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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윤동주, '병원' 중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상태였다.

 처음에, 서천객은 마치 인간처럼 나타났다. 케이프 코트를 입고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며, 어딘가 기이한 인상이 서려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되,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반가워하지 않았으며, 단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편지에는 옥빛의 정갈한 글씨체로 정중히 환영하는 뜻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천객은 일제히 코트 안에서 팔을 빼내어 쭉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팔에 깃털이 돋아났고, 곧이어 온몸에 푸른 기운이 돌더니 눈 깜빡할 새에 기묘한 형태의 생물체로 변이했다. 마치 새와 인간이 절묘하게 섞인 듯한 모습이었다.

 서천객은 인간들이 서천으로 갈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항공편이었다. 애초에 신들의 휴양지로 설립된 곳이니만큼, 신과 요괴 따위의 존재들은 서천의 출입이 용이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 감히 신이 다니는 길을 건너가기엔 정신이 나약했고, 감히 요괴가 들어가는 길을 통과하기엔 육체가 미약했다. 인간은 둘 중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존재였다.

 서천객은 이 문제에 서천의 설립자가 내놓은 대책이었다. 누군가는 찬성했고 누군가는 반대했으며 누군가는 관심이 없었으나, 그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년 소수의 인간이 서천객의 등을 타고 서천으로 떠나거나 서천에서 나왔다. 그 과정에 예외란 없었다.

 단, 오늘을 제외하고는.

 나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에서 분노에 휩싸인 채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호야의 모습은 그야말로 왕년의 아나키즘 테러리스트다웠다.

 — 야 이 씨발 이게 뭔 짓이야!

 호야는 상공 2미터쯤 위에 떠 있는 서천객 무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인간과 여섯의 서천객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본래 호야를 태웠어야 할 서천객은 다른 다섯이 떠 있는 고도보다도 멀찌감치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 우리 ‘다’ 가기로 한 거 아녔나? 어?

 능구렁이 손 인원인 호야, 다희, 병길, 림, 율과 나는 본래 서천에서 보내온 전령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이 꼭두새벽부터 거점인 펜션 앞마당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도 이 탓이었다.

 그런데… 서천객 중 하나가 호야를 태우기 거부한 것이 화근이었다. 녀석이 고분고분 말을 듣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호야를 내동댕이치고는 하늘로 올라가 원으로 빙빙 돌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호야가 더러운 뭔가라도 되는 듯한 행동이었다. 호야는 씩씩거리다 말고 다희에게 소리쳤다.

 — 다희,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려 좀 줄래?

 — 저, 저도 잘…

 다희는 당황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천과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이 중에서는 그 애가 제일일 것이었다. 가장 강력한 세습무당으로써 어릴 적부터 바리공주와 강한 연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희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창백해진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희에게 집중된 포화를 분산시킬 요량으로 말을 던졌다.

 — 자넬 싫어하나 보지!

 — 저 뱀 대가릴 확. 너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한다?

 — 아니면 예전에 잡아먹어 봤던 거 아녜요? 원한이 있는 것 같은데!

 — 이림 이 새끼야, 넌 내려오면 뒤졌어.

 이림은 무섭지도 않은지 낄낄댔다. 그 모습을 병길이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서천객 위에서 불안하게 중심을 잡으며 호야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이러다가 시간에 늦게 생겼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먼저 가도록 하죠.

 — 아니 못 가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유는 알아야할 거 아냐! 답답해 미치겠네.

 — 설마… 대장님만 요호라서 그런 거 아녜요? 인간이 아니라서…? 서천객들은 인간 전용이라고 저번에 다희가 말하기도 했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서율에게 쏠렸다. 서율은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그 말이 나오자마자 거의 모든 사람의 표정에 한 줄기 깨달음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서천객은 지금까지 오로지 ‘인간’만을 태우기 위해 프로그래밍 되었을 테니까. 호야가 요호라는 점은… 택시기사가 탑승 거부를 표명할 사유에 합당했으리라.

 호야의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도깨비의 그것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은 수준이었다.

 — 이 씹새들이! 어? 이 인면조 새끼들 훈제로 처먹어버릴라!

 — 그만 열불내고. 아무튼, 우리는 먼저 간다!

 내 말이 끝나기와 동시에 서천객은 날개를 펴 올리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멀찍이서 호야의 육두문자가 흐릿하게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동자 아이는 ‘작은 손님’이라는 단어를 듣자 얼굴이 밝아졌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우리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서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천객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일출관으로 가서 동자를 불러냈다. 이미 어디 묵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바리공주의 계시에는 마지막 마마신의 거처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자는 고작 7살쯤 되었을 아이로, 힐쭉힐쭉 웃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았다. 나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서천의 동자들은 모두 죽은 아이의 혼령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희가 넌지시 일러준 이야기였다. 그러하다면 이 아이의 사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어보기도, 궁금해하기도 어려운 주제였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아이는 어느새 목적지로 다다르고 있었다. 알고 있던 대로 일출관의 한 호실이 아니라, 바로 옆의 입원 병동에 있는 병실이었다. 그 병실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비명이었다. 그 목소리는 크고 거칠었고, 마치 미지의 적과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듯한 외침만 오로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아이고, 또 시작했나보네.

 동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투였다.

 — 무슨 일인데?

 — 아, 각시손님께서 발작을 일으키신 모양이에요.

 — 각시손님이… 발작?

 미처 동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 목소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귓전을 때렸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직접 들으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아이가 문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외쳤다.

 — 저… 1281호 손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의 쪽에서, 병실 안이 조금 보였다. 어떤 이가 누워있는 침상 옆에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열했고, 어떤 젊은 남자가 발버둥을 치는 병자를 제압하려는 듯이 위에 올라타 내리누르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손발을 휘젓는 병자가 버거운지, 남자의 등판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남자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 김철현 씨!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이를 악물며 팔로 병자의 목을 내리누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힐 것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았다. 마치 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마냥. 나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서율에게 눈짓했다. 어딘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정확히 몰라도, 제대로 된 의료 행위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일 이상한 것은, 그런 상황에도 주위의 의료진이 전혀 막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 반야 아저씨!

