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

공허하고 하얗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색 뿐이지만, 누군가가 말하면 그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튕겨져나와 공간 전체에 메아리 친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한다.

빗지 않아 헝클어진 긴 갈색 머리의, 회녹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성이.

"…파루크?"

메아리 친다. 그리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알렉스?"

메아리 친다. 그리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욘시?"

메아리 친다. 그리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의 메아리가 잦아들 때 쯤,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붙였던 모든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듣고있는 거 알아. 더 이상 시치미 떼지마."

그러자 한 남자가 이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정장을 입고 중산모를 쓴 남자가.

이제 이 하얗고 공허한 공간에 둘만이 덩그러니 서있다.

"시규로스." 그가 말했다. 진저리 난다는 듯이.

"뭐 할 말 있나?"

"날 깨워줘. 이 공간에서 날 꺼내줘. 할 수 있다는 거 알아."

"안 돼. 그리고 싫어."

그가 짧게 말했다. 더 대화하기 싫다는 듯이.

"난 갇혀있어. 팔에 링거를 꽂고 영원히 잠들어 있지. 아마 평생 깨어날 수 없을거야."

그는 가만히 서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불안함에 잠에 들지 못하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마다. 내 꿈 속에 나타나 나를 따뜻하고 다정한 말로 안심시켰어. 그럴 때마다 나는 죽은듯이 잘 수 있었지."

그는 불편해 보인다.

"난… 난 너무 오래 갇혀있었어. 더 이상 이러고 있기는 싫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당신이 날 여기서 꺼내줘. 그때들처럼 날 안심시켜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떨리고 불안해졌다.

"시규로스. 너는 위험했어. 이 세상을 주무르고 몇천번은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었지." 그가 입을 열었다.

"내겐 위험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고, 너는 그 위험이었어. 그 말들은 내 의무의 일환이었을 뿐이야."

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넌 이제 위험하지 않아. 그들이 널 격리했지.

…넌 이제 내 소관이 아니야."

그의 마지막 말의 메아리가 그칠 때 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힘으로 날 부르려 하지마. 내겐 할 일이 있어."

그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그녀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회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린다.

"…리처드?"

"…스티브?"

"닐? 오베? 데이브? 토니? 모르페우스? 오네이로이?"

"…자기?"

"…."

"당신이 스스로에게 붙였던 모든 이름으로 부르고있어. 듣고있는 거 알아."

'…당신?"

"..아직 거기있어?"

"날 두고가지 마. 날 꿈 속에 버리고 가지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