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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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는 그런 거 잘 느끼지 못하겠어. 인권이란 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거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평가해서 다른 사람이 부여하는 게 아니거든."

"그렇다고 살인자나 강간범같은 사람들과 저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서 그 사람들과 같은 평가를 받는건데요?"

"같은 생명을 공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도 보장이라는게 있어야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보다 잘나서 대기업 회장이 된 사람들은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되면 우리보다 우선시되어 구조되는게 당연시되어야 하는 게 맞는 일일까?"

윤리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교단에 선 선생님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례 시간을 이미 5분 깎아먹고 있었다.

"당연히 다르죠. 사람마다 자기 목숨을 대하는게 다 다른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 목숨과 인생을 더욱 아낄 수 밖에 없으니 그 권리도 당연히 주어져야죠. 세상엔 자기 목숨 낭비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글쎄,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엔 겉보기엔 정말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이라던지, 긍지라던지, 자존심이라던지. 소년 만화에서나 나오는 전개로 많은 사람이 살고 죽는 이야기는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가상이든, 실제든.

"하아……"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이를 테면, 저 맨 앞의 문을 열고 담임 선생님이 한 소녀, 또는 소년과 함께 들어선다. 판에 박힌 전학생의 등장. 하필 비어있던 주인공의 옆자리에 전학생은 앉고, 사실 큰 기관에 소속된 전학생은 오늘도 거대한 괴물들을 잡으러 떠나고 주인공은 그 일에 휘말리며, 결국 전학생과 함께 세계를 구해낸다……

그와 대조적으로, 평범한 이 교실, 어디에나 있는 이 학생들과 더불어, 언젠간 끝날 저 토론을 듣고,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잔 뒤, 다시 시작되는 일상 속에서 정해진 미래와 이루어지지 않는 망상을 품으며 살아가는 삶……

"부럽다……"

"응? 한일아 뭐라고 했어?"

멍 하니 한일이 중얼거린 소리를 듣고 옆자리에 앉은 반 친구가 물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한일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에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자자, 진도는 다음시간에 더 나가고, 더 궁금한게 있으면 교무실 와서 물어봐라. 그럼."

윤리 선생님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고, 맨 앞의 녀석은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를 옆자리에 나불거렸다. 주위에서 들리지 않게 중2병이니, 또라이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일은 진저리를 치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담임 아직 안 왔는데?"

"먼저 갈 일 있어서. 선생님 오시면 나 먼저 간다고 얘기해줘."

"야, 5분만 기다리면 올 텐데 뭐하러 일찍 가? 너 그러면 조퇴된다?"

친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리자, 한일은 짧게 대답했다.

"그럼 그냥 조퇴하지 뭐."

"어? 야, 진짜 가?"

"진짜 가."

한일은 가방을 어깨에 훌쩍 매고 교실문을 나섰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복도는 막 하교하려는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진짜 한 번 가보는구나."


전날 내린 눈 때문인지, 인도는 새하얀 눈이 단단히 얼어붙었고 차도는 검은 흙탕물을 튕기며 조심스럽게 기어가는 차들로 범벅이었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간판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가득한 도시는 고요함과 평온함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훨씬 낫네. 교실보다."

한일은 진저리를 치며 교복의 웃옷을 단단히 여몄다. 교실은 머리가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름과 겨울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 지는 것 같았다.

"특히 시험이 끝나면 그렇지."

한일은 주머니의 성적표를 부스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그의 성적은 잘 나왔다. 이거하랴 저거하랴 공부할 시간이 없었는데도, 중상위권 이상은 간단히 넘겨 집에 돌아가면 기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응?"

갑자기 울린 휴대전화를 받자 담임 선생의 화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어디야? 종례도 안 하고 어디 갔어?"

"아…… 선생님, 오늘 아침에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오늘 급한 집안일 있어서 먼저 간다고요."

"무슨 급한 일? 어머니한테 전화드려도 받지 않으시고,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냥 나간거야? 당장 돌아와서 확인 받고 가!"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한일은 곧바로 돌아간다고 했다. 끊긴 전화가 울리는 와중에도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지 못하고 한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택시타고 가야겠네."

한일이 서있는 사거리는 자동차로 꽉 막힌 상태였다. 모두들 어디로 가는지 마치 귀성길 고속도로처럼 좁은 사차선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때마침 한일의 앞에 노란색의 택시가 기어들듯 멈춰섰다. 뒷좌석의 문을 열고 타려고 하자, 뒤에서 대학생 두명이 신기해하며 꺅꺅거렸다.

"우와, 노란색 택시 나 처음 봐."

"그러게. 서울에도 이런 택시가 있었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문을 닫아 차단하며 한일은 핸들에 엎드려있는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저기, 길현중학교 가주세요."

"……"

"……길현중학교 안가요?"

기사는 아무런 대답없이 엎드린 채로 눈만 들어 앞을 보고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눈만 형형히 빛나는 남자는 며칠 간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턱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뭐라고 물으면 대답이나 하,"

벌컥

"아저씨, 소피아호텔 앞으로 가주세요. 아, 아니지, 일단 빨리 남향상가로 달려주세요, 빨리요!"

갑자기 조수석의 문이 열리더니 왠 여자아이 한 명이 들이닥쳤다. 검은 코트에 도톰한 털목도리를 목에 휘감아 있고, 그 위에 코트보다도 검은 머리결이 어지럽게 얹혀져 있었다.

"저기요, 제가 먼저 탔는……"

하지만 택시는 소녀의 말을 듣자마자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 꼬리를 물며 걸터 앉은 택시는 힘겹게 차 사이를 비집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안전벨트를 끼우던 앞의 소녀도 한일을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소리질렀다.

"넌 뭐야! 왜 타고 있어?!"

"저기, 내가 먼저 탔어,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려고!"

"알 바야, 빨리 내려! 이건 다른 사람이 타라고 있는……"

갑자기 택시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꺾이는 바람에 한일은 반바퀴 구르듯 뒹굴었다. 간신히 신호등에 걸린 택시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한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전운전 안해요! 내가 진짜, 더러워서 내린다!"