 동자가 세 번째로 부른 바로 그 순간에 병자의 몸이 움찔, 하고는 힘을 잃었다. 순식간에 안도의 한숨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남자와 가까이 있었던 간호사 한 명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사기를 병자의 팔뚝에서 빼냈다. 남자와 간호사들의 합동 작전이 완료된 순간이었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동자 쪽으로 다가왔다.

 — 무슨 일이기에 이리 부르니.

 — 찾아오신 손님들이 있어요.

 남자는 수척해 보였고, 얼굴은 피곤과 무기력함으로 찌들어 있었다. 젊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그의 몸짓은 마치 노인처럼 힘이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꽉 졸라맨 검은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장례식장에라도 온 듯 온통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아이의 밝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얼굴은 병자를 상대하던 그 표정에서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피곤해 보이는 눈가에는 미약한 호기심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 날 찾아올 손님들이 없을 텐데.

 그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맞닿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고 없는 어색한 만남이었지만, 대부분은 호의를 먼저 제시하면 상대방도 점점 분위기에 휩쓸려 유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많이 겪어보았다. 이번에도 아마 잘 해결되겠지.

 그리고 남자는 내 미소를 무시하고는 무미건조하게 등을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 들어오시오. 마침 딱 좋은 시기에 왔군.

 남자의 목소리에 미약한 조롱기가 배어 나왔다. 남자는 회색적인 부류 같았다. 그러니까, 무미건조하고 차가우며, 타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사람.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병실 안에 들어오자 소독약 냄새와 함께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침상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난동을 부렸던 여자가 누워 있었다. 남자는 그 여자에게로 시선을 흘끗 던진 뒤 간이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병실 한켠에 놓인 의자들로 손짓했다. 앉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우리는 차례대로 앉았다.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조사하고 있는 점이 있어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작은 손님’이 맞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자는 검은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다희가 옆에서 나지막이 짜증스러워하는 소리를 냈다.

 — 그렇습니다만.

 남자의 입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 난 류원시라고 합니다. 사학자고요.

 — 김가 철현이오.

 인사를 나눈 이후에도 작은 손님은 그 차갑고 무미건조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 어쩌면 바꾼단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율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나를 보자 나는 눈으로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았다.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인간은 다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

 — 작은 손님, 손님네의 일원. 천 년을 산 장본인이자…

 나는 부러 목소리를 죽였다.

 — 고려-조선인 대학살의 주범.

 — 뭐하는 겁니까.

 병길이 놀란 눈치로 나를 작게 제지했다.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연기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조금 연 채, 날카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연기에 기침하고는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 계속해 보시오.

 — 대학살이라는 말에 내재한 어감이 불쾌하게끔 할 수 있다는 점 압니다. 하지만… 역병이란 그런 존재 아니었던가요?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을 한 번에 죽음으로 이끌고 가니.

 — 그래서?

 — 자연재해는 그 의지의 부재 하에 더 잔혹하고 안타까워지죠. 해칠 의도가 없었던 자연의 섭리 하에 가해자는 소멸하고 피해자만이 잔존하니, 남은 이들의 한이 어떻겠습니까. 역병 환자의 가족들도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만나러 온 당신, 천연두 신인 당신의 존재는… 글쎄요, 당신의 존재로 인하여 재해에 의지가 개입되니, 이젠 재해가 아니라 대학살이라는 용어가 더 쓰기 적절할 것 같군요. 보십시오. 가해자가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나는 호기롭게 웃었다. 비협조적인 증인들을 조사할 때마다 늘 쓰는 전술이었다. 일부러 약점이나 불쾌할 만한 과거를 언급해서, 그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러고 나면 증인들의 감정은 둘로 나뉜다. 부끄러움, 혹은 분노.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감정의 발발이 시작되는 순간 그자는 내 손안에 들어온 찰흙 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남자를 주시했다. 감정의 미동이라도 보이는 순간, 모든 건 내가 의도한 대로 풀리리라.

 남자는 아무 감정 없이 연기를 내뿜었다.

 — 많이 들은 이야기요. 되새겨주니 고맙군.

 그는 두 번째 개비를 꺼내면서 덧붙였다.

 — 그래서, 여기 온 게 날 매도하려고 온 거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수를 쓰려다가 일을 그르칠 것만 같은 예감이 엄습했다. 남자에게 감정적인 상태를 유발하게끔 하는 건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정공법이 나을 것이다.

 —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주인들. 그리고 당신들의 행적에 관해서요.

 —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 우린 당신들, 손님네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눈매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까 전까지의 무미건조한 태도와는 전혀 상반된 태도였다. 하지만 이는 흩어지는 모기향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다시 침상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 마음대로 하시오. 그 대신 나도 좀 물어볼 게 있는데.

 — 그러시죠.

 — 정확히 어디서 온 거요?

 — 우리는 능구렁이 손에서 왔습니다. 초상세계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죠. 일제강점기 시기의 결사인 능사사가 그 전신입니다. 아실지 모르겠군요.

 병길이 나섰다. 그의 말을 듣던 남자의 얼굴에, 예의 그 태도가 어리고 있었다. 능사사, 라는 말에 놀란 표정이었다.

 — 능사사?

 — 아십니까?

 — 알다마다.

 남자의 입에서 연기가 훅하니 뿜어져 나왔다. 그는 말을 더 잇지 않았고, 이따금 중얼거리면서 홀로 피식 댔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 같았다. 자신을 제외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공간에서 헤엄치는 사람.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 박 양은 죽었소?

 — 네?

 병길의 얼굴에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 박수덕 양. 능사사의 수괴… 죽었느냔 말입니다.

