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이이펴어어엉

복도를 지나던 집사는 공주의 방 문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회중시계를 꺼내보니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집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방문을 두드렸다.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공주님, 주무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내일 식 중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이만 주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키 공주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책상 주변에는 구겨진 종이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녀는 책상위에 놓인 종이 몇 장을 집어들었다.
"곧 완성될 것 같소, 헨. 먼저 들어가 보시오."
아키 공주가 웃으며 종이를 흔들었다. 헨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설문은 다른 신하에게 맡기는게 좋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매년 열리는 행사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지…"
어느새 다가온 헨이 주변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휴지통에 넣었다. 책상에는 빈 찻잔이 몇 개나 올려져 있었다. 헨은 능숙하게 쟁반 하나에 찻잔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올해의 행사는 특별하잖소? '그 전쟁'이 끝난지 벌써 300주년이라니. 그런데 어찌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소? 게다가…"
아키 공주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바로 잡았다.
"모름지기 사람이 펜을 들었다면 글을 써야 할 것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그럴듯한 문장 하나라도 완성해야 하는 법이지. 집사도 이제 내 성격을 잘 알리라 생각되오만?"
헨은 살짝 웃었다.
"그럼요. 공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셔도 끝을 보는 성격이셨지요. 15년동안 공주님을 돌보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깜짝 놀라곤 합니다. 이렇게 작고 어린 소녀가 궁정의 그 누구보다도 더 진지하시니."
"집사야말로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났는데도 왕실에 머무르고 있지 않소. 그대를 조금이나마 본받으려 할 뿐이지."
아키 공주의 찬사에 헨이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으니 부끄럽군요. 얼굴이 더 달아오르기 전에, 잠시 물러나 차를 내오겠습니다."
"고맙소. 아, 설탕 세 스푼 잊지 마시오. 쓴 맛에는 도무지 정이 들지를 않는군."
헨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아키 공주는 다시 연설문을 써내려갔다. 문틈의 불빛은 새벽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종전 기념 행사까지 약 20분이 남았다. 아키 공주는 완성된 연설문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검토하는 와중에도 몇 번씩이나 어색한 내용을 수정했다. 완성된 것 같았던 연설문은 금새 수정 표시로 넘쳐났다. 공주는 집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수정에 집중했다. 그녀는 헨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아, 집사. 준비는 다 끝났소?"
"연설대 설치도 끝났고, 연단도 깔끔합니다. 내빈 분들도 거의 다 오셨습니다."
"석상의 상태는 어떠한가."
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큰 균열이 생겨서 궁정 기술자들이 신속히 손을 봤습니다. 행사가 시작 할 때 까지는 웬만큼 굳을 겁니다. 새벽에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무너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키 공주가 작은 입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것 참, 또 균열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소? 여태껏 단 한번도 균열이 생긴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쟁통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석상이 왜 갑자기…"
공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헨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곧 식에 들어가실 분이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서야 쓰겠습니까. 행사가 끝나는 대로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지시하겠습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무리 걱정해도 끝이 없는 법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지요."
헨의 말에 아키 공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오. 더 이상 신경쓰지 않도록 하지. 으음… 노력은 해 보겠소."
아키 공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역시 난 아직 너무 어린 것 같소. 이런 행사에 익숙치 않고 여전히 긴장하고 있으니."
집사는 쪼그려 앉아 아키 공주의 신발끈을 다시 정리해주었다.
"공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영 어울리질 않는군요. 처음으로 행사에 나갈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행사 한 시간 전부터 긴장된다고 후회된다고 어찌나 투정을 부리셨는지."
"아, 역시 집사에게 그런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었소. 잊어버리지도 않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력도 좋소."
정리를 마친 헨은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공주님께서는 12세부터 종전 행사 연설을 맡으셨고,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입니다. 늘 잘 해오셨고, 이번에도 잘 해내실 겁니다."
