츠에겐 마지막 말을 할 시간조차 주어질 수 없었다. 그는 버튼을 눌렀다.





"…는 어떤… 까요? …"

웅얼거리는 소리. 좀처럼 눈이 떠지질 않는다. 바깥의 소리는 웅웅대며 하나의 소음처럼 들려온다. 마치 이 기분은… 어린 시절 심한 감기에 걸려 약에 취해 있었던 때처럼. 온몸에 식은 땀이 난다. 정신이 몽롱하다.

"손님!" 승무원이 소리쳤다.

"아. 아이쿠, 죄송합니다. 뭐, 뭐라고 하셨죠?" 덕분에 히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긴장하고 있었는지 히츠는 알 길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점차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 해외 출장을 가는 비행기, 바로 그날이었다.

"음료 말이에요. 음료." 승무원이 말했다.

히츠는 잠시 고민하며 승무원의 얼굴을 살폈지만, 머리통엔 볼펜 정도의 길고 뻣뻣한 흰 털이 가득히 달려있어 거의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히츠는 갑자기 등골이 쭈뼛하더니 목이 다 나가버린 느낌을 받았다.

"저는 물을 좀… 예, 감사합니다." 히츠는 거의 쌕쌕거리는 소리로 답했다. 민들레 얼굴은 물을 한 잔 따라주더니 휭하니 가버렸다. 옆 좌석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요, 히츠!" 목소리의 주인공은 팔머였다. 히츠와 함께 수면변칙부를 기획한 자, 동시에 히츠의 첫 사수였던 그녀.

"아, 박사님." 히츠가 간신히 대답했다. 팔머는 그런 히츠에게 담배 한 대를 물려주고는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이 은은히 엿보였다.

"고마워요. 음, 물 한잔 하니 좀 낫네요." 히츠가 미소 지어 보이곤 연기를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 팔머가 읽기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네?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기내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물 말이에요,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팔머의 표정은 갈수록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섞여갔다. 소름이 전신을 휘감는 알 수 없는 느낌. 히츠는 손에 쥔 물잔을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쥐고 있던 것은 사라지고, 주먹 사이로 새 나오는 농밀한 연기뿐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벌벌 떨고 있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왜 그런걸 묻는 건데요?" 그것은 어쩌면 '묻기'보다는 '생각하기'에 가까웠다.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막혀 거의 나오질 못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선체는 드르륵대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히츠는 승무원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은 거의 움직여주질 않았다. 걸음, 호흡,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물속에 빠진 것처럼 흘러갔다.

"나한테 물으면 쓰나요? 박사님 잠버릇이 고약한 걸 탓해요." 팔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튕기었다.

거의 즉시, 비행기가 폭발했다.

"아악!"

히츠의 비명은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그의 평형감각은 비행기의 파편과 함께 산산이 박살 난 지 오래였다. 그가 공중에서 몇 번을 회전했는지는 몰라도 왜 아직도 기절하지 않는지 의심될 정도의 패닉 상태였다. 곧 사방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팔머의 목소리였다.

그는 난잡한 정신을 깨우고 목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을 뜨기 직전, 히츠는 거대하고 푹신한 바닥에 처박혔다. 살짝 물기가 찬 노란 천, 부드러운 질감. 히츠는 두통을 이겨내고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곤 곧 이것이 거대한 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어쩌면 빌딩 하나보다 더 클지도 모를 민들레였다.

그제야 히츠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간만의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자 저도 모르게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연기는 공중에 퍼지더니 희고 작은 알갱이가 되어 날아갔다. 태어나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를 뱉었으나 성대는 거의 작동하질 못했다. 아니, 그보다도 들리지 않는 편에 가 마지막으로 소리를 들은 것이 기억나질 않았다. 귀가 먹먹해져 왔다.