 서율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 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박수덕이면… 호야를 말하는 거야?

 내 물음에 병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다시 능구렁이 손을 이끌고 계시고요. 그분을 아십니까?

 — 안다고 해야겠지.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었다.

 — 그럼 이상사례조사국은, 혹시 망하였소?

 순간적으로 남자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손이 별안간 꽉 쥐어졌다. 담배 개비가 비틀린 채 연기를 흘렸다.

 — 공식적으로는 일제가 패망할 때 같이 사라졌죠. 하지만 그 잔재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 그게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 네?

 —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는 불이 꺼져가는 담배를 손가락에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의식 저편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 안에 수렁이라도 존재하는 듯이. 남자는 이따금 고개를 흔들었고, 무언가를 뿌리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몇 분이 지나서야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 …질문할 것을 질문하시오. 내 의문은 다 풀린 듯하니.

 — 괜찮…아요?

 다희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여전히 담배 연기에다 손을 내젓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조금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탁자에 놓인 약병에서 한 줌을 쥐어 입안에 털어놓고는 심호흡을 했다.

 — 네. 괜찮습니다… 뭘 알고 싶은 겁니까?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비협조적이고 불친절해 보였지만, 그래도 제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에는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나는 남자에게 시선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 가장 궁금한 건 당신들의 행적이에요. 당신을 제외한 다른 손님들의 현 위치도, 우리가 찾고 있었고요. 당신이야 이렇게 우리가 만났지만 다른 이들은 조선 중기 이후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죠.

 — 그러니까, 내 주인들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다는 거군요.

 — 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죠?

 — 압니다. 두 사람은 내가 전해 들었고… 한 사람은 내가 직접 봤소.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자는 한숨을 흘리고는 담배 개비를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 둘은 죽었소.

 — 죽었다고요?

 이림이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남자는 더 설명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지만,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 한 분은 문반손님, 다른 한 분은 호반손님… 그렇게 둘이요. 호반손님은 내게 마마를 어떻게 운용하는지와 이를 전투에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이었소. 내겐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지. 임술년에 그분과 헤어졌소.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돌아가셨을 거요. 죽었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았으니…

 남자는 이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담배꽁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병실을 자욱하게 메웠다.

 — 문반손님은 내게 그저 평범한 사내로 살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태곳적 지식부터 단순한 암기법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셨지. 그분은 내게 삼촌 같으신 분이었소. 가모장께서 말씀하시길, 돌아가셨다고 하더이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소.

 — 그러면 각시손님은요?

 이림이 재촉했다. 그 옆에 앉은 다희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니, 뭔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심결에 아까 봤던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남자가 제압하고 있던 여자를… 동자가 뭐라고 불렀더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의 발치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 여기 계시잖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으레 태아가 그러하듯 몸을 둥글게 말고 잠에 빠져 있었다. 필경 아까의 주사는 진정제였으리라. 나는 다가가면서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막지 않았으므로 나는 더 가까이 갔다.

 — 어떻게 된 건가요?

 뒤따라 온 서율이 물었다.

 — …한 사건이 있었소.

 그리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꺼내기 싫은 이야기인 것처럼. 나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 등을 돌리고 있어 자세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각시손님은 칠흑 같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자세를 낮췄다. 각시손님에게는 뭔가 작용을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 보고 있으면 끌려가는 듯한…

 갑작스럽게 여자가 몸을 돌렸다. 그 탓에 각시손님의 얼굴이 보였다. 각시손님은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온몸에 퍼진 멍 자국과 타박상, 검게 변색된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놀람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남자를 쏘아보았다. 내가 당혹인지 책망인지, 어떤 감정을 담아 쏘아봤는지는 알지 못했다.

 — 가모장을 제압하려다 낸 상처는 아니오. 아까 말했던 그 사건… 그때 당한 것이지.

 그는 각시손님의 상처에 손을 얹었다.

 — …이리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직 회복하실 기미가 안 보이오. 이따금 난동을 부리시고, 그 외의 시간은 주무시거나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나는…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율과 나는 자리로 되돌아왔다. 남자는 각시손님의 침상을 다시 정돈한 후, 간이침대에 다시 앉았다.

 — 더 물어볼 것은 없소?

 — 있습니다. 그다음은… 아무래도 당신들이 운용했던 두술(痘術)의 정체겠죠. 현재 우리에겐 이에 대한 정보가 일절 없습니다. 아무래도 사르킥 혈술과 유사성을 띌 것 같은데요. 정확한 운용법과 효과, 그리고…

 나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온건한 어조로 이었다.

 — 무엇보다도 그 두술을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고 다녔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두술의 정체를 확정 짓기가 어려웠습니다.

 — 두술…이라.

 남자는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의 시야가 기억을 헤집는 듯 허공을 향했다.

 — 두술의 근원은 류 양, 당신이 말했듯 그 혈술, 육공예에서 비롯된 것이 옳을 거요. 내 주인께서는 낼캐교를 믿고 계셨었으니까요.

 그럼 그렇지. 나는 내심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칭찬했다. 예상이 맞았던 거야.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 흔히 낼캐 육공예가 그러하듯 두술 역시 신체를 변형시키고 질병의 힘을 다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마, 그러니까 천연두를 남에게 옮길 수 있었소. 뿐만 아니라… 천연두를 막을 수도 있었고.

 — 단순히 전염시키는 용도로만 쓴 게 아니라, 막기도 했단 말인가요?

 — 물론 우린 대체로 전염시키는 쪽이었지. 그걸 부인할 수는 없소.

 남자는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대한 그 어떠한 가치 판단도 않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에겐 정말 죄책감이란 것이 없었다. 나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남자의 말을 들었다.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게 내 주인의 영향 내에 있었단 겁니다. 그분이 그리 원하시면, 막을 수도 있었소. 하지만 막을 필요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워낙, 계획이 철두철미하신 분이라 원하는 곳 이상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지요.

