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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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가 재단을 상대로 개전을 선포한 지 막 6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O5 평의회는 선전포고를 받은 즉시 제2차 삼각분쟁 발발을 선언하고 대응에 나섰다. GOC는 개전 1시간 만에 BE에게 선전포고했으나, 전시 동맹을 맺자는 재단의 요청은 거부했다. BE 교전세포가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기습을 벌였고 재단 전투부대가 이에 맞섰다. 전선은 없었고,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19기지는 어떻게, 소식이 좀 있었나요?"
"일단 급한 불은 껐다던데. F-15X로 적 전진기지 날려버리고 선두 병력을 제압하니까 후퇴했다는 모양이야."
"그래도 방심 못합니다. 분명 금방 돌아올 걸요."

제64K기지 지상 출입구에서 320m 떨어진 별관 T동 특무부대 병영에선 지역특무부대 뮤-39 "등대지기"가 BE의 공격에 대비해 야간 5분대기 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새벽 4시, 사방은 온통 안개와 어둠 뿐이었고, 등화관제를 하고 있던 병영 내부도 어두컴컴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진에도 놈들이 올까요?"

평소와 달리 현장 복장이 아닌 단독군장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던 유리 요원이 레밍턴 M700 저격소총에 기대며 물었다.

"전에도 뱁새 녀석들이 총까지 챙겨서는 항구에서 깽판 쳤잖아. 지금도 목포 제13K기지랑 정선 제777K기지에 무장 병력들이 쳐들어와서 교전 중이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대기해."

등대지기의 교전팀장 기선 소령은 그렇게 말하며 SCAR-헤비 소총의 가스조절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요타-33 동북아 2분견대는 목포에… 알파-88은 정선에… 요런 타이밍에 무진에 BE가 들이닥쳐오면 지원도 없이 우리끼리 지지고 볶아야 하게 생겼네요."

교전팀 1소대장 다리우스가 수통에 막걸리를 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걸 알면서 전시에 술 마실 생각 만만이냐?"
"에이, 왜 그러십니까. 막말로 막걸리 한 병이 술입니까? 영양젭니다, 영양제."

기선의 잔소리에 질렸다는 듯 수통에 못 넣고 남은 막걸리를 홀짝이면서 다리우스가 투덜댔다. 기선은 그런 다리우스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혀를 차다가, 개머리판이 바닥에 닿게 총을 기대어 내려놓으면서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뭐가 됐든 이놈 말대로 클라우지우스의 검과 최전선은 유사시에 바로 지원하러 올 수 없다. 기지 대응반이랑 우리가 초도방어 그 이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2소대랑 교대할 때까지 대비 태세를 철저히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교전팀 1소대 36명과 저격조 2명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다시 묵묵히 대기하면서 저마다 총기를 점검하거나 경계 상황판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표정에는 결연한 긴장감도 감돌고 있었지만, 실전부대 특유의 여유와 자신감이 그것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유리는 고배율 조준경을 매만진 뒤 망원야시경을 들어 창 밖으로 북쪽을 내다보았다. 300 km 너머 저편에서는 이미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

 

BE와 재단이 교전을 개시한 지 6시간 15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태백산맥은 짙게 드리운 어둠에 가려져 있었고, 그 능선 그림자 속으로 시커먼 헬리콥터 두 대가 몸을 숨긴 채 비행하고 있었다. 기동특무부대 알파-88 "최전선"의 별동대였다. 헬기 편대의 진로 전방 수 km 지점에선 BE 교전세포-379 반달가슴곰이 제777K기지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알파-88 본대는 기지를 탈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5분 후 목표 상공에 도착합니다."

조종사가 항법 장치를 보며 말하자 공수소대장 백마 상사가 대원들에게 임무의 핵심 개요를 재차 브리핑했다.

"곧 도착한다! 내부에 수면 가스가 살포되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진입 전에 다들 방독면 착용할 수 있도록 한다. 패스트로프 강하 후에는 즉시 진입구를 확보하고, 바이슨 전개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지휘통제실을 제압한다. 적은 중무장한 정예병들이니 절대 개별 행동하지 말고 화력을 집중해 돌파해라! 알겠나?"
"예!"