그 기이함을 알아챔과 동시에 바닥을 이루던 노란 꽃잎은 곳곳에서 터져 올라 개미만 한 검은 씨앗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씨앗엔 작은 솜털이 하나씩 달려있었다. 겁에 질린 히츠가 벌떡 일어나는 사이, 이미 씨앗 수십억 개는 히츠를 발을 덮쳤고, 그대로 타고 올라 체내 곳곳을 뚫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구역질에 비명을 지르자 하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물감 섞듯 뒤섞이는 세상. 감각은 어느샌가 흩어져 버렸고, 시야는 하나의 흑백 풍경화로 재구성되었다. 눈에 보이는 벤치와 강, 그 너머 핵폭발 버섯구름. 살아서 수십 번 남짓 보았던 그 이미지.

히츠는 아직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질 못했다. 옷을 펄럭이며 씨앗은 사라졌음을 확인한 그가 주변을 살폈다. 벤치에는 중절모를 쓴 사내가 앉아있었다. 히츠는 언제 정신을 놓았냐는 듯 조심스레 다가가 그를 훑어보았다. 그의 입엔 궐련 담배가 물려 있었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쇼크에 빠졌다. 틀림없는 그 자였다.

"맙소사…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죠? SCP-990?"

보고서에 명시된 복장 그대로의 모습. SCP-990, 꿈속의 사내. 히츠가 그의 옆에 앉자 중년이 입을 열었다.

"히츠 그린 박사."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못 느끼나?"

"뭐라고요?"

"말 그대로네." 990은 으쓱했다.

"무슨 말… 알아듣게 이야기를 좀 해봐요!"

"그렇지 않아,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지. 음, 그래. 담배 한 대 하겠나?"

"아니오. 저는 비흡연자라…"

"일평생 단 한 번도?"

그 질문에 히츠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확신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제야 히츠는 눈앞의 것을 의심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이건 990이 아니야. 그냥 가짜일 뿐이라고. 대체 넌 뭐야? 이것들도 다 뭐냐고!"

"직접 알아내지 않으면 의미 없어."

"헛소리 마! 장난질은 그만두고…"

히츠가 달려들어 중년의 멱살을 쥐어 잡자 그것의 외형은 거품처럼 오그라들더니 수천 개의 꽃잎이 되어 터져버렸다. 그 순간, 히츠는 자각했다.

"다 꿈이야." 히츠의 메타인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노란빛으로 녹아내린다. 땅은 민들레 향으로 무너져 내린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도달한 곳은 희고 흰 배경이었다. 그저 공간뿐인 공간.

"드디어 자각하셨구먼."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히츠가 뒤돌아봤다.

"반가워요, 그린. 실력 다 죽으셨네." 팔머가 농담 투로 말했다.

"박사님? 세상에, 진짜 박사님 맞으세요?" 히츠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제 다 알면서 왜? 솔직히 나도 놀랐어요. 여기까지…"

"아뇨, 아니야. 당신과 나만 알 만한 것에 대한 걸 대봐요!" 히츠가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그린.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라면 꿈은 그걸로 위장할 텐데."

"그렇다면 당신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몰랐던 것을 가르침으로써 증명할 수 있죠. 방금처럼. 그쵸?"

할 말을 잃은 히츠는 입을 다물고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마지못해 납득했다. 어찌 되었건 그의 꿈이 자각몽이 된 이상 더 위협이 될 것도 없었다.

"보통 사람은 여기서 자각할 수도 없죠. 역시 재능 있는 거 맞다니까." 팔머는 머쓱해하는 그를 보며 능글맞게 물었다. "일단 좀 앉고 이야기하게요. 한 대 피울까요?"

히츠는 불현듯 깨닫는다. "맞아요, 제 꿈표식1은 늘 담배였죠. 입에 물어본 적도 없었는데… 역시 박사님답네요."

"당신 것 뿐만 아니라 기지 인원들이라면야… 그래, 말 나온 김에 바깥은 어떤가요? 아주 난리죠?"