그러나 한일이 손잡이를 잡자마자, 택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빨간불인 가운데, 택시는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택시의 문이 잠겼다. 그와 동시에 기사는 소녀를 느릿하게 돌아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가는 게 30분 빠릅니다."

그와 동시에, 택시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으아아악?!"

거리의 다른 자동차의 세배는 되는 듯한 속도로 달렸다. 주변 풍경이 어지러운 물감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난생 처음 느끼는 속도감에 한일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질렀다.

"멈춰! 뭐하는 짓이야!"

간신히 눈을 떠 앞을 보니 기사는 턱을 긁적이며 노곤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반면 소녀는 의자 등받이에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비죽 튀어나온 왼손은 의자를 질끈 쥐고 있었다.

택시가 도로를 따라 주욱 오른쪽으로 꺾자, 이번엔 아예 자리에서 한바퀴 굴렀다.

"아파! 젠장, 등이 너무 아파!"

"안전벨트를 꼭 착용해주세요, 손님."

"안전벨트가 문제야, 이 인간아!"

그러면서도 한일의 몸은 뒷자석의 벨트를 더듬고 있었다. 왼쪽의 벨트를 다급히 당기자, 벨트는 짧게 나오곤 그자리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잠…… 잠깐만요! 윽, 기다려! 저기요!"

직선 도로에서 숨을 고르곤 의자에 기대다시피 하며 벨트를 당기자 안전벨트는 앞으로 주욱 튀어나왔다. 막 앞으로 돌아 벨트를 꽂으려 하던 한일의 눈에 뒷유리를 통해 따라 붙은 세 대의 검은색 밴이 보였다.

"뭐야뭐야뭐야, 경찰같은 것도 붙었잖아, 어쩔거에요! 이봐요!"

간신히 벨트를 꽂자마자 도로가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갔고, 압박하며 조이는 안전벨트에 한일의 숨과 입이 턱 막혔다. 기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소녀는 창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뚫어져라 앞만 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대체!'

뒤를 슬쩍 보니 검은 밴은 닿을듯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보통 도로에서의 속도가 도저히 아니었다.

"이봐요! 지금 뒤에서 바로 쫓아다니고 있는데, 저건 어떡할 거에요?"

기사는 슬쩍 백미러로 뒤를 확인하더니,

속도를 더 높였다.

"……!"

한일은 단단히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마치 레이싱 코스처럼 굴곡이 심한 길을 택시와 밴 세대가 질주했다.

"어이쿠, 길 잘못 들었네."

그 한마디와 함께 기사는 있는 힘껏 핸들을 돌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좁은길로 쑥 들어간 택시는 가드레일에 아슬아슬하게 닿으며 2차선 도로를 따라 달렸다.

"악! 앞에 승용차!"

한일이 소리지르자마자 택시는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도로를 달렸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경적소리를 뒤로 하고 택시는 다시 좌회전을 감행했다. 오른쪽 유리로 경찰서에서 막 나온 경찰들의 얼빠진 얼굴들이 힐끗 보이고 사라졌다.

"산길…… 산길이잖아요! 속도 줄여요!"

울렁거리며 튀어나오려는 속을 억지로 누르며 한일은 이를 악물었다. 택시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경사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주택가 대신 나무만이 점점 듬성듬성 나타났고, 다시 택시가 방향을 틀자 이번엔 완전한 골목길이 나타났다.

'멈출 수 밖에 없어, 이젠! 이런 골목길이면 반드시 주택가라 막힌 길이 나와!'

한일의 생각과는 달리 골목길은 구불구불 계속 이어졌다. 믿기기 않는 속도로 그 굽은 도로를 따라 달리던 택시 밑은 어느새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로 바뀌어졌다. 심하게 요동치는 택시 안에서 출발한지 처음으로 소녀가 외쳤다.

"저기요! 저기 회색 건물에 세워 주세요!"

눈앞에 짓다만 것처럼 보이는 회색 건물의 골격이 눈에 들어왔다. 철골 시공과 콘크리트 마무리까지만 하고 창문 하나 달려있지 않은 10층 정도의 황량한 건물 앞에 택시는 멈춰섰다. 한동안 속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한일에게 하고 전자음이 들렸다. 기사가 미터기를 누르며 짧게 말했다.

"만 이백원입니다."

그걸 계산하고 있었어?! 한일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소녀는 주머니에서 만원 두 장을 꺼내 기사가 편 손에 턱 올려놓고 곧장 나가버렸다. 멍 하니 기사가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걸 보던 한일은 퍼득 정신을 차리고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를 보니 밴들은 좁은 길의 입구에 걸려 전과 같은 속도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일은 갈팡질팡하다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간 소녀를 따라 달렸다.

"야! 잠깐, 거기 서 봐!"

건물의 입구 비슷한 곳에 들어서자 어두침침한 계단이 나타났다. 안은 시멘트 가루며 자루, 삽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바닥엔 비닐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눈 앞에 계단을 총총히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 한일은 계단 손잡이 사이를 올려다보았다. 소녀는 벌써 사층 정도 앞서 올라가고 있었다.

"잠깐만!"

소녀를 따라 꽤나 높이가 높은 계단을 올랐다. 한참을 올라가자,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한일은 눈앞에 단단한 철문이 놓여있는 걸 보게 되었다. 긴장하며 둥그런 문 손잡이를 잡아보니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한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잡이를 돌렸다. 쇠 마찰 소리와 함께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디디자 마자, 갑자기 네모낳게 구멍난 천장에서 누군가 덮쳐들어왔다. 명치에 둔탁한 타격을 입은 한일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뒤로 넘어가버렸다. 그대로 올라온 계단을 구르려는 한일의 목덜미를 억센 손아귀가 단단히 붙들었다.

"읏차-. 응? 얜 뭐야?"

콜록거리며 심하게 기침하는 한일을 놓아준 괴한이 중얼거렸다. 한일이 고개를 살짝 들어 위를 보니 장신의 청년이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그냥 멋 모르고 따라들어온 건가? 괜찮아?"

