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평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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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실이자 시체 보관실은 기지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있다. 다른 직원들이 지하 5~7층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부검실은 혼자 지하 1층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소문으로는 가끔씩 조용할 때면 지상의 소리도 들린다고 한다. 게다가 시체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담당자가 아니라면 직원들도 가기 꺼려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른 데보다 떨어진 곳, 직원들이 잘 찾지 않는 곳, 보다 조용한 공간, 이 세 가지가 합쳐져 부검실은…

…최고의 땡땡이 공간이었다.

부검실 담당자 나르미는 자기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샐리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이 사실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저 콜라 한 캔 사러 갔을 뿐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르미는 오른쪽 소매에서 매스를 꺼냈다.


“그렇게까지 폭력적으로 나서야겠어?!?” 접이식 의자에 앉아 벌벌 떨면서 샐이 말했다.

“그러게 누가 이런 데에서 땡땡이치래요? 담당자가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뭐하는 짓입니까 도대체.” 나르미가 책상에 박힌 메스를 빼려고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천문학 쪽은 일이 없잖아! 그냥 책상에서 눈치만 보며 앉아 있으라고?”

“이상하다아, 내가 아는 어떤 천문학 쪽 사람은 일이 없으니까 만들어서 일하던데에?”

샐은 말문이 막힌 채 접이식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르미는 여전히 책상에 박힌 메스를 빼내고 있었다. 너무 깊게 박혀서 칼날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차라리 콜라라도 한 캔 사오든가요. 빈손으로 와놓고선 뭘 바라는 건가요?” 결국 빼는 걸 포기한 나르미가 말했다.

“돈 없어. 어제도 샐리가 내 카드로 회식비 결제했단 말이야.” 샐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르미는 차갑게 쏘아봤다. 여차하면 왼쪽 소매에서도 매스를 꺼낼 기세였다.

“재밌는 얘기라도 해줄까?” 몸이 괜히 떨리는 걸 느끼면 샐이 말했다.

나르미는 시선에 짜증스러움이 더해졌다.

“연애 얘기죠?”

“어.”

“또 차였죠.”

“으응.”

“샐리 씨가 샐 씨 차인 얘기는 다 해줬어요.”

“샐리 얘기야.”

나르미의 눈이 둥그레졌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지금 본인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해도 되는 거예요? 전 뒷감당 못해요.”

“네 메스가 거기 박혀 있는 이상 샐리도 무서워서 못 나와.”

나르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호기심은 생기긴 했다. 샐은 조심스레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에서는 놀랍게도 샐리가 샐에게 빌고 있었지만 상큼하게 무시해줬다.

“그러니까 3개월 전 이야기인데….”


천문학 쪽의 인원은 늘 적었다. 천문 계열의 SCP가 상대적으로 적은데다 그에 대한 격리 절차는 역정보부에서 맡고 있고, 실험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원이 적어도 잘 돌아가기는 했다. 천문 계열의 사무실 직원 3인방은 만약 자기 쪽에 인원 충원이 온다면 그날이 샐(리)가 연애하는 날이란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기적이 언젠간 일어나긴 하나 보다.

“자, 다들 주목!”

천문학 팀의 팀장인 레이지 박사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의 뒤를 따라 한 자그마한 여자가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팀에 새 인원이 들어왔다. 앞으로 재단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친하게 지내도록. 특히 새…아니 샐리.”

샐리를 포함한 두 명은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신입 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캐런 데이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샐리는 책상에 엎드려서 자기 책상을 안내받는 캐런을 바라봤다.

“예쁘다…..” 샐리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흘렸다.

“어?” 샐이 말을 걸었지만 샐리는 그냥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캐런에게 향해 있었다.


이상해.

뭐가.

캐런.

응?

캐런이 보고 싶어.

어이, 방금 밥 같이 먹고 왔거든?

그래도, 보고 싶어. 더 얘기 나눠보고 싶어. 걔가 웃는 걸 보고 싶고 걔가 내 말에 맞장구 치는 걸 보고 싶어. 그 하얀 손을 잡아보고 싶어.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한 번 꼬옥 안아보고 싶어. 입술까진 아니더라도 이마 같은 곳에 입술을 맞춰보고 싶어.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도 엄청 행복할 거 같아.