 나는 순간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원하면… 막을 수도 있었다… 원하는 곳 이상… 서서히 어떤 어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병길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니 그도 어쩌면 나와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 …꼭 당신들이 역병에 대한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군요. 마치 역병이 퍼지는 정도, 지역, 시간까지의 모든 요소를 전부 사전에 정하고 퍼트린 것처럼…

 — 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웃지 않았다. 정말 순수한 의아함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아까 류 양이 말했지 않았습니까. 나보고, 학살범이라 하지 않았소.

 — …

 나는 말문이 막혀 남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아까 두술의 목적을 물었지.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오. 그분들은 변혁을 원했소.

 — 변혁이라뇨?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주저했다. 그의 시선은 잠시 침상 쪽을 향했다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남자의 주저는 곧 불안증으로 바뀌었다. 그는 어느새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나 공포스러운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듯. 남자의 얼굴에는 짜증과 불안, 그리고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형의 처벌자라도 목격한 듯 그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 난- 미안합니다. 조금… 힘들군요.

 — 말할 수 있겠어요?

 남자는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지 손바닥을 자꾸만 바지에 문질렀다. 의식 속 수렁이 다시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간절하게 비는 투로 중얼거렸다.

 — 난… 벗어났소. 그분께서 벗어나라고 명하셨으니 벗어났소. 괜찮습니다. 말할 수 있어요.

 나는 남자의 말이 조금씩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마치 공황 상태에 빠진 것마냥, 그의 숨소리는 점점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 질문이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장치를 건드린 것만 같았다.

 — 변혁… 변혁. 변혁이지. 스승님이 늘 말씀하신… 것 말요.

 남자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더니 불안한 듯 주위를 서성거렸다. 곧 약병에 손을 푹 집어넣고, 한 줌을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동안 피우지 않았던 담배도, 역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남자는 어딘가 버거워 보였다. 그 버거움이 무엇에 대한 버거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금세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에 놀랐다.

 —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요.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을 살면서 주위 인간들과 수도 없이 다투고 차별하며, 서로를 증오하지. 서로의 행위를 감싸 안을 수도 없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저 배척하고, 모멸감을 주며, 이 땅에 분노와 고통만을 안겨주는 것들. 그분들은 그걸 경계하셨소.

 — 당신의 주인들… 말입니까?

 내가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버거운지 넥타이를 조금 풀어내고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그가 다시 말을 잇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는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 그들은 고국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을 당하셨소. 늘 내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내게 늘 말씀하셨소. 내게 늘… 누구나 자유로이 살아갈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이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반복적으로 나스챠, 라는 낱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는 발작을 하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 그분들은 언제나… 언제나 역설하셨소! 누구든 외부의 간섭 없이 자기가 정한 그 올곧은 방향을 걸어야 진정한 삶이 아니겠느냐고! 심지가 유약한 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한때 위대했던 자들은 멸망을 맞았노라고! 그분들은 발열과 두통으로써 내게 말씀하셨소.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나던 그 순간에! 그 절바닥에서 내가 죽어갈 때!

 그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은 어느새 유령 같은 빛을 띄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 우리 부모가 나를 지키지 못할 때… 스승님들은 내 뇌를 녹이고 새살이 돋아나게끔 하였소… 그리고 새 생각 역시 불어넣어 주셨지… 내가 새 삶을 살 수 있게끔 말이오.

 — 이 사람 좀… 이상해요.

 서율이 기침을 하며 내게 불안한 듯 말을 걸었다. 나는 긴장을 쉽사리 숨기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 인간은 나약하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상체를 숙였고, 나는 그의 핏발 선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남자는 떨고 있었다.

 — 나약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이, 변혁을 이끌 이들이 그들에게 새 세상을 준다 해도 쉬이 받아들이지 않소. 되려 거부하지.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점점, 그는 외치기보단 속삭이고 있었다.

 — 탄압이 없는 사회, 좋은 말이지. 그러나 사회를 이루는 자들이 그 사회에 동조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탄압하지 않고, 모든 사상이 배척받지 않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심지가 강인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소?

 공기에 침묵이 깔렸다.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집중했다. 이 광인의 중언부언 같은 언어에 깊숙히 숨은 진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 두술이 그 수단이었던 겁니까?

 남자는 힘겹게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진정한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다시 간이 침상에 앉았다.

 — 지난날의 수많은 역병 창궐은 그런 이유에서 발발하였소. 우리는 그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이 땅 위를 배회하며 마마를 퍼트렸지… 우린 강인한 자들을 찾아야 했소.

 그의 입에서 연기가 흘러나왔다. 병길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그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안에는 분명히 아이와 노인도 있었을 겁니다. 선한 이들도 있었을 테고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남자는 병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침상 난간에 등을 기댔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내포된 감정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이 일어나긴 했소. 내가… 주인들께 항상 빌었지.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죽일 필요야 있겠느냐고… 하지만 나도 결국엔 이해했소. 개별적인 고통과 죽음과 절망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 내가 찾은 진리였지. 그 미약한 개념에 무너지면 우리 역시 나약해지리라 믿었소.

 그는 다시 웃더니 담배를 손바닥에 비벼 껐다.

 — 어떻게 생각할지 알고 있소. 하지만 괜찮소. 위선자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끝내 막지도 못한 자가 지껄이는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어찌 되었건 간에, 말했듯이 많이 들은 이야기니까.

 나는 이제 그 미소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가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이를 피한 이들도 분명 있었소. 산 자들, 마마를 겪고도 살아난 이들은 우리가 의도한 신세상(新世上)의 구성원으로 알맞은 자였지. 그들은 타자(他者)를 배척하지 않고도 제 형(形)을 유지할 수 있는 온당한 존재였소.

