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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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11월 11일, 월요일

오후 12시 32분

드디어 오전 일과가 모두 끝났다. 어째서인지는 오전 일과라고 해봤자 겨우 4시간 정도밖에는 걸리지 않았건만 5개월이나 걸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이제 적어도 한 시간 동안은 빌어먹을 검은 원반이나, 시끄럽게 빽빽 울어대며 모든 전자기기들을 맛이 가게 만들어버리는 전자파를 방출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나 방 안에 처박혀 있는 토스터 따위를 관찰하거나 산더미 같은 양의 서류뭉치와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신이 있고, 그가 정말로 세상을 만들었다면, 신이시여. 휴식시간이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 만들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나이다.

물론 나는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누워 뒤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2시 32분. 자연스레 그 옆에 달린 날짜에도 눈이 갔다. 11월 11일. 1이 4개네. 뭔가 운이 좋을 느낌일 것 같기도 한데 어딘가 이상했다. 1이 4개… 11월 11일이라…? 뭔가 있는데, 뭐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날이구나.

"음, 음. 농민의 날이자 가래떡 데이였어. 절대로 사귀는 사람에게 초콜릿이 0.000001mm만큼 코팅되어있는 젓가락 같은 과자를 선물하는 그런 요사스럽고 흉물스럽고 슬픈 날이 아닐 거야."

11월 11일은 국가가 지정한 농민의 날이자 다른 이름으로는 가래떡 데이라고 하니 우리 모두 따끈따끈하게 구운 길쭉길쭉하고 쫀득쫀득한 가래떡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농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갑자기 시계 옆에 달린 날짜를 본 이후의 잠깐 멍하게 앉아있었다. 뭐지? 뭔가 기분이 나쁜데. 어쨌거나 점심시간이다. 나는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리포트를 작성 중인 랭겔 형을 불렀다.

"랭겔 형."
"왜?"
"밥 안 드세요?"
"나 지금 바빠. 보고서가 되게 많이 밀렸다고."
"아, 그럼 뭐… 열심히 하세요."

퇴짜맞았다. 랭겔 형은 내가 말을 걸었던 적이 없기라도 한 듯이 다시 일에 열중하였다.
아, 그럼 결국 혼자서 식당까지 걸어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꺼내어 - 다행히 괴생명체의 전자파를 피해갔다. 다만 내 노트북이 망가졌을 뿐 - 이어폰을 양쪽 귀에 낀 뒤 스마트폰에 연결하여 전원을 켰다.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를 들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언제나 걷는 칙칙한 복도였지만 오늘은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뭘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려나?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주변을 경계하였다. 만화나 소설 같은데 보면 꼭 좋은 예감은 항상 반대로 작용하던데.

"뭐,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끈적.

…끈적?

신발 밑창에 뭔가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에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놈의 에폭시 수지가 조금 바닥에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걸 밟아버린 것이었다.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내 발바닥을 보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들이 전부 사실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가 좋을 예감이 들자마자 바로 불운한 일이 생길 리가 없다. 이것은 분명 신 아니면 작가라는 존재의 농간일지어다. 빌어먹을 작가 같으니. 나 같은 불쌍한 캐릭터를 도대체 얼마나 더 불쌍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신발 바닥을 근처에서 굴러다니던 휴지로 벅벅 긁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붙은 에폭시 수지의 양은 매우 적었기에 조금만 고생하니 뗄 수 있었다. 원래는 바로 떼어낸 에폭시를 옆에 있던 휴지통에 버리려고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밟은 것이 뭔가 억울해서 누구 한 명 엿되보라고 다시 바닥에 잘 붙여놓았다.

괜스레 누가 밟을지 기대가 되면서 웃음이 절로 실실 흘러나왔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군침 돌게 만드는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메뉴를 보니 오늘 점심 메뉴는 카레라이스에 스테이크였다.

…뭔가 잘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어 보이는 조합이긴 하지만, 맛만 좋으면 됐지, 뭐.

꾸루루룩.

배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라는 것을 0.0001초만에 깨닫고 서둘러 식판을 손에 들고 배식대로 뛰어갔다.

분명히 저쪽에 서 있던 연구원 한 명이 배식대로 달려가는 나를 보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배가 고픈 상태에선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먼저 밥부터. 슬쩍 보니 국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종류인 것으로 보이기에 밥을 받는 곳과 국을 받는 곳 양쪽 모두에 흰 쌀밥을 퍼담았다. 그다음은 카레 소스. 적절한 크기로 썰린 야채와 고기는 황금빛 카레와 어울려 환상적으로 밥을 덮었다. 더욱더 식욕을 자극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만 밥 쪽으로 향하려는 손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다음 음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섭씨 180도의 오븐에서 아직 고기 내부에 핏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주방장 특유의 노하우를 살려 구워낸 미디움 레어 안심 스테이크가 있었다. 방금 막 구워낸 스테이크는 아직도 육즙이 살아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으며, 세상에나 그릴 자국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평소에 발휘하지 않고 적립시켰었던 인내심 마일리지를 지금 한꺼번에 사용하여 초인적인 인내력을 얻어낸 나였기에 입가에 가져가지 않고도 스테이크 3장을 안정감 있게 식판에 쌓아올린 후 소스까지 뿌리는 대범함을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샐러드는 대충 먹을 만큼 담은 뒤 식탁으로 왔다.

아아…. 눈부셔라. 아까 에폭시 수지를 밟았던 것은 이 만찬을 즐기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구나.

"잘 먹겠습니다…크흑!"

