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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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잠깐 감았다 떴을 뿐인데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물품 배달이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류층에겐 그들이 원하는 어떤 물건이든 옮겨주고, 하층민에게는 가끔씩 있는 택배 업무 빼고는 보급품만 전달해 주면 되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E구간과 F구간의 가구들에게 보급품을 나눠주면 됐었다.

조금만 더 달라는 사람들의 불평을 무시한 채, 카트에 담은 식량을 조금씩 배분해 나갔다. 그러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에게 몰래 조금 더 주기 위해 카트 위 박스에서 몸을 숙였다가 드는 찰나에 모든 게 바뀌었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인생, 평범한 창고 직원이었던 나의 모든 일생까지도.


보고를 마치고 복도 어딘가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임무 중 사고로 근신하던 중에 끌려나온 거라 기분이 얼떨떨했다. 늦잠 잔 후유증에 크게 하품을 했다. 복도에 아무도 없어서 시선은 신경쓰지 않았다.

"헤이!" 팀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내가 왔다는 말에 괜히 나 있는 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괜히 불러서 미안하다. 꽤나 큰 임무라서 다 출동해야 했거든.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지 않냐" 팀장은 나한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나는 짜증스레 임했다.

"임무는 잘 마쳤어요?"

"잘 마쳤지. 사상자도 없었고, 여기나 저기나."

"그건 사고였다니까요."

"별 일 없던 건 아니잖아?"


뭐가 달라졌는지 확실하게 말할 순 없었다. 겉보기엔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지도 모른다. 그냥 그 여자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좀, 다듬어졌다고나 해야 할까?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그녀는 나를 향해 이상한 위화감을 안겼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그녀의 다음 한 마디로 현실이 되었다.

“괜찮으신가요?”

모르는 언어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다. 어느 지역에서 잠깐 쓰이다가 사라져버린 방언일 가능성 같은 건 본능적으로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안팎에서 뒤집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가서 동료들에게 알려야했다. 그러는 동안 내 소란을 다들 느꼈는지 방문을 열고 나를 지켜봤다. 모두가 위화감을 뿜어댔다. 이 구간 전체가 위화감으로 가득 찼다.

무언가 잘못됐다. 잘못된 사람 속의 정상인이 되어서 내가 비정상이 된 거 같았다.


“네, 기본적인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별 거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직원을 처리했고, 프로그래밍 팀은 보고를 받은 뒤 마천루의 창고 직원과 건설 직원 몇 명을 충원했습니다. 동시에 이틀 동안 시간을 멈춰뒀던 다른 구역의 시간도 움직이게 했죠. 마지막으로 우리가 귀환한 이후, 우리가 통로로 썼던 엘리베이터도 삭제했습니다. 이제 '쌓아쌓아 빌딩빌딩' 베타 서버는 완벽하게 지구 서버의 관리 하에 있습니다.”

담담하게 보고를 마쳤다. 살짝 목소리가 졸리긴 했다. 왜 근신 중인 인원을 막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적응 못한 내가 참기로 했다.

“수고했어요.” 운영부장님이 말했다. “당신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본부 쪽에서 좀 궁금해 해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운영부장은 작전 영상을 다시 돌려서 재생했다. 캠프파이어, 만찬, 마지막 공성전, 그리고…

“그런데 여기,” 운영부장이 영상을 멈췄다. “시체가 안 없어지네요? 혼자만 맞은 총이 좀 달랐나요?”

나는 잠시 멍하니 운영부장을 쳐다봤다. 저 여자는 당사자 앞에서 묻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모르나 싶었다.

“별 일 아니었습니다.”


G구간에 막 올라오자 동료들이 지금 상황을 말해줬다. 각 구간의 사람들이 모르는 말로 대화한 것부터, 외모에서부터 풍기는 위화감과 어딘가에 목적을 알 수 없는 엘리베이터가 생긴 것까지. 그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이제까지 위화감을 보인 인간 4명이 나왔다. 옷은 이제까지 어떤 주민도 입은 적이 없던 옷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지만, 평소 용감하던 동료 하나가 그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두에 선 자가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그에게 쐈다. 동료는 잠깐 경련하더니, 큐브 조각으로 나뉘다가 큐브 조각들도 먼지로 나뉘어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와 동료들은 도망쳐버렸다. 이는 그쪽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그 일행 중 한 명도 놀란 표정이었다.

나와 동료들은 화물 뒤에 숨어 그들을 엿보았다. 그들은 마치 숙련된 군인처럼 이것저것을 지시하더니 곧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들이 흩어짐과 동시에 우리도 도망쳤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렸다. 우리가 아는 동료들, 우리가 모르는 동료들이 다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동료 중 한 명이 우릴 이끌고 있었다. 내가 겨우 그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총기류가 있는 장소를 안다고 했다.


“인부 중 몇 명이 총기류가 있는 화물을 찾아내었고, 곧 다른 화물들도 꺼내서 요새를 지었습니다. 프로그래밍 팀에서는 바로바로 총기류 화물을 삭제했지만, 이미 꺼내어져 사용하고 있는 화물들은 삭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작전은 예상한 것보다 장기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팀은 일단 뒤로 물러나야 했다. 누군가는 팀장에게 다짜고짜 총을 쏴서 공포감을 조성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따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저기 세 명 뿐이었지만, 시간은 나머지를 처리한 시간보다 더 더디 흘러갔다.