 — 당신은… 당신들은 그러니까 걸러냈다는 거군. 천연두로 기준에 맞지 않는 자들을 죽임으로써 적합자들을 남기려고…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 맞는 말이오. 각시손님께서는 그러한 존재 중 일부에게 직접 접촉하시어 두술을 가르치시기도 했소. 내가… 그 첫 번째였지.

 — 설화가 사실이었군요.

 — 무당들은 우릴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약병에서 다시 약을 한 줌 쥐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이제 약병에 쓰인 글을 볼 수 있었다. ‘갈앉을꽃 농축제’. 병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면서 약병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럼 어쩌겠소. 이미 다 스러져 버린 일일 뿐인데. 당신들이 이제 여기까지 추적해왔다고는 하나, 쓸모없는 일이오.

 — 무슨… 뜻입니까?

 남자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어떤 일을 해왔고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완연하게 드러내는 미소였다.

 — 이제 두술사는 없소.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 당신도 두술을 못 쓴단 말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기가 미약하게 남아 있는 그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약병에 손을 뻗었다가, 병이 비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 듯 혀를 차며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다른 담배 한 개비에 불이 타올랐다.

 — 두술이 나이를 먹으면 퇴화하는 종류의 술법인지는 몰랐는데…

 — 글쎄, 자세히는 나도 모르오. 나를 제외한 평범한 인간 출신 두술사는 다 자연의 도리에 따라 죽었소. 이제는 이에 대해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단 한 사람도.

 담뱃내가 자욱했다. 연달아 담배를 여러 개 피우는 그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다희가 벌떡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지만, 점점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고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담배에 무슨 성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연기를 맡고 있으면 맡고 있을수록 목이 따갑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의식에도 초점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저, 저기 아저씨.

 다희가 문쪽에 서서 조심스럽게 남자를 불렀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어딘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의 시선이 멍하니 다희 쪽을 향했다.

 — 그 담배… 도대체 뭘로 만든 거에요?

 남자는 조금 놀란 듯 다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 허 선생이 말하기를… 수라꽃이라 하더이다.

 다희의 얼굴이 굳었다.

 — 그걸 대체 왜 피우는 거에요!

 — 다희야, 그게 뭔데?

 서율이 물었다. 그 애는 입가를 감싸 쥐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느새 심해진 강도에 못 배겨나는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그러했다. 예전에는 그저 기침만 하는 정도였다면 점점 연기의 독성이 강해져, 지금은 눈물이 맺힐락 말락 하는 중이었다. 이림이 일어서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병실의 창문을 열어 재꼈다.

 — 정확히는 수라멸망악심꽃이에요. 이파리에 마약 성분이 있어서, 병원에서 아주 가끔 진통제로 쓴다고 들었는데…

 — 그런 걸 왜 음용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에게 독이 될 게 자명한데.

 — 나도 압니다. 하지만…

 남자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반도 타지 않은 담배 개비를 바닥에 던지고 밟았다.

 — 서천에 온 자들은 저마다 한 가지 독을 찾아 살아가오. 어떤 이들은 겹겹이 쌓인 사교의 층에 자신을 던지는 것으로 자신의 독을 삼고, 어떤 이들은 고급진 와인과 맥주, 샴페인으로 자신의 독을 삼소. 어떤 이들은 맛있는 요리로 삼을 수도 있겠지.

 남자는 멍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 내 독은 이거요. 수라꽃을 피우고 갈앉을꽃 농축정을 퍼먹는 것. 보기에는 퍽 딱할지 몰라도 내겐 아주 당연한 프로세스의 일부라고 할 수 있소. 그 덕에… 내 생각 뿐이긴 하지만, 두술 역시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 몸이 못 버텨서.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약이 다 떨어지고 담배마저 피우지 않자 남자는 갑자기 피곤해 보였다. 어딘가 두려워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의 얼굴은 막이 내린 연극의 주연배우 같았다. 이야기가 다 끝난 시간대의 인물.

 — 몸이 못 버텨서.

 그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그게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양.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맞소.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침상이 삐거덕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여자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난간을 붙잡는 그자의 팔뚝에 힘줄이 솟는 것이 보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공포가 솟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일어난 건가? 또 난동을 부리려고 하는 건가? 고개를 돌려보니 다들 불 보듯 뻔한 몸싸움에 몸을 피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림이 슬그머니 다희의 옆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그런 우리와는 다르게 아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몸을 틀어 각시손님을 바라보았다. 매우 안온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한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 가모장이시여,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듯 화답했다. 그러자 남자 역시 그 언어로 대답했다. 고대의 발음이 병실 안에서 굴절했다. 둘은 한참이나 조곤조곤히 대화를 나누었다. 각시손님은 아까 보았던 흉포한 그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순했고,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둥. 남자의 말에서 느껴졌던 사악한 사상가 질병조정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이건…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모르겠네.

 이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 그 일이 당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정신적인 손상도 입힌 모양이군 그래.

 나 역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띄엄띄엄 들려오던 대화가 끊겼다. 어느샌가 남자는 각시손님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웅얼거리자, 남자는 난처한 듯 우리를 슬쩍 보고는 다시 각시손님에게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고 짙은 음색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이림이 멍한 눈초리로 얼굴을 찡그렸다.

 — 좋아요. 어… 그러니까 우리가 인터뷰하러 온 천 년 묵은 역신이 노래를 부르고 있네. 진짜… 뭐지?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나 역시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각시손님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침상에 누워 잘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노래가 점점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여자의 옅은 숨소리가 채웠다. 곧 평화가 찾아왔다.

 일을 마친 남자가 조금은 겸연쩍은 눈빛으로 우리 쪽에 시선을 던졌다.

 — 요즈음에는 가모장께선… 나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함몰되어 살고 계시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그때가 그리우셨나 봅니다.