사랑이네.

그렇지? 네가 봐도 그렇지?

근데 말이야…

“그걸 꼭 업무 중에 말해서 날 방해해야겠냐!!!!” 샐이 책상을 내리치면서 말했다.

캐런을 포함한 모두가 샐과 샐리의 책상을 바라봤고, 샐은 어느새 샐리로 변해 창피함에 엎드려 있었다.


“샐리 씨 은근 숙맥이네요. 고백도 시원시원하게 할 줄 알았는데.”

“남 연애 방해하는 데만 도가 터서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럴지도.”

나르미는 왼쪽 소매에서 꺼낸 메스를 손에 놀렸다. 얘기 중에 샐의 머리가 갑자기 길어지는 걸 보고 내린 결단이었다. 메스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샐리는 두더지 마냥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샐리 씨는 고백을 못했다는 배드 엔딩인가요?”

“그럴 거면 얘기 시작도 안 했어. 여기서 부터가 재밌는 부분이지.”


연구실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리고, 심각한 표정의 레이지 박사가 들어왔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제외한 고참 두 명도 심각해져서 그를 쳐다봤다.

“출장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출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샐(리)가 근무하는 기지는 전라도 남부에 있고, 천문대는 강원도에 있기 때문이다. 사정상 헬기를 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진짜 죽을 노릇인 거다.

하지만 이번 출장은.

“두 명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선 캐런 씨는 신입이니까 한 번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기회다.

“제가 가겠습니다!” 샐리가 소리쳤다.

미친년아!!!!

캐런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도 놀란 눈빛으로 샐리를 바라봤다.


“선배님들 너무해요!”

평소에는 말수가 적던 캐런이 둘이서 앉은 차 안에서는 불만을 쏟아냈다.

“뭐가.”

운전대를 잡은 샐이 퉁명스레 말했다.

“4시간 동안 차에 앉아만 있으라니, 이거 수당은 나오는 거예요?”

“기름값은 줘.”

“차라리 천문학 기지를 따로 만들지,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람이 별로 없지 않냐. 세네 명만 있는 기지를 지으면 그것대로 예산 낭비에다가 외진 곳에 지을 테니 정신적 고문이야. 유배지로는 쓸 만하겠네.”

“칫” 캐런이 볼을 부풀렸다.

“왜, 천문학팀에 들어왔는데 관측 하나 안하고 은퇴할 줄… 샐,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할 필요 없잖아.”

캐런은 샐리를 바라봤다. 샐리도 잠깐 쳐다보다가 흘깃 웃었다.

“괜찮아, 이 언니랑 드라이브 한다고 생각하자.”

“4시간 동안 말이죠.”

“그렇지. 한숨 자는 게 어때?”

“그러는 게 좋겠네요. 휴게소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캐런은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샐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운전만 했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샐리는 옆을 쳐다봤다. 캐런이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샐리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샐리는 오른손을 핸들에서 떼고 기어 옆에 널브러진 캐런의 손 쪽으로 뻗었다. 깊게 잠들었는지 살짝 건드려도 캐런은 깨지 않았다. 이윽고 캐런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부드러운 손이었다. 샐리는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마치 존경의 의미로 바치는 키스를 하는 것처럼.

앞에 봐라.

“넵.”

샐리는 바로 고개를 들어 급커브 구간을 돌았다. 관성의 힘으로 몸이 밀려난 캐런이 깨어났다. 샐리는 그저 입맛만 다셨다.


“그냥 평범한 천문대 같은데요.”

잠긴 천문대의 바리케이드를 여는 샐에게 캐런이 말했다.

“평범한 천문대 맞아.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 시즌이면 중고딩 대상으로 캠프도 열고.”

“그래도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은퇴하신 재단 분께서 하시는 거거든.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기억 소거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샐은 잠깐 시간을 확인했다.

“흠, 관측은 내일 오후랬지. 다행히 오늘 볼 수 있겠네. 따라와.”

“뭘 봐요?”