"박사님이 쓰러진 뒤로… 부서 일은 저랑 시즌 박사가 다 맡고 있어요. 어떻게 하루하루 꾸역꾸역 넘기지만 그 빈자리가 너무 커요. 그래도 기면 현상에 걸린 인원들은 팔머 박사님 빼고는 대부분 일어났다고요. 다시 쌓아 올리면서 규모를 키우고 있고요." 히츠는 그간의 일을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꽃을 봤나요?"

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팔머는 말을 이었다. "그건 인지적으로는 거대한 꽃이에요. 사람들의 꿈에서만 피어나는 꽃. 오직 꿈에서만 보이고 기억할 수 있는 꽃이에요. 어떻게 그것이 자라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수없이 많은 변칙 개체를 스캔하고, 꿈 독립체를 연구하고, 실험 인원들을 갈아 마시다 생겨난 종양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종양… 해석 스캐너가 오염되었군요."

"정확히는 스캐너의 인공 신경망이요. 종양은 자신과 접촉한 사람에게 씨앗이 돼죠. 스캐너를 이용했던 모든… 아마 박사님에게도 들어있겠죠." 팔머는 설명하며 히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씨앗은 꿈속에서 자라나 꽃이 되고, 다른 장치로 옮겨붙고, 또다시 전염되고… 우리 부서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장비도, 연결된 시스템들과 데이터도… 저는 꿈속에 갇힌 채 깨달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죠. 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수면변칙부는 날 깨우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기면증은 우리가 다 치료했어요. 다른 환자들은 모두 일어났다고요!"

"그게 바로 꽃의 속임수에요. 그렇게나 영리할 줄은 몰랐는데… 아마 완쾌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스캐너엔 이미 뿌리를 뻗을 만큼 뻗었으니까. 감염자들을 정상으로 분류하곤 더 널리 퍼뜨리려는 셈이겠죠."

히츠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 있던 나는 꽃을 본 이상 깨어나서는 안 됐고, 내 치료를 방해해야 했어요. 나는 꿈속에서 시각 재해를 만들었고 나한테 노출시켰어요. 그렇게 된 거예요. 정말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죠."

히츠는 팔머의 앙상했던 뇌 모형을 떠올렸다. 히츠는 자신의 노력이 팔머에겐 필사적인 자해가 되었음을 생각하니 울음이 북받쳤다. 팔머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한동안 안아주었다. "그래도 희망이 없었는데, 이렇게 날 찾으러 와줬잖아요."

그러고는 팔머는 주먹 안에서 작은 호롱불을 만들어 보였다. 히츠가 불꽃의 표면을 읽자 따끔거리는 재해 인자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수년 동안 만든 작품이에요. 시각적으로는 불. 본질적으로는 꽃과 씨앗을 태울 수 있는 유일한 재해 인자. 지금은 눈이 따끔거리는 수준이지만 꽃과 맞닿기만 하면… 뿌리까지 태우기엔 충분한 화력이죠."

"그럼 이것만 있다면…"

"히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잊지 말아요. 일어나게 되면 부서의 모든 스캐너를 내게 연결해요. 데이터베이스도, 연구 자료도 모두. 내가 불태울 수 있게 끔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그리고 새 부서를 창립해요. 할 수 있을 거에요."

"아니요. 팔머, 다른 방법이 있을 거에요!"

"꽃은 당신의 기억을 어떻게든 먹어 치울테죠. 하지만 꿈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나간다면, 그리고 당신의 인식 저항력이라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계산대로면 박사님도 불길에 휩싸일 테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히츠, 내가 재단의 일원인 이상 더 큰 선을 위한 희생은 필연적이에요."

"제발, 팔머. 나는…"

팔머에게도 오래간만의 소중한 만남이었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감정에 휩쓸리게 할 것이었다. 냉혹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히츠를 각몽의 낭떠러지로 떨어뜨렸다. 그 덕에 히츠에겐 마지막 말을 전할 시간조차 주어질 수 없었다.