괜찮을리가 있냐, 고 속으로 중얼거린 한일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한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미안하다, 워낙 지금 긴장한 상태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때려버렸네. 어이, 서희야! 이런 애도 붙여 왔다고 얘기를 하지 그랬냐!"

그때 중앙에 선 네모난 기둥 뒤에서 한일이 뒤따라온 소녀가 살짝 고개를 빼고 한일을 쳐다보았다. 순간 울컥한 한일은 배의 복통을 무시하고 소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쳤다.

"너 뭐야! 이 이상한 곳이랑 사람은 뭐고! 당장 설명해!"

"자자,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진정하고, 일단 저 여자애 옆에 서서 숨어 있어. 밑에 진짜가 올라온다."

손가락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틀어막힌 한일의 귀에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등을 타고 쭉 흐르는 것을 느낀 한일은 소녀가 숨은 기둥 뒤로 들어갔다. 한일이 다가와서자 소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다.

"자, 그럼 갔다 온다."

남자는 손을 흔들더니 계단 쪽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차가운 정적이 건물 안에 가득했다.

기둥 뒤에 서니 건물 안이 잘 보였다. 이제보니 확 트인 넓은 공간이었다. 자세히보니 부서지다만 돌덩이나 비죽이 튀어나온 쇠막대기 등, 곳곳에 벽이 무너져내린 흔적이 보였다. 원래는 하나의 큰 맨션 건물이었던 듯 해보이기도 했다.

바로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소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창문이었을 네모난 구멍을 통해 밖을 보았다. 한일도 따라 나가보니 세 대의 밴이 입구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한일과 소녀가 타고 온 택시는 온데간데 없었다.

푸쉬쉬쉬-

갑자기 1층과 2층 정도에서 하얀 김이 풍겨져나왔다. 밥솥같은 소리를 내며 새어나온 김은 바람을 타고 한일과 소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고소한 콩 냄새가 나는 김은 이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 뒤로 나와."

"뭐? 뭐?"

소녀가 옷깃을 잡고 잡아당겨 한일은 뒷걸음질쳤다. 소녀는 어느정도 침착을 되찾았는지 담담한 얼굴로 문을 쳐다보았다.

덜컥

"아, 이거. 요즘 애들은 더 독하다니까. 요원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키고 있는 거야."

문이 열려 한일은 펄쩍 뛰었으나,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방금 전에 본 남자였다. 겁도 없이 소녀는 남자에게 한 발 다가가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으으음, 이 건물의 변칙 특성을 일시적으로 살려냈어. 지금쯤 밑의 요원들은 같은 복도를 계속 돌면서 헤메고 있을거야. 거기다 그…… '찰리의 톡 쏘는 콩요리'? 인지 뭔지를 뿌려두고 왔어. 지금껏 모아온 양 전부."

남자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면서 창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은빛 지포라이터를 꺼내 든 남자는 한일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학생. 잠깐 이리와 봐."

경계하던 한일이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라이터의 불꽃이 일렁이게 흔들었다.

"찰리의 톡 쏘는 콩요리가 뭔지 알아?"

"……몰라요."

"찰리의 식당이란 곳에서 팔던 콩요리야. 칠리 소스가 제대로 버무려진 콩요린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다더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남자가 뜸을 들이는 사이, 불꽃 주변으로 날아든 하얀 김이 불꽃 주변에서 타닥거리며 작은 불똥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 콩요리의 재료인 콩을 갈아서 허공에 뿌리면, 그 콩의 양이든 대기의 수분 양이든 상관없이 니트로글리세린과 같은 폭발력의 폭발이 가능한 대기 환경이 조성돼. 단, 이 콩으로 터지는 분진폭발은 실제론 아무런 발화효과가 없고, 단지 커다란 소리만이 일어나서 짜증날 뿐이야."

남자의 손에서 라이터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라이터는 빙글빙글 돌면서 작아지더니, 이내 작은 불빛이 되어 하얀 김 사이로 사라졌다.

"그게 바로 옆에서 터지면 얘기가 다르지만."

콰아앙!

엄청난 굉음에 건물 전체가 마구 뒤흔들렸다. 한일은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는 그런 한일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싱긋 웃었다.

"안심해, 누구도 죽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한일이 밖을 내다보자 그렇게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도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던 한일은 식은땀이 목 뒤를 흐르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와서 묻는 것도 웃기지만,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일을 태연하게 벌이고. 내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좋을 변명 하나만 설명해줘요."

남자는 소녀를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소녀는 아무런 몸짓을 안했지만, 침묵으로 동의한 듯 보였다.

"좋아. 우선 얘부터 소개해줄게. 얘 이름은 서희, 그냥 서희야. 다르게는 SCP-1742-KO 라고 불렸지."

"에스 씨피……뭐라고요?"

"SCP-1742-KO. 2년 전 '카론 유출 사건' 직전에 격리된 아이야. 2주 전에 나와 함께 탈주했지."

"지금 이해시키려고 말하는 거 맞죠?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계속 듣다보면 이해가 될 거야."

한일의 말을 자른 남자는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SCP 재단이라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던 리즌 박사(Doctor Reason), 본명은 정명운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잘 부탁해."


"그래서, 당신이 있는 그 재단은 세상에 널리고 널린 괴상한 물건들과 사람들을 모아다 어딘가에 가두어놓는 역할을 한다고요?"

"정확히는 내가 '있던' 곳. 재단은 그런 곳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세상을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왔었지."

어딘가에서 난 방석을 깔고 앉은 한일과 서희는 명운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손짓까지 섞어가며 명운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럼 이 여자애도 관련있어요? 아까 그 숫자불러서 말한 거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맞아. SCP-1742-KO. 이 아이 자체가 하나의 SCP로 분류되어 있었어."

"뭘 했는데요?"

가만히 앉아 있던 서희가 입을 열어 스스로 설명했다.

"내가 부르면 어디있든 택시가 나타나. 그게 꽉 막힌 도로든, 바다 한가운데든, 비행기 안이든. 요금은 1미터를 가든 지구 한 바퀴를 돌든 똑같고."

"그래서 유클리드 등급을 받았지. 격리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아서 말이야."