"바로 그런 기대감이 날 더 긴장하게 만드는 거요."
"그러나 공주님의 연설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것 또한 그 긴장감이지요. 그리고 실수 한 번 해도 뭐 어떻습니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닦고, 흙을 털고, 필요하시다면 제가 손이라도 잡아 일으켜 드리지요. 송구스럽게도 잘생긴 왕자님은 아닙니다만."
아키 공주가 키득거렸다.
"아니, 괜찮소. 넘어지면 내 스스로 일어나리다."
헨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나가실 시간입니다, 공주님."
아키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크델라 공주님께서 연단에 오르십니다."
식을 맡은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이윽고 아키 공주가 연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단의 뒤에는 영웅의 석상이 있었다. 크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어딘가로 손을 뻗는 남성의 모습을 한 석상. 전쟁 영웅 '알파'의 석상이었다. 아키 공주는 석상을 한 번 돌아보고 연설대 앞에 섰다.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아이셔 왕국, 와플 민주공화국, 비오비타 왕국…'
많은 국가의 귀빈들이 행사에 참여했으나, 군데군데 빈 자리도 보였다. 전쟁 이후의 갈등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드러났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신경쓰지 말자. 지금은 연설에 집중해야 할 때야.'
어느새 공주에 대한 경례까지 끝이났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아키 공주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이 자리까지 찾아와주신 아크리온 왕국 여러분 그리고 각국의 귀빈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차근차근, 천천히. 아키 공주에겐 이번이 세 번째 행사였다. 그럼에도 한 글자 한 글자 읽을때마다 공주의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올해는 50년 전쟁이 매듭지어진지 3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별한 날을 맞아, 이번 행사에는 그 끔찍했던 전쟁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아키 공주의 맑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식장에 퍼져나갔다.
"많은 학자들이 궁금해했었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땅을 집어삼키는 홍수와 쓰나미,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 초목을 갉아먹는 벌레떼, 혹은 의사조차 거부하는 질병. 학자들은 많은 예상을 내놓았습니다. 허나 재앙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아키 공주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푸른 피부와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뿔과 송곳니까지 갖춘 이들. 그들이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책에서나 나올법한 그 모습에 우리는 그들을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공주는 종이 한 장을 넘겼다. 하마터면 수정한 부분을 지나칠 뻔했지만 다행히 찾아내었다.
"그들은 잔혹했습니다. 최소한의 인정도 없는 그들과 마주한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들은 강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힘은 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악했습니다. 끔찍한 생물을 이 땅에 풀어놓고 대지를 오염시켰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피비린내가 풍겼고, 발 닿는 어디에나 죽음이 뿌리를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아키 공주가 연설을 멈췄다.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공주는 불현듯 석상을 돌아보았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 외에 웅성거리는 소리는 따로 들리지 않았다. 공주는 침을 삼키고 다시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불타버린 땅에도 희망의 씨앗이 돋아났습니다. 우리는 강한 유대감을 보였습니다. 계급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섰고, 국경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로 뭉친 우리에게 영웅들이 찾아왔습니다. 30명의 영웅들, 그들은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정의로웠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어둠이 드리웠던 이 땅에 마침내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키 공주가 한 장을 더 넘겼다.
"전쟁이 발발한지 50여년이 지나, 마침내 이 땅에서 마지막 악마가 사라졌습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영웅이었던 대현자 뎁실로프는 30인의 영웅에게 영생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 '알파'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곳에는 이 석상만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연단에 진동이 일었다. 이번엔 작은 진동이 아니었다. 연설대에 놓인 마이크가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행사에 참여한 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비, 비록 알파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가 어딘가에…"
아키 공주가 어렵게 입을 떼었으나, 행사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이미 진동의 크기는 약한 지진의 수준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헨이 급하게 연단으로 올라왔다.
"공주님, 국왕폐하께서 행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이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친위대가 귀빈들을 안전히 모실 겁니다."