 그는 조금 쓸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어느 날엔 그분의 동생으로, 어느 날엔 문반손님으로, 어떤 날엔 호반손님으로 나를 보시오. 또 어떤 날엔, 날 그대로 나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닌 그때, 신라의 어느 부잣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아가던 시절, 혹은 조선반도를 부랴부랴 떠돌던 그 시절의 나로 보시죠. 의식을 되찾으신 이후로 한 번도 제정신을 되찾으신 적이 없소.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병실 한구석으로 가로질러 가,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들었다.

 — …당신들이 물어봤던 내 행적 말요. 미안하지만 내가 말하는 걸 듣는 것보다는 다른 경로를 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의 궤적을 쫓았다.

 —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 나는 늙었소. 모든 게 젊을 적 같지 않지. 따라서 당신들이 명쾌하게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코트를 걸치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 기록물에 의존하는 수밖에요.

 병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 기록물이… 있어요?

 — 예.

 나는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그 이야길 지금 해요?!

 내 외침에 남자는 간소하게 대답했다.

 — 안 물어봤잖소.

 맞다. 이런 작자였지.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례로 담뱃내와 약품 내음이 나는 병실에서 걸어나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병동의 1층에서, 예의 그 동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가 남자에게 반갑게 소리쳤다.

 — 반야 아저씨!

 그러더니, 뒤를 따라오는 나와 눈을 딱 맞추었다. 당황한 모양인지 녀석은 몸을 곧추세우더니, 격식을 차리려고 애쓰는 어조로 말했다.

 — …가 아니라, 1281호 손님.

 — 애쓰지 말어라. 괜찮다.

 남자의 말투는 어느새 또 바뀌어 있었다. 우리에게 보이던 무미건조한 말투와도, 각시손님에게 보이던 달래는 말투와도 또 달랐다. 이번엔 정말 어딘가,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투였다.

 — 방으로 가자. 1281호로.

 우리는 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은 손님의 방은 일출관의 5층에 자리해 있었다. 문은 낡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목재로, 상당히 윤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자주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그 전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281”. 동자는 호주머니에서 열쇠 조각을 꺼내 들어 문을 열었다.

 — 방을 정리도 안 하고 데리고 와서,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그의 말과는 다르게 방 안은 삼엄할 정도로 정돈된 편이었다. 유일하게 정리가 안 된 곳이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식탁이었으니, 어련할까. 식기의 배치와 서적의 정갈함, 침구의 정돈 정도는 흡사 결벽증 환자의 그것과도 유사해 보였다. 남자 혼자 사는 곳이라기엔 너무나도 휑하고 텅 비어 보이는 공간이었다.

 — 방 안에 거울이 없군요.

 내 말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런 걸 놔두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서.

 남자는 방 한켠에 놓인 노트북을 켜고 USB 하나를 꺼내더니, 삽입하고 무언가를 드래그했다. 곧 수백 개의 파일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 조금 걸릴 거요. 기기가 그리 좋지 않소.

 곧 그는 서가에서 한 낡은 책을 꺼냈다. 몇백 년은 된 듯, 예스럽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오랜 호기심이 나를 추동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책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반야집』(般野輯). 어딘가 낯익은 제목이었다.

 — 내가 그간 적은 나의 행적이요. 일기라고 보는 게 맞겠군. 지금 단자에 담고 있는 건 이 서책의 스캔본입니다.

 처음 손님네를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발견했던 자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서책의 제목에도 같은 글자가 들어갔다. 반야.

 — 잠깐, 혹시 『반야록』(般野錄)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남자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그걸 어찌 압니까? 그 책은 조선 초기에 들어서 추억 삼아 펴낸 책이었소. 전란 이후 모두 잃었는데.

 — 우리에겐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나왔거나 나올 모든 책을 소유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거든요. 환상적이죠, 특히 나 같은 사학자들에게는… 그렇다면 당신이 그 저자였군요.

 — 반야(般野)는 내 호요. 그 말을 그대의 입에서 들으니 퍽 놀랍소.

 화면이 깜빡거리며 모두 복사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가 노트북으로 걸어가 USB를 빼냈다. 내게로 돌아서는 남자의 안색은 어딘가 창백해 보였다. 그는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입을 다물곤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에는 한순간 보았던 힘이 들어간 눈매가 어려있었다. 이번에는 쉬이 흩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의 입가에 굳은 결심이 새겨져 있음을 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 한… 사내가 있었소.

 나는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까지 방을 둘러보거나 동자와 말하고 있던 다른 친구들 역시 입을 다물고 남자 쪽에 시선을 던졌다. 힘이 들어간 남자의 목소리는 주변 소리를 흡수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 그는 머나먼 땅에서 온 이방인들의 제자였으며 수행원이었지. 이방인들은 사내를 긴 시간 동안 교육시켰고, 그 교육은 사내의 내면에 한 신념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소. 그 신념에 따라,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죄의식 없이 사람들을 학살했소. 그자의 관념은 한 곳을 조준하고 있었고 그 믿음에 흔들림은 없었소. 마침내 시간이 흘러 그의 스승들이 하나둘 떠나가도, 조국이 망한 뒤 국가가 두 번이나 바뀌었어도 이어졌지. 아주 지독한 목적이었소. 사내는 정말 독실자였던 거요… 어느 께까지는.

 남자는 이전보다는 좀 더 차분한 목소리로 회상했다. 나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는 흐릿한 담배 내음, 고서적 냄새와 향긋한 탈취제 냄새가 났다. 그런 분위기에서 듣는 옛날이야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남자는 아까처럼 흥분하지 않고, 느릿한 톤을 유지했다. 학살과 믿음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는 전처럼 입가가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 사내는 어떤 계기로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게 되었소. 떠나간 스승 중 둘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소. 이미 조국은 천 년 전에 망한 터, 그를 고향 땅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소.