백마 상사는 몸을 돌려 윈드실드 밖으로 보이는 전장을 살폈다. 반륜산 중턱에는 박격포까지 동원된 치열한 공방이 한창 이어지는 중이었다. 산림청의 협조로 산불 경보가 발령되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반륜산은 아닌게 아니라 산등성이를 뒤덮은 자욱한 포연과 연막 속으로 전투의 불꽃이 엿보이고 있었다. 항공등까지 전부 소등한 HH-60X 호크 아울 헬리콥터 편대가 특유의 조용한 로터 소음을 내리깔면서 반륜산 7부 능선으로 접근했다.

제777K기지는 산등성이를 한 바퀴 완전히 둘러 깎아내고 구조물을 지은 뒤 흙으로 덮고 다시 산세를 복원시켜 위장한 대규모 거점기지였다. 시설 일체가 해발 500m 이상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모든 기밀실이 지하에 있는 이 기묘한 시설은 반륜산의 지리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제88공수특무소대가 이용하려는 지상 출입구도 그 중 하나였다. 이 비밀 통로는 시설보다 한참 높은 해발 750m 지점에 뚫려있어, 겉으로 보기엔 시설과 한참 동떨어져 있지만 사실은 기지의 중심부로 직결되어 있었다. 유사시에 재단 인원들이 안전하게 기지를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된 비상 출입구인 것이다.

"목표 상공에 도착했습니다. 기체 안정 후 우측 출입구를 개방하겠습니다. 개방 3초 전… 2초… 1초… 개방."
"강하! 강하!"

문이 열리자 애로우헤드 병장이 자일을 풀었고, 장진호 하사와 백마 상사를 필두로 전 대원이 차례차례 강하를 시작했다.

 

...

 

제2차 삼각분쟁이 발발한 지 7시간 5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SCPS 프라이빗 존스와 SCPS 포항이 제13K 독립항을 출항한 지도 이제 곧 10시간 20분을 넘겨가고 있었다. 서해 해역 초계 임무는 제13K기지가 습격당한 오전 1시 부로 기지 방어 지원 및 적대 해양 세력 소탕 임무로 전환된 상태였다.

"함수 번호 817, 현재 속력 20노트로 항진 중인 소속 미상 함선은 즉시 정선하라. 귀함은 통제 수역에 진입하고 있다. 반복한다. 함수 번호 817, 현재 속력 20노트로 항진 중인 소속 미상 함선은 즉시 정선하라. 귀함은 통제 수역에 진입하고 있다. 즉시 정선하라."

SCPS 프라이빗 존스의 일등 항해사 기어링 소령이 반복해서 경고 방송을 내보냈지만 상대 선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전대장 겸 함장 손덕일 대령은 쌍안경을 들여다보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프라이빗 존스와 포항함은 황해 먼 바다에서 작전하던 도중에 기지를 구원하기 위해 회항하던 중이었으나, 갑자기 어뢰를 발사해 온 저 낡은 군함 때문에 발이 묶인 것이었다. 어뢰를 회피하고 괴선박 추적에 나선 그들은 점점 목포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조준선 정렬, 초탄 장전 완료. 언제든 공격 가능합니다."

함내 통신망으로 포술장 이천 준위가 보고했다.

"좋습니다. 지시 있을 때까지 그대로 대기하세요."
"전대장님, 평택 2함대 사령부의 연락입니다. 익산함을 근처에 대기시킬테니 재단 관활 외 사안으로 확인 시 즉각 인계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부관참모 백두산 소령이 보고했다.

"그렇게 하지. 협조에 감사드린다고 답신해."
"알겠습니다."
"정보부에서 함선 식별했답니다! DD-817, BES 듀공. BE가 구매한 중고 구축함으로 확인됐습니다!"

함교 문을 박차고 들어온 암호통신수가 막 출력한 문서를 흔들며 소리쳤다.