서희와 명운의 설명을 듣고 멍해져있던 한일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프하하하하하! 뭐야, 그게! 고작 택시 한 대 불러오는 걸로 위험하다고 가둬놓고 있었어?"

낄낄대는 한일을 서희가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명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라? 너 아까 같이 타고 온 거 아니야?"

"……아, 그랬지. 맞아요, 폭주 운전을 좀 하던데."

"운전은 수준급으로 잘 해.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문제는 그게 어떻게 나타나느냐야. 갑자기 서희 근방 10 미터 어딘가엔 반드시 나타나더라. 서희가 그보다 좁은 방이 있으면 그 방까지 가는 길의 모든 걸 다 부수면서 오고. 그래서 거기 탄 서희는 반드시 나갈 수 있었어. 어디에 있든."

"그건 좀, 심하네요."

서희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슬쩍 반대로 돌렸다. 그러고보니 한일과도 의식이나 한 듯 꽤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한일 또한 거리감 두는 그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져 목을 긁적였다.

"뭐, 좋아요. 그런데 이 얘기를 왜 저한테 하죠? 숨겨진 기관이라면서 이렇게 막 퍼트리고 다녀도 되는 거에요?"

"아아, 난 재단을 나와서 상관없어. 재단의 일 따위, 재단 사람들이 알아서 하라지. 그리고 앞으로 지금까지의 네 기억을 지울 거거든. 재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네?"

잠시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던 명운은 어깨를 으쓱하곤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이 이상한 일은 네 기억에서 지울거야. 그쪽이 너한테 더 편하잖아?"

"남의 동의도 제대로 안 받고 참 쉽게 말하네요."

하지만 명운의 말대로 한일에겐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명운에게 있어 일반인들은 이런 정보를 알아선 안 되는 법이니까.

"……좋아요, 뭐 제 기억은 없애야겠죠.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죠?"

"그건 아마 서희가 챙겨왔을 거야. 그렇지?"

"네, 부탁하신대로 그 때 나올 때 트렁크에 같이 넣어서 왔어요. 아마 부르면 그 안에도 그대로 있을 거에요."

"그럼 가자. 후딱 해치우고 우린 다른 곳으로 서둘러 가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서희는 살짝 뒤를 돌아 한일을 보더니 앞서 걸어가는 명운을 따라갔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는 그들을 보곤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한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갈 땐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방금 전에 한참을 죽어라 올라갔던 계단을 보던 한일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뭔짓을 해도 이 계단 죽어라 오르고 또 얻어맏은 건 안 까먹을 것 같은데……"

"풋."

예상 외로 서희가 갑자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전부터 창백하고 생기없는 가죽같던 얼굴에 그제서야 발그레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한일은 그 모습을 보고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다 한일은 아직도 자욱하게 연기가 가득한 층에 다다라 그 너머에 눈이 갔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너머로 쓰러지고 널부러진 그림자가 몇몇 보이는 것 같았다. 부르르 떤 한일은 억지로 시선을 그곳에서 뗐다.

바깥으로 나오자 어느샌가 구름이 옅게 끼고 있었다. 서희가 택시를 부르는 사이, 명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시간 내에 오면 좋겠는데……"

택시는 입구에서 느긋하게 올라왔다. 택시가 올라오자마자, 서희는 운전석 문의 유리창을 두드리고는 내려오는 창문 너머로 작게 물었다.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덜컹 소리가 나자마자 명운은 트렁크를 휙 젖혔다. 트렁크 안엔 단단한 플라스틱 제 가방부터 시작해 커다란 나무상자까지 다양한 수납품들이 꽉 차듯 들어 있었다. 가방 하나를 꺼내면서 명운이 어이없다는 듯이 옆에 다가온 서희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있었던 거야?"

"몰라요. 그냥 막 집어 넣어도 튕겨나오는 거 없이 다 들어가던데요."

트렁크를 닫고 명운이 서류가방을 열자 그 안엔 새까만 권총이 한 정 들어 있었다. 명운이 권총을 꺼내들고 슬라이드를 당기는 걸 본 한일은 머리가 새하야졌다. 한일을 힐끗 본 명운은 한일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이건 진짜 총이 아냐. 재단에서 가지고 있는 변칙 개체란 것 중 하나인데, 이걸 정확히 미간에 겨누고 쏘면 한 발에 하루씩 기억이 모조리 날아가. 그렇게 날아간 기억은 결정화해서 뒤통수로 튀어나오고. 그 외엔 그냥 빈 총이니까 안심해."

"그 말을, 이 상황에서 어떻게 믿어요? 아저씨라면 믿겠어요?"

한숨을 내쉬며 명운이 총구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나라도 믿지는 않겠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얘기한 거 믿어준 거 만큼만이라도 믿어줘. 금방 끝난대도?"

"그래도 제 머리에는 총을 겨누긴 좀 힘든데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명운은 갑자기 손짓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렸다. 골목길 입구를 노려보던 그는 씨익 웃었다.

"왔네."

한일이 고개를 돌리자, 골목길을 타고 검은색의 긴 승용차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눈짓으로 명운에게 묻자, 명운은 권총을 다시 가방에 넣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우선 저쪽부터 처리해야겠다. 넌 이 차 뒤에 서 있어. 지금부터는 이쪽 세계의 일이니까."

차가 다 올라와 입구 바로 앞에 멈춰섰다. 구름에 감춰져 미약한 늦은 오후의 햇살을 흡수하듯 깊은 색감의 어두운 자동차의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의 남성이 걸어나왔다. 두터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올백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가 문을 닫고 섰다. 명운은 그를 보고 악수를 청하며 걸어갔다.

"리즌 박사라고 합니다. 이번 작전의 협력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비죽 나와 명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남성은 대답했다.

"세계 오컬트 연합 (Global Occult Coalition)의 자코모 세크레타 (Giacomo Secreta) 입니다. 재단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항상 수고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저희는 연합에서 연결해주신 이 지역의 쿼터마스터 (Quartermaster)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지원을 받아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리고 2년 전 그 사고로 연합에서도 굉장한 피해를 보고 계실 텐데."