“현재 가진 작전복으로는 총알을 막기엔 약간 부족했습니다. 저희들끼리 여러 가지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누군가가 현재 개발 중인 RPG 게임 개발팀에게 총알을 막을 수 있는 운영자용 갑옷을 만들어 달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걸 만들고 여기에 적용하는 데에 이틀이 걸리지만 창고 안에는 먹고 자고 할 것들이 많았으니 괜찮다는 논리와 함께요. 그리고 모두들 게임에서 먹고 잔다는 사실이 재밌겠다며 그걸 채택했습니다. 개발팀이 구르는 건 저희 알 바가 아니라더군요.”

무엇보다 이틀 간의 공백기가 달콤했다. 누군가에겐 긴장 상태였겠지만, 우리에겐 여기저기를 탐험할 기회였다. 다음 날에 우리는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시리얼 박스로 저녁에 캠프 파이어를 했다. 그 사이에는 요새의 반대편으로 화물 탐험을 나섰다. 팀장은 악기 화물에서 꺼낸 기타를 쳤고, 누군가는 휴대용 마이크를 찾아서 제대로 불러본 적도 없는 노래를 불렀다. 무척이나 유난스러운 하루였다.

운영팀장은 그 장면을 여럿 재생하면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도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갑작스레 웃음이 났다. 보고는 잠깐 흐트러졌다.

내 손에는 권총이 있었다. 화물 사이의 통로에 떨어진 물건이었다. 인부들이 가져가다가 실수로 떨구고 간 갔으리라. 비록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립감은 꽤나 현실적이어서 장난스레 챙겨봤다. 팀장은 혹시 모르니 작전 돌입할 땐 장전해 두라고 했다.


우리의 요새는 저들을 막아냈지만, 그 분들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후퇴한 후, 한 이틀 동안은 창고 한 쪽이 시끌벅적해졌다. 이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장기전에 돌입했다는 걸 의미했다. 창고 안에는 먹을 게 많았다. 창고 안에는 편이 지낼만한 가구들도 많았다. 춥다 싶으면 몇 개 분해해서 모닥불을 붙이면 됐다. 장기전에는 우리나 상대나 유리했다. 누가 더 많이 훔치나의 대결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를 노려 물품들을 훔쳤다. 우리도 나름 이틀간은 편하게 지냈다. 노동에서 벗어나 이렇게 휴식을 지낸 게 얼마만인지… 동료와 이렇게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에, 난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

하지만 그 행복은 이틀 만에 끝이 났다. 그들이 새 옷을 입고 요새에 쳐들어왔다. 우리는 총을 갈겨댔지만 총알은 새 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말았다. 우리가 가구를 쌓아 만든 바리케이드를 그들은 서서히 올라왔다. 총알비에 아무렇지도 않아하면서. 총기류로 우리를 이끈 동료는 총을 놓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경고할 틈새도 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총소리가 줄어들자, 그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특유의 총성이 내 뒤에서 울렸다. 내 동료들의 가루가 되어버리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비참함에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일단 계속해서 달렸다. 눈물이 났지만 포기한 건 아니었다. 동료가 죽은 그 순간에서도 총기류를 찾았던 동료처럼 나는 달렸다.

창고는 내 손에 꿰고 있었다. 난 그들의 뒤를 노릴 수 있다. 그리고 총기류를 뒤질 때 나는 권총 하나를 미리 빼왔었다.


“이번 작전은 ‘쌓아쌓아 빌딩빌딩’ 베타 버전에 잠입, 프로그래밍과 구현만으로 현지화 할 수 없었던 일꾼과 같은 개체들을 직접 수정하는 임무였습니다. 이번에 지구 서버가 생김에 따라 지구에 존재하던 베타 버전을 지구 서버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관리의 용이함을 위해 적절한 현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하나하나 존재하고 있어 프로그램을 수정하여 지구인으로 현지화가 가능했지만, 인부들은 프로그램 상 독립체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 삭제해서 새로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보고는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냥 간단한 사무실에 운영부장과 마주앉아 작전 때 촬영한 영상을 같이 돌려보며 설명만 하면 됐다.

“작전은 최상층부터 아래로 진행했습니다. 대부분의 인원들이 B, C, D구간에서 일하기 때문에 N구간에서만 존재하는 인부들과 G구간에서 물품을 나르는 인부들만 처리하면 됐습니다. 최상층에는 한 명이 남아서 처리했고요, 나머지 4명은 G구간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때 이동은 구현 팀에서 마련한 특수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습니다.”

원랜 있지도 않던 보고를 하려니까 말이 자연스레 귀찮아졌다. 운영부장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 얼굴에도 피곤함이 묻어났다. 화면에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팀장의 총이 반짝 빛나는 장면이 나왔다. 크게 움찔하는 내 모습도 보였다. 운영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 내 얼굴을 다시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어쩌라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 과정은 잘 알았다. 한동안 모두의 총구에서 불빛이 빛났다. 불꽃놀이었다.


나는 녀석의 뒤를 잡았다. 그들을 처음 조우했을 때, 선두가 다짜고짜 총을 쏘자 가장 놀라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총이 한 자룬데, 그 사람만 두 자루여서 더 수상했다. 수상한 사람은 빨리 치우는 게 나았다.

머리, 머리를 노린다.

나는 엄폐물로 삼던 화물 뒤에서 나와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내가 총을 쏘자, 그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좀 이질적인 총에 손을 가져갔다.


뭔가 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사라졌었던 인부가 뒤에서 튀어나왔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것과 같은 권총이었다.

바로 의도를 알아채고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총성이 일고 나는 피했다.

본능적으로 이제 내 차례임을 알았다. 바로 허리춤의 총을 빼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핏자국이 피었다. 내가 손에 빼든 건 그 인부와 같은 권총이었다.

피가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