"제5특무전대 전 함선, 목표! 적 BE 전투함! 제 일 표적, 함포와 어뢰발사관! 제 이 표적, 함교!"

손 대령이 수화기를 들고 쩌렁쩌렁하게 명령했다. 기다렸다는 듯 SCPS 포항과 프라이빗 존스의 포탑이 기어 소음을 울려가며 적함을 겨누었다.

"발포!"

SCPS 프라이빗 존스의 5인치 62구경장 함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SCPS 포항도 76mm 주포와 30mm 부포를 쏘아대며 공격했다.

"초탄 빗맞았습니다. 마스트에 맞았고 피해는 경미해보입니다."
"포항에서 명중탄 다섯 발, 적함 주포 침묵했습니다."
"적함 침로, 속력 모두 그대로입니다."
"표적 전과 동! 발포!"

함포들이 재차 사격을 개시했다. BES 듀공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포탄에 얻어맞고 있었다. 손 대령은 엉망이 되어가는 듀공의 상부구조물을 쌍안경으로 관찰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공격 중지!"
"공격 중지!"

선원들의 복명복창과 동시에 포격이 멎었다. 손 대령이 수화기에 대고 지시했다.

"이 함장, DDH가 엄호할 테니까 접근해서 적함 육안으로 관측해봐요. 저거 드론 같은데?"
"알겠습니다."

SCPS 포항의 가스터빈 기관이 힘차게 연기를 뿜어내며 스크류를 돌렸다. 화재까지 일어나 점점 속도가 줄어가던 BES 듀공에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나 적이 역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두 함선 모두 함포를 겨눈 채 듀공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SCPS 포항의 함장 이승호 중령이 함교 위로 올라가 쌍안경으로 듀공의 갑판을 살펴보는 동안 손 대령은 초조하게 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령은 함교로 돌아오자마자 프라이빗 존스에 무전을 보냈다.

"사람 그림자도 안 보입니다. 전투원은 커녕 소방 활동이나 피해 복구같은 움직임도 없고, 함교도 빈 것 같습니다."
"썩을… 백 부관, 목포 상황 들어온 거 전부 보고해."
"전황 좋지 않습니다. 요타-33으로부터 가급적 빨리 화력지원 임무로 복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백 소령이 얼굴을 찡그리며 교신 기록을 읽었다. '당했다,' 손 대령의 뇌리에 불쾌한 직감이 스쳤다.

"배는 미끼였어. 전 함선 제13K기지로 회항하라! 지상의 적 공격부대가 사정 내로 들어올 때까지 전속력으로 간다!"
"기관 반속, 우로 전타! 우로 270도 변침 후 기관 전속으로 속행!"

항해사 기어링 소령의 지시대로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커다란 뱃고동 소리와 함께 두 척의 전투함이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함수를 정반대로 돌려, 목포를 향해 전속 항진을 시작했다.

 

...

 

재단이 산하의 전 자산에 전투 경계 태세를 발령한 지 7시간 1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제13K독립항을 운용함으로써 한반도 근해의 재단 해상 작전을 책임지고 있는 전략 거점인 제13K기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요주의 단체들은 대민 접촉을 꺼려왔고, 역설적이게도 민간인 거주 지역과 상당히 인접해 있어 가장 기밀성이 떨어지는 시설 중 하나인 제13K기지는 오히려 그 덕분에 외부로부터 별다른 위협을 받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BE 교전세포 살쾡이멧돼지가 민간인의 존재를 무시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벌여온 것이다. 꼭두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밤새 이어지고 있었다.

"목표, 찰리 5-5 건물 우측에서 이동합니다."
"목표 확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사수 테르모 하사가 망원야시경을 왼눈에 댄 채 적을 식별하자, 요타-33 "클라우지우스의 검" 동북아 2분견대장 매스 소령이 목표를 향해 SRS 저격소총을 신중하게 겨누었다. 몇 번인가 숨을 고르던 매스 소령이 호흡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거친 절제된 총성이 울리자 멧돼지의 지휘관 스크로파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목표 처치."
"바로 다음 목표 찾아."
"예."