"연합도 재단과 동일한 기억 소거 절차를 함께 사용했으니까.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기억 소거 절차가 있어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자코모라는 남자의 말에는 이상한 억양이 섞여 있었다. 유럽인의 어설픈 한국어를 듣는 느낌에 한일은 소름이 끼쳐 부르르 떨었다.

자코모가 손짓하자, 차에서 네 명의 똑같은 복장을 입은 남자가 나와 자코모의 뒤에 섰다. 명운은 그 모습을 보곤 허리를 쭉 펴며 곧게 섰다.

"자, 그럼 연합에서 먼저 이 쪽에 연락을 주신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굉장히 이례적인데요, 저희 입장에선."

"연합도 당신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재단은 극도로 위험한 개체들을 파악하기 힘든 목적으로 모아두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으론 협력을 할 뿐 실질적으로는 적대하는 입장입니다. 연합에 소속된 평의회 간엔 의견차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원론적인 이유를 듣자는 게 아닙니다."

명운의 말엔 날이 서 있었다.

"제가 묻고자 하는 건, 왜 하필 '이번 사건에만' 그 쪽에서 관심을 가지는가 하는 겁니다."

자코모는 뜸을 들이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번에 당신과 함께 탈출한 위협 개체의 탈주 능력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에 따라, 평범한 방법으론 해당 위협 개체의 추적이 불가능하단 판단을 내렸습니다."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자코모는 짧게 말을 끊었다.

"KTE-5742의 신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아시죠?"

명운은 내뱉듯이 말하곤 뒤로 손짓했다. 서희는 곧바로 차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한일의 팔을 끌고 차 안에 집어넣었다. 뒷자석에 올라탄 서희와 한일은 창문을 살짝 내리고 바깥을 보았다. 앞에 선 자코모를 제외한 네 명의 사람들은 모두 택시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갖는 목적이 SCP라고 명명되어 강제적 감금과 실험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변과 권리 보호란 걸 알면서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인데요."

"그런 쓸데없는 감정적 행동 때문에 당신이 제대로 된 것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더욱 반항하면……!"

자코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허리에서 권총을 꺼내들어 겨눴다. 그건 뒤에 선 네명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명운이 들고 있던 총을 들어 자코모를 겨눴기 때문이다.

그거 빈 총이라며! 한일은 속으로 고함을 질렀으나, 그걸 입밖에 냈다간 어떤 결말이 나올지 아므로 입을 다물었다.

"리즌 박사, 당신과 이럴 시간 없습니다. 저희는 하나가 죽어도 넷이 살지만, 당신은 당신이 죽으면 당신 쪽 모두가 죽습니다."

"계속 해보시지.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은 우리 쪽이지, 당신 쪽이 아냐.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재단의 변칙 개체들에 눈이 먼 당신네 마법사들을 모를 것 같나?"

그 때 서희가 운전석으로 몸을 내밀어 기사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여기가 아니고 저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에 주차해야돼요. 가능한 한 빠르게 움직여줘요. 어서."

기사는 귀찮아하며 기지개를 켰다. 한일은 서희가 한 말을 듣고 잠시 후에야 이해가 됐다.

"너 지금 무슨 말……!"

갑자기 눈 앞의 풍경이 흐릿해져 한일은 눈 앞이 한순간 새까맣게 흐려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택시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움직여 자코모가 서 있던 곳에서 시동이 걸린 채 멈춰 있었다. 자코모는 저만치 앞으로 날아가 구겨져 있었고, 네 명의 남자는 차 밑에서 팔과 다리만 보였다.

"젠장, 이딴 식으로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진짜 아닌데!"

명운은 욕설을 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서희는 명운이 문을 닫기도 전에 기사에게 외쳤다.

"아저씨, 김포공항으로 가주세요!"

택시는 다시 속력을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명운은 한일보다도 능숙하게 안전벨트를 당겨 꽂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 놈들은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이라 바로 따라올 거야. 당장 피해야 해. 위험하면 해외로 튀어야 할지도 몰라."

"저기요, 내 기억 날려보낸다는 건? 그건 해결하고 나가든가 해야죠!"

"아, 몰라! 일단 도망치고 보자고!"

그러면서 명운은 들고 있던 총을 보조석 수납장에서 꺼낸 주머니에 집어넣고 뒤로 던졌다.

"이거나 들고 있어! 뭐하면 발가락에라도 쏴봐!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나중에 지워도 되잖아. 어차피 오늘 시간 많아!"

택시는 순식간에 골목길을 돌아 올라온 갈림길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희는 안전벨트를 한 손에 붙들고 명운의 의자를 잡으며 말했다.

"김포공항 간다는 소리는 다 들었을 테니까 다른 데로 가야 돼요. 어디로 가죠? 부산? 목포?"

"아니, 일단 부천 쪽으로 돌아서 대전으로 가자. 거기 가서 배를 탈지 비행기를 탈지 정하자고."

한일은 명운과 서희의 대화를 듣다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택시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급기야 갓길에 멈춰버린 것이다.

"어? 아저씨, 왜 멈춰요? 여기서 멈춰달란 말은 안 했는데……"

서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기사는 짧게 대답했다.

"일단 내려봐요. 엔진에 뭐가 들어간 모양인데."

"네?"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운은 벨트를 풀고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서희는 한일을 다급하게 돌아보며 팔을 잡아 끌었다.

"빨리 내려! 내려야 돼!"

숨도 쉬지 못하고 내려서자, 기다리고 있던 명운이 부서져라 문을 닫고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발이 끼일뻔한 한일이 크게 소리질렀다.

"설명을 하라고요, 설명을! 대체……"

그 순간, 한일에게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노란 택시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허공으로 2미터는 솟은 택시가 다시 땅으로 떨어졌을 땐 택시는 새까맣게 그을려있었다.

"으악!"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훅 불어와 한일은 그 자리에서 나동그라졌다. 불과 5초 전만 해도 타고 있던 자리는 새빨간 불길과 새카만 연기가 자리잡아 일렁이고 있었다.

"꺄아아악!"

"뭐가 터졌어!"

"테러 아냐, 테러?"

