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밤

운명은 안개만큼이나 서서히, 또 강력하게 다가온다.

분명히 이 날 이전까지는 그닥 크지 않았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러했다. 언제나 운명은 정말 그 자체로 어떤 변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나를 빗겨나갔다. 내 천년의 삶에서 큰 사건이라곤 오직 한 왕조의 몰락과 생성, 민초들의 삶과 죽음들, 이러한 것들밖엔 없었다. 그것마저도 내가 겪은 일이 아닌 그저, 관음했을 뿐이라는 것이 걸리긴 하나 내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차피 누군가의 인생은 영원히 상대방에게 타자화된 모습으로 나타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 타자성을 극대화시켰을 뿐이다.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나는 그저 관객이자 구경꾼, 방관자였다.

나는 운명에 피격당한 이들을 동정했다. 나는 병신년에 전쟁이 휩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운명이란 놈이 어떤 기질을 가졌는지 알았다. 진정으로 놈은 끔찍했고 또 자애로웠다. 해변의 모래에 가득 덮여 움직임을 멈춘 목 잘린 시체들은 진실로 참혹했고 고단했다. 뇌리에 일순간 그 시체들의 귀가가 떠올랐다. 머리가 잘려, 어깨가 잘려, 허리가 베어져 집에 질질 기어가는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를 그 몸이 참으로 애잔했다. 혹은, 바다 저 멀리에서 수많은 생선들의 일부가 되어가리라. 죽을 때 무서웠을 것이다. 무서웠으므로, 더욱 제 운명을 한탄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조선을 뒤덮었던 운명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무자비하게 제 걸음을 재촉하는 무정형의, 어떤 존재. 그때 나는 전쟁을 겪으면서도 전쟁을 겪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꾸만 이 운명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 끔찍한 존재에게 당한 모든 이들에게 울음같은 동정심을 느꼈다. 그 동정심에는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깔려있었음이 확연했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지극히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정서헌과 김신척, 최우비가 찾아온 때는 해가 서서히 물 쪽으로 떨어질 시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안개는 일지 않았다. 종 막지가 셋이 온 것을 알렸다. 나는 한때 김뭄이 앉아있던 마루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옷을 추스르고 대문 쪽으로 거닐자 익숙한 얼굴들에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낡은 소창의와 흑립이 눈에 들어왔다. 낡지만 단정한 옷차림의 주인공은 능글맞은 웃음을 입에 매달고 있었다. 그 옆의 웬 산적은 상태가 영 심했는데, 아주 작정을 하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특히 그놈의 수염은 민지 몇 해는 지난 듯싶었다. 그나마 형식을 갖춰 쓴 패랭이와 포가 격식을 갖추려는 시도는 했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마지막의 여인은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잘 차려입은 인물이었다. 일을 하다 왔는지 남자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각자의 시선은 각자의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자가 봐도 한 눈에 서로가 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들을 익히 잘 알았다. 정서헌은 무진에 본을 두고 있는 젊은 양반이었다. 몰락하여 한성으로 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서헌의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를 알고 지낸 다음부터는 쭉 친분을 유지해온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녀석이 기기 시작할 때부터 봐와, 이곳 무진서는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내 변하지 않는 용모에 놀라지 않을만 할텐데도 매번 놀라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당장에 제 할아버지가 양생술을 할 줄 알면서도, 거참. 김신척은 도사로, 한울산에 암자를 하나 짓고 살고 있었다. 장날에나 마을에 얼굴을 비추곤 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런 시기에 이렇게 내려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우비는 안개쟁이패의 마리꾼이었다. 패를 통솔하면서 몇 달은 전국을 유랑하고 다녔다. 아무래도 지금은 고향에 내려온 모양이었는데, 역시 내 집 대문 앞에 떡하니 나타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무슨 일인가?

서헌이 무언갈 말하려다 옆의 두 사람을 흘낏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보이고는 들어가자고 고갯짓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세 사람을 안으로 인도했다. 와중에도 서헌은 특유의 수다스러움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 숙부님께서는 여실히 젊소. 막 상투를 튼 어린애 같기도 하고, 결혼도 안 한 총각같기도 하니. 아, 결혼은 안 하셨구려.

— 그놈 말 많구나.

나는 흔히 하던데로 사랑채로 들어가려했으나 갑자기 서헌이 내 소매를 붙잡고는 눈짓했다. 그곳으로 가지 말라는 듯싶었다. 두번째 어리둥절.

— 어디로 가란 말이냐? 당연히 사랑채로 가야함이 옳거늘…

— 아이고 숙부님, 왜 우리 좋은 곳 알잖습디까.

그러면서 녀석은 고개로 광을 가리켰다.

저무는 해가 바다로 넘실 넘어가자 안개 속 세상이 불타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안개와 함께 뭍으로 밀려오면 저 먼 마을에서 들려오는 악소리와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고나면 목측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저 먼 바다에서 파도가 뒤따라 온 세상을 다시 지웠다.

무진의 나날은 언제나 그러했다. 언제나 바닷내와 안개의 내음이 진동하는 곳에선 그러한 풍경이 존재했다. 안개 사이서 희미하게 보이는 세상은 진정으로 현실의 것과 동떨어졌다. 이를테면, 저기 보이는 푸른 한울산은 어느새 개립(蓋笠)으로, 민가는 그저 유건이 일그러진 형상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다. 흰 연기같은 안개가 거리를 휘감으면 언제나, 거리 위는 정해진 것들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안개는 묘한 힘이 있다. 묘한 힘이 있다고, 어머니께, 아버지께, 마을의 모든 어른들께 저 먼 옛날부터 한번씩은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떤 진리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거칠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안개는 생각보다 붉었다. 그 붉음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안개는 안개 그 자체로도 존재할 수 있음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다름이 내게 충실한 아군이 될 것이라고 주인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함께 나를 이곳 안개나루로 되돌려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지극히 인간적인 나의 내면은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오로지 내 조잡한 정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들여야 존재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과정에 입각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안개와 살아왔음에도 안개를 싫어했다.

그러나 안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