적의 머리에 명중시켰다는 것에 고양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보안을 위해 기지에서 이격시켜 두었던 보안대 주둔지가 맨 처음에 기습으로 폭파된 탓에 지금 제13K기지를 방어할 병력은 오직 그들 뿐이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살쾡이만 공격해온 덕분에 경비대가 농성하는 사이 요타-33이 도착할 수 있었지만, 멧돼지까지 증원된 이후부터는 정면 대결 자체가 불가능했다. 매스 소령이 저격을 통한 지연작전을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른 폐건물에서도 총성이 퍼졌다. 이번엔 살쾡이의 부지휘관이 거꾸러졌다. 급소는 비껴간 모양인지 엎어진 채 신음하고 있던 그는 곧 동료들에게 잡아끌려 엄폐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한동안은 전장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지에 도착하고 무려 세 시간이 넘도록 요타-33은 이렇게 적을 하나씩 줄여가면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수에서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적들은 어느새 요타-33이 자리잡은 저격 포인트에 가까워져 왔다. 저격 포인트가 돌파당하면 기지까지는 지척이었다. 호신용이라고밖에는 불러주기 어려운 P90 정도로 무장하고 있는 경비대 30여 명은 제13K기지 최후의 순간에 큰 도움은 못 될 터였다.

"5전대 지금 복귀하고 있답니다, 소령님."
"드디어! 수화기 이리 줘봐."

매스 소령은 통신병에게서 무전기 수화기를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SCPS 프라이빗 존스, 여긴 클라우지우스-에코-2-알파. 함포 사격 요청한다. 좌표는 5-2-시에라, 브라보-델타, 6-1-3-0-6, 5-7-7-6-3. 반복한다. 좌표는 5-2-시에라, 브라보-델타, 6-1-3-0-6, 5-7-7-6-3, 이상!"

곧 바다 저멀리에서 답신이 왔다.

"에코-2-알파, SCPS 프라이빗 존스다. 수신 양호. 5분 내로 목표 사정거리에 진입한다.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란다. 도착하면 다시 좌표를 확인하겠다. 이상."
"확인했다. 지원에 감사한다. 수신 완료."

제5특무전대와 교신을 끝내자마자 매스 소령은 요타-33 전 분견대원에게 긴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에코-2 전 대원, 여긴 알파-1이다. 5분 후 아군 포격이 있을 것이다. 브라보부터 순차적으로 위치를 이탈하고 기지로 후퇴하라. 나머지 조는 순서대로 후퇴하는 조를 엄호한 후에 이탈. 알파는 최후에 이탈하겠다. 이상."
"브라보 알겠음. 이탈 개시하겠다, 이상."
"찰리 양호."
"델타 양호."

어둠 속에서 요타-33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SCPS 프라이빗 존스와 SCPS 포항의 포탄이 BE 교전세포들을 덮친 건 몇 번의 총성이 더 울린 다음의 일이었다.

 

...

 

GOC가 BE에 선전포고한 지 450여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재단과 BE의 전투가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데 비해 삼각분쟁의 한 축인 GOC는 아직까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나머지 두 조직이 보기에는 그랬다.

GOC 극동부문 피닉스 분과 제3544타격조 "목마"는 창원의 어느 시민단체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이 착용한 타격조 전술 복장 '화이트 슈트'는 대원들에게 완벽한 가시광선 대역 은폐 성능을 제공하고 있었다.

"서니사이드, 내부 상황 보고하라."

타격조장 코세인이 건너편 건물에 배치시켜둔 정찰병에게 무전했다. 전투원 서니사이드는 "E-스포츠 진흥을 위한 창원 시민 연대 (ESC)"라는 간판 아래로 나 있는 창문을 영상 장비로 확대해 보며 사무실 내부를 살폈다.