지나가던 한 가족이 빈 유모차를 뒤집어 엎으며 크게 소리질렀다. 명운은 한일이 들고 있던 주머니를 빼앗아들고 권총을 꺼내 경악하는 두 사람을 겨눴다.

탕탕!

한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총에 맞자마자 두 사람은 뒤통수에서 조잡한 색깔의 작은 수정 조각들을 분출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권총을 넣은 주머니를 여매 한일에게 던진 명운은 앞서 달리며 소리질렀다.

"서희야, 흩어지자! 그 때 재단에서 나올 때 했던 것처럼 다음 곳에서 보자고!"

"알았어요!"

명운은 택시가 달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갔고, 서희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뭐해? 빨리 따라와!"

서희가 뒤를 돌아보며 외치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한일은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리며 외쳤다.

"에라, 몰라! 이젠 진짜 몰라!"

골목길을 들어서자 바로 서희는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생각보다 서희의 달리기가 빨라 한일은 금세 숨이 찼다. 모퉁이를 세 번 돌고서야 간신히 서희를 따라잡았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한일이 악을 쓰듯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역으로 가자! 지하철 타고 가야 들키지 않아!"

고개를 들어 보니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번화가가 나오는 듯 했다. 한일은 입을 열려다 끈적하게 굳은 침을 밷어내고 외쳤다.

"저기로 가자! 바로 역이 나올거야!"

슬쩍 뒤를 보았지만 아직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일은 조금씩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억!"

모퉁이를 돌자마자 검은색 밴이 튀어나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 버렸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한순간 멎은 듯했다. 하지만 내려진 운전석 창문을 통해 덥수룩한 수염에 배불뚝이인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제야 막힌 숨이 트였다. 헉헉 거리며 가슴을 누르는 한일의 손을 잡아 끌며 서희가 숨을 몰아쉬었다.

"쉴 틈 없어. 빨리 뛰어야 돼!"

작은 손이 한일의 손목을 잡고 단단히 뛰었다. 서희의 속도에 맞추어 뛰자 한일도 한결 수월하게 뛸 수 있었다. 덩달아 그의 심장 박동 수도 점점 올라갔다.

다시 모퉁이를 돌자 번화가가 나타났다. 오후의 인파가 가득한 거리를 피해 뛰다보니 저만치 역이 눈에 들어왔다. 역이 보이자마자 한일은 더욱 더 속도를 냈다. 서희에게 끌려가다 차츰 서희를 앞질러 한일이 서희의 손을 잡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줄짜리 에스컬레이터를 뛰듯이 내려가자 올라오던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애써 무시하며 매표소 근처에 다다라 한일은 속도를 줄였다.

"표는 어떻게 하지? 어디까지 가는 걸로 끊아야……"

하지만 서희는 멈추지 않고 튀어나갔다. 다른 매표 창구보다 높이가 낮은 장애인용 창구를 잡고 휙 몸을 날려 창구를 넘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치마를 누르고 건너편에 서서 멀뚱히 선 한일을 노려보며 외쳤다.

"자꾸 지체할래! 빨리 와!"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서희를 쫓아 창구를 넘어선 한일은 서희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져 내려갔다.

"너 지하철도 한 번 불러봐! 지하철도 막 바로 오는 거 아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

내려가보니 서희가 부르기도 전에 이미 지하철이 막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안으로 뛰어든 서희와 한일은 닫힌 문에 기댄 채 귓가를 울리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헉…드…들어왔다……"

"진짜 때 맞춰서 올 줄은 몰랐어……"

말조차 못 잇는 한일에 비해 서희는 그래도 버틸만 해 보였다. 마침 자리 하나가 빈 것을 본 한일은 무심코 서희의 손을 잡고 자리로 이끌었다.

"뭐, 뭐야?"

"자리 났잖아. 가서 앉……"

그제서야 자기가 서희의 손을 꽉 잡았다는 걸 알아차린 한일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졌다.

"……아."

서희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일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서희가 앉은 곳 앞에 서서 주위를 살피던 한일은 손잡이를 잡으려다 자신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았다.

"아참. 이게 있었지."

보다보니 주머니 자체는 카메라를 담는 듯한 아이보리색의 평범한 주머니였다. 하지만 그 안에 비쳐 보이는 실루엣는 평범한 이 지하철 안과는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아마 당분간은 계속 숨어 지내야지. 박사님이랑 다시 만나서 어디로 갈지 정할 때까진."

"박사님?"

"리즌 박사님 말이야."

한일은 서희가 명운을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어디 가서 만날 거야? 약속이라도 한 거야?"

"리스트가 있어. 나올 때 박사님이 같이 빼온 건물 SCP에 대한 정보가 있거든. 빼온 순서대로 만나기로 했어."

"그래……"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들리는 것은 지하철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옆사람들의 헛기침 소리 뿐. 괜히 무안해진 한일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들어온 문자는 없나 확인했더니, 잔인하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한일은 휴대전화의 화면을 이리저리 굴렸다.

한참 동안 한일은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고 서희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도중에 자리가 하나 둘 씩 났지만 서희 바로 옆 자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한일은 좌우에 앉은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와 양복 차림의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내리자."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난 곳은 둘이 탄 역에서 꽤나 떨어진 역이었다. 시계를 보니 꽤나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다.

"배고프지 않아? 밥 먹을 시간이 다 됐어."

"필요없어. 지금까지 하루 이틀 굶은 건 일도 아냐."

"야……"

너도 그렇지만 나도 배고프다고, 그렇다고 한일이 불평을 터뜨릴 베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창구를 넘어가고 있는 사람한테 대놓고 말할 베짱은 없다.

거리로 나오자 이미 하늘은 깜깜해졌다. 서희는 이미 갈 곳을 정한 듯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일은 그 한 발짝 뒤에서 서희를 쫓았다. 아까처럼 나란히 서서 걸어갈 용기도 없다.

"눈이 오려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도 별은 물론이고 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서희는 가로등 곁에 놓여진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 옆에 서서 표정으로 묻는 한일을 슬쩍 올려다 본 서희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잠깐 쉬어가는 거야. 또 움직여야지."

"너도 쉬긴 쉬구나."