아키 공주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공주 역시 행사를 포기하고 자리를 뜨려했다. 그 때, 공주의 등 뒤에 있던 석상이 강하게 떨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석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겉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내렸다.
"공주님, 어서 이 쪽으로!"
아키 공주에겐 헨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공주는 홀린 사람처럼 석상에 천천히 다가갔다. 공주가 한 걸음 뗀 순간, 석상이 앞으로 기울며 무너졌다. 아키 공주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파편에 발이 걸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먼지가 자욱하게 풍겼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헨이 기겁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아키 공주는 헨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궁 친위대가 무너진 석상에 모여들었다.
"이 곳은 위험합니다. 이만 자리를 피하십시오."
친위대 병사 한 명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누군가… 누군가 있소."
피어오르는 먼지에서,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석상을 둘러 싼 친위대가 일제히 착검한 총을 견착했다. 서서히 먼지가 바람에 날리며 부서진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엔 누군가 있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갑옷이었다. 갑옷에는 온갖 흠집이 가득했다. 얼굴은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착오적인 옷차림의 남자는 바닥에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아키 공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키가 족히 6.8피트는 넘어보였다. 서 있긴 했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누구냐고 물었소."
아키 공주가 재차 물었다. 남자는 대답대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쟁은, 전쟁은 어떻게 되었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대체 무슨 말을…"
아키 공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는 어딘지 불안해해보였다.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고, 주변을 미친듯이 돌아보았다.
"퀵소티우스는! 그 망할 악마는 어떻게 됐지? 누가 말 좀 해봐! 전황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는 거냐!"
아키 공주도, 집사 헨도, 친위대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뭣들 하나! 어서 이 남자를 붙잡지 않고!"
보다 못한 헨이 호통을 쳤다. 친위대 두 명이 갑옷을 입은 남자의 양 팔을 붙잡으려 했다.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자인지는 모르나, 자세한 얘기는 차차 듣도록…"
그 순간, 남자의 오른팔을 붙잡던 친위대원이 멀찌감치 나가떨어져 연단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어, 어?"
남자가 왼 팔을 휘두르자 왼 팔을 붙들고 있던 친위대원 역시 남자의 뒤로 날아가 구석에 쳐박혔다. 헨이 아키 공주를 감싸 보호했다. 왕궁 친위대가 곧바로 남자에게 사격을 가했다. B-1 반자동 소총에서 튀어나온 총알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자에게 닿은 탄두는 남자가 입은 갑옷을 뚫지도, 튕겨나가지도 못했다. 찌그러진 탄두가 바닥에 후드득 쏟아졌다. 그러나 남자는 친위대를 향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아키 공주에게 향해 있었다.
"아르시아델 황녀님."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아키 공주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어서 도망치시지요. 비록 늙은 몸이지만 잠시라도 시간을 벌겠습니다."
아키 공주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주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집사, 잠시만. 잠시만 이 자와 얘기를 나눠보겠소."
아키 공주가 헨 앞으로 나섰다. 헨이 뭐라 외치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거구의 남자가 공주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황녀님을 뵙고도 소란을 피운 점,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키 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는 자신을 '아르시아델'이라고 불렀다. 공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아크리온 왕국의 공주, 아크델라 할시온이오. 아르시아델 황녀는 할시온 가의 선조였소. 300년 전 오늘 끝난 50년 전쟁을 겪은 마지막 왕손이셨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쟁이, 전쟁이 끝났다고? 그렇다면 전쟁은 누가 이긴 겁니까! 설마 악마들의 손에 넘어간 건…"
"진정하시오. 그대가 말하는 것이 사람과 악마와의 전쟁이라면, 우리가 이겼소."
남자는 양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했다. 크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이제 내가 다시 질문하겠소.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남자는 자세를 고쳤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아크리온의 방패' 대장 '알파', 아크델라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알파. 아키 공주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300년전의 영웅이자 영생을 얻지 못한 영웅 알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