 남자는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그러나 기회의 땅이라던 그 나라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소. 낙후된 국가에서 온 동양인은 어딜 가나 천대받았소. 조롱받고, 얻어맞았소. 그에게는 필경 끔찍한 나날이었을 거요.
  그러나 사내는 바로 그 불친절한 땅에서 결국 기회를 붙잡았고, 어느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소. 사내는 행복했소. 사랑, 수백 년 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신념과는 정면으로 대척되는 행위였지만 그는 더이상 신경 쓰지 않았소. 한 인간의 존재라는 그 미약한 개념은 어느새 광대한 현상이 되어 있었으니까. 사내는… 나약해졌던 거요. 그리고 그 나약함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

 남자의 눈빛은 꿈을 꾸듯 몽롱해져 있었다.

 — 참… 행복했을 거요. 그렇지 않소?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 사내는 바로 그 여인을 잃고 조국으로 돌아왔소.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모습은, 상당히 암담했지. 그의 시야에 고향을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이미 자정작용을 잃은 국가일 뿐이었소. 그가 수백 년 간 지향해오던 신념, 그리고 연인이 죽은 뒤로 다시 공교해져 버린 그 신념을 시행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한 거요. 그래서…

 남자는 말을 멈추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사내는 바로 옆 나라에 기대어 보기로 하였소. 옆 나라 이름을 쓰고 그곳을 제2의 조국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소. 원래부터 교류가 있었던 나라며, 그곳에서 살아본 적도 있으니 거부감은 많지 않았소. 사내는 그 나라가 그가 바라던 최후의 초상국가로 변모케 할 수 있으리라 믿었소. 그래서… 그래서 참 다양한 짓을 했지. 그 다양한 짓에는 제 고향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짓도 있었고.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USB를 쥐었다. 씁쓸한 표정은 온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방을 느릿느릿 가로질러 가 동자의 옆에 앉았다. 아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 …그러던 어느 날에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고향의 백성이 한데 모여 자유를 부르짖기 시작한 거요. 고향의 모든 땅이 흔들렸소. 뜻있는 자들이 거리로 나왔지.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많은 회한의 기운이 그의 시선 위에 얹혔다가 사라져갔다.

 — 사내의 새로운 조국은 그들에게 총을 쏘고, 칼로 베었소. 끌고 가 형무소에 가뒀으며, 고문했고.

 남자는 용서를 구하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만약 사내가 이국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아무런 경험도 없이, 한 인간이 얼마나 거대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 몰랐더라면… 그는 아무렇지 않았을 거요. 죽음은 항상 미약한 것이었으니까. 사람이 얼마가 죽던, 상관 없었을 거요.
  그러나 사내는 그렇지 않았소. 끝내 잊어보려고 했던 그 기억들에서, 한 여인을 만나 느꼈던 그 모든 감정에서…그리고 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생명에서 사내는 존재의 거대함을 알게 되었던 거요. 그는… 이미 한 번 가르침을 어겼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

 남자의 숨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남자는 옛 기억이 돌아 온 듯, 울적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거리에서 비명 지르는 모든 여인네의 얼굴이 사내의 연인으로 보이더이다. 기억도 희미해졌을 그의 어머니의 얼굴 역시, 뭇 노인들의 얼굴 위에 덧씌워졌소. 놀라 비명 지르는 노인장의 얼굴은 스승 중 한 사람의 모습인 것만 같았고… 아이. 거기서 죽은 아이들은… 마치 그 사내의 아이가 죽은 것만큼 고통스러운 광경이었소. 그를 떠나간 모두가 그곳에 있었소. 가장 목격하기 싫은 모습으로.
 사내는 평생을 기피해왔던 그것, 개별성이자 동시에 보편성인 개념에 무너진 거요. 완전히 패배한 거지.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도, 제 신념을 지키는 것도… 전부.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소.

 그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왠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나는 그가 영영 손에 제 얼굴을 파묻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우물쭈물 댔다.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너무 작은 목소리라,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그런 말이었다.

 — 나는 이자메아였소.

 —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나는 간신히 말했다. 남자는 그 자신의 기억에 함몰되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각시손님과 남자의 증세가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제정신인 시간이 조금 더 많은 것뿐이었다. 둘은 서로를 분명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갈대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율이 내 쪽으로 와서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래서… 우리 대장님을 안 건가요? 적이라서?

 — 그건 아니오. 그 해 말에 나는 이자메아를 나왔소. 그다음부턴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속죄를 하려고 애썼지. 그 바람에 율도로 끌려가서 노역하고, 도망자 신세를 몇 년간 졌지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다른 기억이 순식간에 밀려들어 오는 듯, 그는 다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그가 늙어 보였다. 흙색 방 안에 한 늙은 남자. 자신이 저지른 짓에 무너져버린 한 노인.

 — 우리한테 이 모든 걸 알려주는 이유가 뭡니까?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맞췄다. 힘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린 그의 시선은 찌르는 듯했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잘 모르는 것만 같았다. 잠시 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글쎄요.

 그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이 그런 축 처진 미소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 어쩌면 고해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이내 내게 USB를 넘겨주었다. 꽉 쥐고 있어서 그런지 USB는 꽤 뜨거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자는 벌써 문간에 서서 나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손을 대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 살펴 가시오. 박 양에게 안부 전해주고.

 — 건강하길 바라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화답했다. 나는 그대로 나가려다가, 혹시 모른단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 혹여, 나중에 다시 찾아뵈어도 괜찮겠습니까?

 — 상관… 없습니다. 기별하십시오. 채비를 해야 할 테니.

 나는 만족스럽게 등을 돌렸다. 두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앞으로도 이 자는 귀중한 사료가 될 터였다. 그렇다면 요컨데 ‘전속 계약’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류 양.

 — 아, 네. 무슨 일인가요.

 — 내 행적을 찾으시려면 지금까지 찾던 키워드로는 찾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대신 다른 낱말을 넣는 게 좋을 듯한데…

 — 어떤 것 말입니까?