"나도 인간이야. 인간 취급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한일은 잠시 머뭇거리다 서희 옆에 걸터 앉았다. 벤치가 좁아서 한일과 서희 간의 거리가 그닥 멀지 않은데도, 서희는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저기, 뭐 먹고 싶지 않아? 편의점이 저기 코앞에 있는데, 가서 삼각김밥이라도 사올 게. 아니면……"

의자 위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탓에 한일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하지만 멀어지는 한일의 옷소매 끝을 서희가 붙잡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잔잔하게 흔들리는 표정으로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

"그냥…… 잠깐만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돼? 움직이는 건 나중에 할 테니까, 잠깐만."

그 말에 한일은 한 번 더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걸 물어봐도 괜찮을진 모르겠지만, 그 재단인가 하는 곳에선 어떻게 지냈어?"

서희는 대답 대신 한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야?"

"아니, 이런 얘길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네가 신기해서."

"하하, 그런가."

한일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등받이에 기댔다.

"사실 평소에 상상하던 그런 판타지 적인 모습이거든, 네가 얘기하는 거. 책이나 뭐 이런거로 항상 접하던 거라서,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혀 오니까 더욱 실감이 나더라고."

"그래……"

서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곳은 아니야."

"그, 그래?"

"나는 그 곳에서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지 못했어."

거리에서 모여든 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구슬픈 소리를 내는 듯 했다.

"재단은, 정말 위험한 물건들을 사회로부터 떨어뜨려. 다시는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것이 물건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그들에게 있어 평범한 세계를 위협하는 특이한 것은 모두 가둬야만 하는 것들일 뿐이거든."

"왜 그런 걸 가지고 있어야 하는거야? 그냥 보이는 대로 다 없애면 되지 않아? 위험한 게 있으면 그 위험한 것을 없애면 되고, 통제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으면 그럴 이유를 없애서 세상에 보내버리면 되잖아."

"그렇게 가둬두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걸."

한일은 서희의 슬픈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확보는 그들의 권리야. 격리는 그들의 정신이지. 그리고 보호는 그들의 의무야. 평범한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 같은 것들을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기도 해.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서희의 눈은 한일과 잠시 마주쳤다 비껴져 나갔다. 한일은 그 눈빛에 어린 감정을 쫓으려 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2년 전에 재단이 어떤 기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그 기관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에 의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해. 재단의 근본을 흔드려는 그 연구를 재단은 재단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막았어. 그 지역을 지도에서 없애버릴 수준의 일을 벌이면서까지.

하지만 '프로젝트 카론'이라는 바이러스가 그 지역에서 탈출했어."

"프로젝트 카론?"

"응. 재단에선 얻을 만큼의 정보를 얻고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해. 약물이든, 기구든, 최면이든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못쓰도록 하는 바이러스가 프로젝트 카론이야."

서희는 눈을 두 세 번 깜빡이고 바닥을 발 끝으로 비볐다.

"박사님이 알아보니까 내 기억을 전부 지워 보려고 했었나 봐. 기억이 없어도 택시를 부를 수 있나 알아 보려고. 하지만 프로젝트 카론이 퍼져나가고,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카론에 감염되어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만약 내 기억이 전부 지워졌다면 나는 자폐아가 된 채로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자폐아로…… 평범하게……?"

"그 정도면 다행인 거야. 기억을 지우지 못하게 된 그 이후로 재단은 더 잔인해졌어. 난 매일 같이 정신 세뇌를 당하고, 거짓 기억을 삽입당해야 했어. 택시에 탄 채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도 꾸게 되었고, 노란색 뱀이 가득한 방에 하루종일 같혀 있기도 했어. 물론 무서워서 택시를 부를 때마다 밤에 자지도 못하고 고문당했고."

서희가 다시 한일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번엔 한일이 눈을 돌렸다. 도저히 그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나오게 된 건, 바로 그 다음날 내 성대를 없애려는 수술 때문이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가 여태까지라도 살아 있을 수 있던 건, 다 재단 덕분인걸."

한일은 반박하고자 했으나, 화가 치밀어올라 목이 잠겨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어금니가 부서져라 악물고 있던 한일을 잠자코 보고 있던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와 치마를 툭툭 털었다.

"가자. 너 배고프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도 정말 미안한데,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자. 박사님이 내 얼굴을 계속 지우는 작업을 해서 내 얼굴을 봐도 못 알아볼 거야. 그러니까……"

서희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춰섰다. 머리 속이 혼란으로 가득찬 한일이 서희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을 돌리자,

검은 밴이 그 곳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한일의 등 근육이 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굳어버렸다. 서희가 바짝 긴장한 한일의 팔을 붙들었다.

"아냐, 재단은 우리 얼굴을 전혀 모른다고 했어.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검은 밴이 두 대 천천히 한일과 서희 앞으로 가까이 올 수록, 서희의 손은 점차 식어갔고 떨림은 점차 더해갔다. 한일은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어떡하지?

이대로 괜찮을까?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까?

"됐어, 앞으로 조금만 더 가, 제발……"

검은 밴은 이미 서희와 한일 앞을 모두 지나가고 있었다. 다가온 속도 그대로 검은 밴이 굴러가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선 밴이 그 자리에 딱 멈춰섰을 때, 한일은 분명 잘못된 것을 느꼈다.

밴의 양쪽 문이 막 열리려는 순간 한일은 서희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뛰었다.

"달려!"

뒤편에 난 운동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낮은 담을 건너 도로로 나오자마자 다른 자동차 한 대가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차와 스쳐지나간 한일은 무작정 건물 틈새로 달려들었다.

건물 사이로 빠져나오자 상가 뒤 쪽의 간판들이 가득한 거리가 나왔다. 어지럽게 빛나는 네온 사인들 사이로 달리자, 어두운 건물로 가로막힌 끝이 보였다.

"잠깐…… 어쩌려고!"

한일은 작게 난 입구로 뛰어들었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 바로 옆에 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1층, 2층, 3층…… 8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회색 페인트가 발라진 낡은 옥상 문을 걷어찼다.