"실내에 다섯 명 정도 있다. 모두 비무장 상태고 다급하게 짐을 싸고 있다."
"식별되는 인원은 없나? 신재오는?"
"신재오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고라니 부대표 활동가 쓰르라미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작업을 끝낸 것 같다. 짐을 메고 있다."
"알겠다. 진입팀, 작전 개시하라."

코세인이 지시를 내리자, 사무실 출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투원들은 소형 폭약을 터트려 문짝을 날려버렸다. 그후 곧장 실내로 들이닥친 "목마" 전투원들을 반긴 것은 쥐새끼 하나 없이 서류더미만 흩날려 있는 텅 빈 사무실이었다.

"뭐지?"
"사람 그림자도 안 보입니다."
"방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뒤져!"

코세인은 그렇게 지시하고는 계단을 뛰어올라 직접 현장으로 향했다.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안쪽 방에 현실성 균열이 닫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걸 사용해 도주한 것 같습니다."
"프톨레미 분과에 지원을 요청할까요?"
"아니,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 우선 여기 남은 단서들을 모두 확보해."

곧 "목마" 요원들은 곳곳에 어지러져 있는 서류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코세인도 그중 한 장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SCP-331-KO?"
"KTE-19133-러브록-레드입니다. BE가 노리던 개체가 아닐까요?"

문서들을 계속 살펴보던 코세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사령부 연결해. BE 놈들, 제정신이 아니야."
"무슨 일이십니까, 대장?"
"19133이 해방될 거다. 어서 대응하지 않으면…"
"사령부에서 긴급 상황 전파입니다! 오키나와의 격납 기지가 사보타주 당해서 극동 부문의 '오렌지 슈트' 장비들이 무력화되었답니다! 배정된 임무가 없는 모든 타격조는 부문 방어를 위해 집결하라고…"
"통신기 내놔!"

연락수 마르크스의 보고를 잘라버리며 코세인이 수화기를 뺏었다.

"사령부, 여기는 목마. 수신 양호한지? 이상."
"목마, 사령부는 잘 듣고 있다. 이상."
"목마는 무진으로 간다. BE의 목표는 KTE-19133-러브록-레드! 확보한 문건은 곧 전달하겠다. 조사와 병력 지원 요청한다. 다시 말하겠다. 목마는 지금부터 BE의 초상위협 해방 계획 저지 임무에 돌입한다. 목적지는 무진, 재단의 제64K기지다. 이상!"

 

...

 

재단 특무부대들이 BE를 상대로 전투 행동에 나선 지 7시간 57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인도양의 거센 바닷바람을 뚫고 날아온 MH-53 페이브 로 해병헬기가 SCPS 엔터프라이즈의 비행 갑판에 내려앉았다.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로터 아래로 고든 소령과 그의 팀이 일사분란하게 갑판을 밟았다. 방탄모를 벗는 고든 소령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동중국해로 이동해 제64K기지를 지원해야 합니다."

임무 보고를 받기 위해 소령을 함교로 불렀던 허버트 고든 리 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미안하지만 소령, 그렇게 할 수는 없네."
"BE와 GOC가 SCP-331-KO를 노리고 있다잖습니까. 무진에는 병력이 부족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장군님."

당당하기 짝이 없는 고든의 발언에 함교 요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같이 보고하러 온 MH-53 조종사 빅토리아 황 대위도 안절부절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장 키티호크 대령과 비행단장 돈틀리스 대령이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째려보고서야 웅성임은 겨우 멎을 수 있었다. 키티호크 대령이 입을 열었다.

"열정은 가상하지만 GOC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해 온 정보만 믿고 눈 앞의 적을 무시한 채 전장을 벗어날 수는 없네, 소령. 엔터프라이즈는 지금 인도양에 전개하고 있는 유일한 재단 항공 세력이야. 네팔, 이란, 인도네시아에도 BE가 공격을 해 오고 있는데 어떻게 작전 지역을 옮길 수 있겠나?"
"그건 전부 미끼입니다. 제가 제압한 놈들도 잔챙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진짜로 강습 전력의 지원이 필요한 곳은 무진입니다!"