그렇게, 히츠는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눈을 떴다. 꿈이 아닌 현실. 그토록 오랜만이던 현실이었다. 목이 타는 듯이 쓰려왔다.

"윽, 목… 목이…" 그녀가 거의 새는 듯한 목소리로 끅끅댔다.

"박사님, 시즌 박사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시즌이 놀라며 물었다.

"눈이 너무 부셔서…" 그녀가 눈쌀을 찌푸리며 답했다.

"떨어져 계십시오, 시즌. 아직 신분 증명이 필요합니다." 알아듣기 힘든 중저음의 목소리.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상급 부서의 누군가일 것이다. 시즌이 그 자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엥시 팔머 박사. 4등급 연구원, 수면변칙부장…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암구호는 사천, 금화조, 감면하다. 맞을 거예요." 팔머가 힘들이며 가까스로 답했다.

"확인했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시즌, 목 좀 축이게 해주세요."

"예, 이사관님." 시즌이 대답하며 팔머의 입에 젖은 물수건을 물려주었다. 이사관은 병실을 나가며 전등을 꺼주었다.

"시즌? 시즌이군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기억이 이상해요." 팔머가 물수건을 뱉으며 물었다.

"박사님,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그린, 그린은 어딨죠? 분명 같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팔머가 다급히 물었다.

"히츠 박사는 깨어나자마자 인공 신경망과 데이터베이스에 자신을 연결했습니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지금 어딨냐는 말이에요, 시즌!" 팔머는 완전히 나가버린 목으로 소리쳤다.

"복도 끝쪽 중환자실이요, 박사님. 일단 진정하시고…"

팔머는 시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땅을 내딛는 걸음 하나마다 온몸의 근육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시즌은 자빠지려는 박사를 부축해 중환자실에 다다랐다. 팔머의 눈에는 스캐너 디스플레이가 가장 먼저 보였다. 화면에서 회전하는 히츠의 뇌 모형은 붉은빛으로 들끓고 있었다. 식을 줄 모르는 용광로가 연상될 정도로 붉은빛이었다.

팔머가 절룩거리며 천천히 히츠에게 다가갔다. 소형 태블릿에 기록된 손상 내역은 숨이 붙어있는 것조차 기적일 정도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상황 정리가 안 돼요. 히츠가 왜…"

"히츠 박사는 인공 신경망과 데이터베이스의 감염 인자를 모조리 정화했습니다. 그제야 수면 스캐너는 제작동을 했고요. 늦게서야 알았지만, 우리 기지 전원과 외부 인력 수만 명이 감염되어 있었죠. 그 덕에 박사님도 구해낼 수 있었고요.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우리 모두를 구한 겁니다."

"…"

팔머는 조용히 히츠의 손을 잡아주었다. 기억은 모조리 잃었지만 남은 감정만이 그를 추억할 수 있었다.


...


팔머 박사는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 안정을 취하고 건강을 회복했다. 기지에는 다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팔머 박사는 업무에 복귀했고 수면변칙부는 그녀의 재임과 함께 안정화되었다. 시즌 박사는 수면 중 외부 인원과 소통할 수 있는 기술을 기획했고, 보조연구원 린치가 이를 마무리지었다. 히츠 박사의 신체는 불우한 이들을 위하여 기증되었다. 그는 재단 역사의 영웅이 되었으며 최고사령부 훈장을 받는 영광이 주어졌다. 나날이 조용할 수 없는 재단의 변방 기지에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히츠의 기억이 꽃향기에 젖어간다.

비행기는 사라지고 승무원은 잊혀진다. 가짜 990은 지워지고 담배 연기는 흩어진다. 꽃은 자신을 그늘 밑에 숨기고, 팔머의 조언을 어둠 속에 묻는다.

하지만, 기억 속의 불을 묻지는 못한다. 꽃의 뿌리를 태울 불 하나만은.

그렇게, 히츠는 꽃을 태운다.

더 큰 선을 위한 희생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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