 — 라자루스 바누야트 “짐피” 첸Lazarus Vanuuyart “Zympy” Chen, 그리고… 카타누이 한노方縫 般野.


 서천객은 올 때나 갈 때나 똑같이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나는 서천객의 깃털을 붙잡고 몸을 숙였다. 부드러운 이착륙은 서천객 특유의 비행인 것 같았다. 귓가에 시원한 바람 소리가 스쳤다. 저 멀리서 제주 별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 오래 떠나 있지 않았음에도 심하게 반가웠다. 모든 게 이전과도 같았다. 바람, 수풀, 건물, 아까 기다리고 있던 앞마당, 연기가 타오르고 있는 뒷마당…

 연기?

 서천객은 우리를 내려주고 후다닥 날아갔다. 아무래도 다른 손님들이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연기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짐을 챙긴답시고 별장 안 쪽으로 들어간 병길과 림을 제외한, 다희와 율과 함께였다. 다희가 점점 심해지는 연기에 기침을 했다.

 — 아, 진짜. 이제 연기는 진절머리가 나요.

 — 진짜 동감이다. 이거 뭘까요?

 — 내 생각엔 이거 느이 대장인데.

 — 에이, 그래도 대장님이 화난다고 숲에 불을 지르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요…

 율이 미심쩍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달리 누가 있을까.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연기 냄새와 함께 고기를 굽는 듯한 냄새가 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뒷마당 공터로 나갔을 때 익숙한 꽁지머리와 모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있던 서율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말했지.

 서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바로 그대로 시야만 내게로 옮겼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 치고는 호야에게로 걸어갔다. 호야는 우리가 온 것도 모른 건지 계속 뭔가를 굽고만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 깃털이 왕창 흩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까마귀인 것 같았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 까마귀 고기를 진짜로 자셨네.

 호야는 내 쪽을 홱 돌아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천연덕스럽게 들고 있던 닭다리, 아니, 까마귀 다리를 건넸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맛대가리 없는 걸 왜 먹고 있는 거야.

 — 좋아할 줄 알았는데.

 — 자네 그거 편견이야. 내가 아무리 하나라의 후손인 뱀인간이래도-

 이제는 호야의 얼굴에도 똑같은 표정이 나타났다.

 — 뭔 소리야. 너 저번에 고기 먹는대니까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제일 많이 먹었잖아.

 아. 나는 혀로 어금니를 훑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사줄 때 많이 먹어둬야지.

 — 왜… 까마귀를 구워 드시고 계세요?

 서율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비꼬거나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기보다는 정말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찬 질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우리 둘이 동시에 호야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 서천객인지 표적 고객인지, 그 새끼들이 생각나서 구워봤지. 왜, 율이 너도 주랴?

 — 됐어요…

 — 하여간에, 그 작은 손님이라는 작자는 만나봤어?

 — 응. 널 알던데.

 호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나를 왜 알아?

 — 김철현이라는 이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 호야?

 호야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는 실소를 흘리며 까마귀 다리를 모닥불에 던졌다. 화악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너울거렸다.

 — 엉. 들어본 적이야 있지. 조선인 주제에 일본 초상기관을 바리바리 돌아다닌 작자. 1900년대 중후반부터 판에 모습을 드러냈던 인사야. 이자메아였지만, 보전원 출신들처럼 이자메아 직행 루트를 탄 것이 아니라 수집원 거쳐서 이자메아로 간 작자였어. 그 양반이 거기 있더냐?

 — 네…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 여유도 있구만. 그래… 원하는 건 다 찾아냈고?

 — 응. 당사자의 증언과 기록물을 얻어냈거든.

 나는 자랑스럽게 USB를 들어 보였다. 호야는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잘했네. 슬슬 가지. 참, 희지한테서 연락 왔었어. 전화해봐. 할 말 있다던데.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곧 홍희지라는 이름이 화면 창에 떴다. 착신음이 얼마 동안 울리다가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되었다.

 — 원시?

 — 홍 서기! 무슨 일인데 그러나?

 — 아, 방금 학술회가 끝났거든요. 결과가 얼추 갈무리되어서,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요. 서천에는 전파가 안 통하나 보죠?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 진짜 안 통하는 걸 어떡해. 화내지 말게.

 — 지금 돌아가기 전에 잠시 청대장의 손 인원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 사람들, 생각보다 두술사에 대한 정보를 꽤 많이 알고 있었어요.

 — 여기서 만난 작은 손님이 이상사례조사국에서 일했단 말을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 아, 정말요? 그쪽으로도 연결성이 짙구나… 알고 보니 일본 내부에서는 자체적으로 두술가 계통의 가문이 존재하더군요. 오오에야마 씨가 자세히 말씀해주셨어요. 카타누이(方縫) 가로, 수집원에서 꾸준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문이라고 하더라고요.

 — 손님네가 한반도만 돌아다닌 모양은 아닌가 보네.

 — 특기할 사항은 수집원 연의관 중 한 사람이었던 카타누이 후미코(方縫 文子)라는 이에 대한 기록인데요. 이 사람의 집에 조선에서 온 두술사가 드나들었다는 언급이 있어 이쪽을 파보면 좋을 것 같네요.

 — 어쩌면… 천연두라는 카테고리에 집중했더라면 어쩌면 더 큰 건을 물 수도 있었겠다. 조금 아쉽구만그래. 학인들은 뭐라고 그래?

 — 그게… 문제에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학술회에서는 그 책, 『세을가기』에 대한 부분이 쟁점이 되었는데요. 이제 논란되었던 부분은 거의 명확해졌다고 봐도 되겠어요. 해석도 거의 다 완료되었고요. 문제는 『세을가기』와 처용의 정체가… 당초 생각하셨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 무슨 일인데 그래.

 희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던, 믿고 있던 법칙에 의문이 생길 때처럼 불안한 기분이 감돌았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르시겠죠. 상세는 곧 뵈어서 말씀드릴게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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