리 소장은 머리가 아파왔다. 눈 앞의 젊은 군인은 자신의 혈기왕성하던 20대 시절을 사진처럼 똑 떼어다 놓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의 절박함이 이해되었고, 그의 미성숙함이 불편했다. 잠시 머리를 짚고 있던 소장은 재고할 생각이 없다는 걸 단호하게 밝혔다.

"작전에 변경은 없네. 수고했네. 들어가보게, 소령."
"장군님, 하지만…"
"나가보게."

고든 소령은 뭔가 더 말해보려 했지만, 곧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퇴실해보겠습니다."

그러고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채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황 대위는 당황하면서 지휘관들에게 경례한 뒤 황급히 그 뒤를 따라나갔다. 소장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의자를 돌려 작전도를 바라보았고, 두 대령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소령님, 소령님! 잠시만요!"
"대위, 여기서 MH-53으로 한국까지 비행해서 갈 수는 없나?"
"예? 아뇨! 무리입니다! 최단 경로로 가도 직선거리 6천 km라고요?"
"편도로 도착만 할 수 있으면 돼! 보조연료탱크를 최대로 달면, 아니지, 그레이하운드를 타면 어떤가?"
"C-2도 3천 km를 못 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반도까진 못 가요! 남해상에 비상착수해서 구조나 기다리는 신세가 되셔도 좋습니까?"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거잖아!"
"억지부리지 마, 고든!"

함교에서 그들을 뒤따라 나온 부함장 타이콘데로가 중령이, 황 대위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는 고든에게 일갈했다.

"특무부대 본부에서 이미 알파-88에게 긴급 출동 지시를 내렸다. 네가 그렇게 열을 내서 될 일도 아니고 열을 낼 일도 아니야! 소장님은 BE가 무진 다음에도 노림수가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 대응 전력으로 카이-17을 남겨두신 거다. 진정하고 다음 임무가 내려올 때까지 휴식 취하고 얌전하게 대기해. 알겠나?"
"…젠장할!"

고든은 애먼 선실 문짝을 힘껏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선 시간, 제777K기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알파-88 "최전선"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생포한 반달가슴곰 전투원들을 포박하고 있는 기지 경비대를 뒤로 하고, 제88공수특무소대는 막 연료 보급을 마친 호크 아울 헬리콥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이번엔 본대 인원도 파견팀을 차출해 CH-47 치누크 헬리콥터에 탑승하고 있었다.

"서둘러, 시간이 없다!"

임시로 편성된 '알파 강습대'의 지휘를 맡은 백마 상사가 대원들을 재촉했다. GOC가 경고했다는 BE의 공격 시간은 이미 코앞까지 닥쳐오고 있었다.

애초 GOC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BE가 제64K기지를 공격하기 전에 SCP-331-KO-A를 폐기하라는 것이었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무진에는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요타-33을 비롯한 다른 부대들은 전투가 한창이거나 이미 피해가 커 지원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한반도내 최고의 무장 분쟁 전담 부대인 "최전선"에게 제64K기지 구원 임무가 내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2번기와 치누크 편대 모두 병력 탑승 완료, 언제든 이륙 가능합니다."
"좋아. 출발한다!"

공회전하고 있던 헬리콥터 네 대의 터보샤프트 기관이 출력을 높이자 로터가 힘차게 돌았고, 강습대 제1분대를 실은 선도기부터 차례대로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들은 곧 최고 속력으로 무진을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

 
제64K연구격리기지 이사관보 선우아난 박사는 휴대전화를 붙들고 기지 복도를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BE의 공격과 SCP-331-KO-A의 탈출에 대비해 격벽을 전개하고 전진 방어초소에 병력을 배치하자는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BE가 이곳 무진을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우리 쪽에서 먼저 대민 은폐를 파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기지 이사관의 생각이었다.

"통신보안, 윤승옥입니다."
"윤 중령님. 접니다, 선우 박사.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예, 말씀하세요."
"이사관님이 요청 기각하셨습니다. 보안부대는 현 대기태세 그냥 유지할 겁니다."