바깥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일고 있었다. 새까맣게 먼지가 내린 옥상 위를 내달려 바로 옆 건물로 뛰었다.

"윽!"

2미터나 되는 거리를 뛰어넘자 뒤에서 서희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간신히 한 발 차이로 뛰어넘은 한일은 비틀거리는 서희를 잡아주며 다시 달렸다. 불쑥 솟은 문을 잡아당기자 녹슨 자물쇠가 과자 부서지듯 떨어져 나갔다.

비상등이 켜진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불이 꺼진 상가 아래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싸움이 난 듯한 소리에 한일이 멈춰서자, 서희가 한일의 팔을 다시 끌어당겼다.

"위에 올라가서 숨어있자. 조금 있으면 사라질거야."

한일과 서희는 다시 올라가서 덜렁거리는 문을 단단히 닫았다. 조각조각난 자물쇠 대신 바로 옆에 걸린 쇠고리를 걸어 채우자 그럭저럭 다시 잠긴 듯 보였다.

"아마 이대로 계속 있으면 어디선가 봐서 끝까지 쫓아올 거야. 어디로 갈지 여기서 미리 정하자. 여기는 높이도 꽤 되니까 잘 보면 될 거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한일이 돌아보자, 서희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 그런 눈으로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그만 둬."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 너는 이 쪽으로 오면 안 돼, 부탁이야."

"……"

한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서희의 눈가 아래에서 투명한 액체가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힘을 준 눈망울에 맺힌 커다란 물방울은 고인 채 흘러내리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있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원래 나는 그런 인간이니까. 그런 괴물이니까.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이 곳으로 오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는……!"

한일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런 데 놓고 가라고? 아냐, 난 아냐,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가서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인생 편한 놈이 아냐. 끝까지 따라가진 않을게. 최소한 네가 살아 남을 수 있을 곳까지만, 그 때까지만……"

"어디까지 가려고?"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한일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순간, 시야의 초점이 흔들렸다.

"이런. 생각보다 소리가 이상하게 나는 군요. 아, 맞출 생각은 없었습니다."

한일의 배 한가운데가 붉게 물들어갔고, 머리 끝부터 끝까지 새하얗게 번져갔다.

자코모가 든 총에서 구리색 탄피가 땅에 떨어져 튀어올랐다.

"자, 자, 잠깐만…… 당신, 왜 민간인을 쏘고 있어. 무슨 짓이야!"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서희를 뒤에서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일의 배는 불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말로 불타고 있었다. 마치 뜨거운 장갑을 낀 손이 그의 배를 내장까지 남김없이 파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금니가 부서져라 갈아졌다. 정말로 깨질듯이 이가 갈리는 와중에, 자코모는 건물의 난간에서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놀랐습니다. 설마 재단이 우리보다 먼저 당신들을 발견할 줄이야. 과연 갈기갈기 찢겨도 재단은 재단이란 건가요."

"당신! 충분히 날 쏠 수 있으면서도 안 쐈지! 그래 놓고 무슨…… 경…찰인데……"

한일은 자리에 천천히 주저 앉았다. 도저히 서희를 붙잡으며 멀쩡하게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대로 등 뒤로 밀어 계단을 내려가게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그가 쥐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간신히 떠올랐다.

"이제야, 간신히, 이걸……"

반쯤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끈적한 덩어리가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철벅,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꺼내들었다.

"무슨……?"

상대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여태껏 이런 걸 들고 다닐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헉……헉…….헉……"

한일은 인생 처음으로, 아주 중요한 때에 쓸데없이 심하게 졸음이 몰려오는 경험을 했다. 빨리 끝내버리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동시에 머리가 가장 차갑게 식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그의 머리는 쓸데없는 어지러움으로 가득했다.

한일은 끈적한 손가락으로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자코모의 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내며 총이 발사되었다. 당혹감이 가득한 눈빛이 차차 흐려지며 천천히 무너져갔다. 이윽고 하늘을 향한 시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 몸과 함께 천천히 흐려져갔다.

땅바닥에 흩어지는 오색의 빛깔들은 원래 그런 색인 걸까, 다른 빛을 가져와 대신 빛나는 색인 걸까.

비틀거리며 한일은 몸을 돌렸다. 손에 들린 권총은 한일이 흘린 피에 엉겨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단한 걸요. 설마 그렇게 대놓고 눈 앞에서 쏠 줄은 몰랐습니다."

자코모는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한일은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솔직히 당신 둘이 그렇게 도망갈 때, 순간적으로 당신이 계획대로 너무 잘 움직여줘서 감탄했습니다. 재단이 나오는 막판엔 갑자기 플랜 비로 넘어가서 당황했지만요, 캐스퍼(Kasper)."

자코모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를 북북 닦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주머니의 권총집에 총을 슬쩍 집어넣은 자코모는 계단 쪽으로 걸어오며 귀에 달린 이어피스를 누르고는 중얼거렸다.

"어서 떠나야겠죠.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재단의 요원들과 우리 타격 부대원 간의 싸움이 난 모양입니다. 게다가 리즌 박사 쪽에선 벌써 위치를 잡고 이리로 오고 있다니깐 서두릅시다."

자코모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을 때, 한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타앙!

자코모는 쓰러지는 와중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왁스 같은 얼굴 가죽은 평온한 표정 그대로 바닥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의 뒤통수에선 붉은 빛의 보석이 가득 쏟아져 나와 주변에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

한일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할 만큼의 일을 다해서인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몸엔 피로감이 대신 물 밀려 들어오듯 덮쳐왔다.

서희는 잠자듯 누워 있었다. 한일의 눈엔 복잡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한 서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너 대신 내가 더 낮은 곳에 있는 게 어울려."

한일은 자신의 뺨 위에 차가운 송이 하나가 내리는 것을 느꼈다. 참 얄궂게도 타이밍 좋게 눈이 한 두 송이 씩, 빛나는 보석을 감싸듯이 내려왔다. 뜨거운 김이 서려 흐르는 한일의 뺨을 어루만지듯이, 시끄러운 세상을 조용히 덮어나가고 덮어나갔다.

한일은 오늘 처음으로, 진심으로, 씨익 웃을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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