엄마,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요.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먹으려 할 때,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수저를 안 챙겨 온 것이었다.


밥 먹을 때 가장 중요한 도구인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져오지 않은 나를 탓하며, 음식이 식기 전에 잽싸게 수저를 들고 돌아왔다. 수저를 빼먹다니, 마치 전쟁터에 병사가 무기를 빼먹고 나가는 상황이다.

"잘 먹겠습니다."

종교 따윈 없지만,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살아있게 해주세요. 아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라멘.

짧지만 여러 신께 올리는 기도를 끝마치고 칼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병사들이여, 진격하라.

칼이 무자비하게 구워진 살점을 가른다. 붉은 피가 똑똑 떨어지지만 그로테스크하다기 보다는 식욕을 자극하는 광경. 거기에 특제 소스까지 더해지며 단백질이 구워진 냄새에 소스의 향기까지 더해져 후각 세포를 자극하고 대뇌를 활성화했다.

조심스럽게 잘라낸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가장 먼저 들어온 감각은 고기의 적당한 기름진 맛, 그리고 특제 소스의 맛.

"호오, 이 맛은…."

레시피가…… 보였다!
발사믹 식초 3큰술, 올리브유 6큰술, 간장 5큰술에 설탕 2큰술이라, 나쁘지 않은 소스다. 나중에 한 번 써먹어 봐야겠네.

혀에서 맛을 봤으니 씹어볼 차례. 먹기 좋게 적당히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어금니 사이에 집어넣고 씹었다.

미디움 특유의 핏물과 육즙, 그리고 기름이 한데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그래, 예컨대 피아노 3중주다.

그대로 스테이크 한 개를 먹어치웠다. 간만에 기름기가 들어가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이 기세를 몰아 손에 숟가락을 들고 카레라이스를 향해 돌격했다. 노란색의 카레와 흰색의 쌀밥이 어우러진 모습이 식욕을 중진한다. 겉보기로 보이는 내용물은 당근, 감자, 양파, 호박 그리고 돼지고기. 먹기 좋게 살짝 작은 크기로 썰어 넣은 주방장의 센스에 감탄하며 한 숟가락을 떠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음, 맛있다. 영어로 하면 딜리셔스. 일본어론 오이시. 중국어로 하면 하오취. 러시아어로는…뭐려나.

음식에 계속해서 감탄하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오후 1시 47분

부른 배를 부여잡고 식당에서 힘겹게 걸어 나왔다. 오늘 음식이 너무나도 맛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시간은 거의 1시간 정도밖에는 흐르지 않았건만 왠지 2개월이나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까 점심 먹기 전에도 그렇고, 자꾸만 시간이 길게 흐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어째 이상한 생각이 들어가던 길에 보인 벤치에 걸터앉았다. 지난 며칠간은 너무나도 바쁘게 보냈다. 갑자기 플리쳐 박사님이 쌓여있던 일거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가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무뚝뚝하게 일 처리를 하시는 걸로 유명한 플리쳐 박사였지만 그 분량은 차마 감당을 못하겠나보다.

그걸 나한테 준 것만큼은 전혀 이해할 수도, 할 마음도 들지 않지만. 연구 조교라고 해도 업무를 대신 해줄 만큼 한가한 것은 아니라고.

어디선가 내가 한가해 보인다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지만, 만약 그런 말을 한 인간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다면 당장 죽기 직전까지 흠씬 패준 후 한 번 노려본 후, 딱 한 대를 더 때려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자, 설명해줄 테니 중요 포인트에는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는 등 메모하면서 잘 듣도록.

난 절대로 한가하지 않다.

…잘 알아들었겠지? 이 이상의 설명이 더 必要韓紙?
만약 이렇게 말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지금은 시간이 없으므로.

"큐빅 박사."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벤치에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덱스터 요원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덱스터 요원."
"그 별명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만… 뭐, 이젠 아무래도 좋나."

어라, 이거 본명 아니었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부르기에 어느 샌가부터 나도 이 사람을 덱스터 요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 본명이 존이었나.

"자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먼. 아까 아침에는 처참할 정도로 기분이 다운되어 보이던데."

아, 아까 아침에 날 보셨나 보다. 오늘 아침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았지. 아침부터 '그 녀석'을 보기도 했고…….

"아, 요 며칠간은 밤을 새우느라 컵라면만 먹었었는데 오래간만에 푸짐하고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어서요."
"확실히 밥은 중요하지."

일단 대외적인 이유를 댄 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어라?"

문뜩 하늘을 올려다보니, 신기한 것을 보았다.


"음? 왜 그러는가?"
"아뇨, 저기 구름이…."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구름이 어긋나있었다. 아니, 그 한 지점만 어긋난 것이 아니라, 하늘 전체의 구름이 한 선을 기준으로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진을 반으로 잘라 같은 장소를 찍었지만 미묘하게 다르게 찍은 사진과 붙인 것처럼.


"구름? 구름이 왜?"
"에? 아니, 저게 안 보이세…."

덱스터 요원을 보았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은 이전과 같이 자연스럽게 떠 있었다.

"자네, 피곤한가? 그러면 얼른 들어가서 쉬게. 점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 네."

그럼 이만, 이라고 인사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하늘은

항상


그랬듯이


멀쩡했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길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뭔가 지금 당장이라도 "으어어어"라는 말을 육성으로 외치며 그냥 확 누워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띵하다. 먹먹하다.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가 꽉 껴버린 것 같이 답답했다. 뇌 용량이 부족해진 것 처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계속 걸었다.

찐득.

…아, 젠장.
내가 밟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