“우리 운전 수당.”


밤이 오면, 천문대는 유독 어둡다. 그리고 그 천문대에서도 가장 어두운 방에 캐런은 앉아있었다. 샐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관리인하고 잠깐 얘기. 이런 거 사적으로 쓸려면 관리인 아저씨의 허락하고 협력을 받아야 하거든.”

“뭘 하려고요?”

“이거.”

샐은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바닥 중앙에서 빛이 나오더니 검은 벽과 반구형 천장을 별과 은하수로 채웠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우주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지금 실제 어딘가의 밤하늘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야. 출장 오는 사람마다 한 번쯤을 들릴 걸. 매일 달라지는 데다… 아름다우니까. 우리가 이 맛에 천문학 공부하는 거지.”

캐런은 황홀함에 묻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샐은 캐런 옆에 다가가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고 정확히 3분 후, 캐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너무 예뻐요.”

“내가 널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 샐리가 말했다.

캐런이 놀라서 샐, 아니 샐리를 바라봤다. 어느새 손도 잡고 있었다.

난 할만큼 했다.

‘나이스, 샐.’

“미안해, 캐런 하지만… 진짜 미안 나도 이런 나를 잘 모르겠어.”

캐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의 굳은 상태로 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다면…”

샐리는 몸을 캐런 쪽으로 기울였다. 캐런은 피하지 않았다. 샐리는 캐런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곤 몸을 더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캐런의 이마에 닿았다.

잠시,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흘렀다.

샐리는 몸을 뒤로 뺐다. 샐리도, 캐런도 얼굴의 홍조를 약간 띄운 채 상기된 표정이었다.

“좋아해.”

캐런은 가만히 있었다. 진실인지 아닌지, 꿈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다른 별똥별이 떨어졌을 때, 캐런은 입을 열고 샐리에게…


“그마아아아아아아아아안!!!!!”

나르미는 놀라서 메스를 떨어트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샐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나르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깐잠깐잠깐잠깐.”

“듣기 싫어!”

샐리는 책상에 박힌 메스를 아무렇지 않게 뽑아 들었다. 나르미는 당황할 틈도 없이 위에서 내리찍는 샐리의 팔을 막아냈다.

“아, 아니 잠시 만요! 샐리 씨도 샐 씨 차인 얘기 저한테 많이 얘기했잖아요! 왜 자기 얘기에만 그러는 건데요!”

맞아!

“닥쳐, 샐! 그거하고 내가 쪽팔린 거하곤 다른 거야!”

“진정하시고 일단 메스부터 내려놓고 말합시다! 저도 아까 일부러 빗나가게 꽂았잖아요!!”

“네놈 피를 보지 않는 이상 내가 억울해서 그리 못할 거 같구나!!”

메스가 나르미의 얼굴에 닿기까지 1cm 가량을 남은 시점에, 노크 소리와 함께 사람 목소리가 울렸다.

“저, 나르미 씨라고, 혹시 계신가요?”

“살려주세요!”

문이 벌컥 열리며 캐런이 들어왔다. 샐리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메스를 내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똑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어, 살려달란 소리를 들었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캐런을 앞에 두고, 나르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대충 수습했다.

“그냥 무시하시면 될 거에요, 아마. 무슨 일이시죠?”

“음, 전 천문학팀 신입인 캐런 데이지라고 하는데요. 레이지 박사님이 샐 씨 땡땡이 쳤으면 여기로 왔을 거라고 해서,.”

“잘 됐네요. 바로 앞에 계시니 데려가세요.”

“네에. 가요 샐리 씨.”

샐리는 한숨을 쉬며 캐런을 뒤따라갔다. 샐리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캐런이 샐리에게 말했다.

“근데 샐 씨로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왜.”

“박사님이 여자는 떄리기가 좀 그렇다고 해서.”

“뭐래, 어제 나 헤드락 건거 못 봤어?”

“하지만…”

“알아, 알아, 무슨 말인지. 샐 자식, 복 받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 고마워 샐리.”

나르미는 바닥에 떨어진 메스를 주우며 화기애애하게 사라지는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냥 평범한 해피엔딩이려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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