전화를 받은 특무이사관보 겸 "등대지기" 지휘관 윤승옥 선임요원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알겠습니다. 박사님은 지금 어디십니까?"
"J동입니다. 지금 K동으로 가는 중이고요."
"지상은 우선 등대지기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박사님은 기지 내부 방어태세 다시 점검해주시고 특히 K동 보안 철저히 해주십시오."
"보안대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우아난 박사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다음 번호를 누르면서, 지하 4층 K동 35번 격리통제실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전화를 끊고 발빠르게 행동에 나선 것은 윤승옥 요원도 마찬가지였다. 곧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T동 전체에 작전장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실제 상황. 실제 상황. 대기 중인 전 병력은 차량에 탑승하여 대기할 것. 대기 중인 전 병력은 차량에 탑승하여 대기할 것."
"차량 탑승!"

뮤-39 교전팀 1소대가 상황 방송을 목청껏 복명복창하면서 대기실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기선은 차량격납고로 뛰어가면서 고래고래 지시를 내렸다.

"저격조! 저격조는 당장 옥상에 포인트 잡고 기지 인근 주시해!"
"옙."

유리와 빈센트는 그대로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달음박질해 갔다. 다리우스는 험비 3번차에, 기선은 1번차에 탑승했고 총 세 대의 험비가 요란하게 시동을 걸었다.

"끅, 얹히겠네."

한 모금 축이고는 수통 뚜껑을 닫으며 다리우스가 중얼거렸다.

"호출명 전파하겠다. 나, 교전팀장은 마이크-알파. 다리우스, 1소대장은 마이크-브라보. 1번차부터 3번차까지는 각각 빅터-1에서 -3. 하차 후에는 분대별로 마이크-1에서 -3. 저격조는 마이크-시에라다. 수신 양호한지? 이상."
"빅터-2, 수신 양호."
"마이크 브라보, 빅터 3, 앞으로는 미리 정해놓기를 희망함. 이상."
"마이크-시에라 수신 양호."

기선의 무전에 답한 뒤 유리는 삼각대를 펼친 레밍턴 소총을 내려놓은 채 망원야시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이 깊어가고 일출이 다가오는 시간, 무진의 해안선은 하루 중에서도 가장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GOC의 경고를 받고 예비 대응 태세가 발령된 뒤 정보국에서 인근 대해상 레이더 감시 기지들의 레이더 정보를 제64K기지로 연결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빈센트는 안개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유리에게 불평하듯이 물었다.

"유리 요원님, 뭔가 좀 보이십니까?"
"아니. 육안 견시만으로 버티기엔 안개가 너무 심한데…"

유리는 더욱 온 신경을 집중해가며 적을 찾고 있었다. 안개는 몽환적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그 안개바다를 타고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전해져 왔다. 누군가 무진의 안개는 봄빛과 섞여 최고의 수면제가 된다고 했던가, 유리와 빈센트도 하염없는 안개의 양탄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었지만 꾹 버텨가며 색적에 집중했다.

보인 것은 한 순간이었다.

기지의 등대에서 발하는 빛이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해상의 어느 지점을 향한 그 찰나의 순간, 유리는 물보라와 함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유리는 급하게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마이크-시에라에서 전파한다. 함영 발견. 광양만에서 기지 남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방탄문 개방! 방탄문 개방! 전 차량 전개하라!"

기선이 외치자 격납고 문이 요란하게 경광등을 울리며 열리고, 특무소대를 태운 험비들이 일제히 가속 페달을 밟으며 전장으로 질주해 나갔다. 그와 동시에 BE의 공기부양정도 미끄러지듯이 해안으로 올라탔다. 곧 공습경보가 기지 전체에 발령되었다.

오전 6시 정각. 전쟁이 시작된 지 8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실상부 제2차 삼각분쟁의 첫 변곡점이라 할 수 있을 중대한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한 척의 부양정이 기지 북쪽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파악되는 건 이보다 몇 분이 지난 후에야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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