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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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산이 아닌가? 뭔가 맛이 다르군." 깡마른 얼굴에 이마에 선명한 주름이 나있는 한 남자가 커피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윽고 남자는 커피잔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남자는 조용히 탁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직원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거나 창가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고, 간혹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말없이 책만 읽고 있는 직원도 있었다. 남자는 탁자 모서리 부분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남자는 청년의 흉터가 몇 년전 전쟁에서 얻은 상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작은 미소를 지은 뒤 청년한테 말을 걸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군, 리히터." 그러자 청년은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리히터는 남자를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그냥 뭘 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후훗,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네. 눈 밑에 다크써클을 보니 최근에 잠을 잘 못 이룬 것 같군." 남자는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천천히 들이켰다. 리히터는 잠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휴가를 한 번 가볼려고 합니다. 한 1주일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아요." 리히터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남자가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게…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1주일 전에 SKP-750-KO가 또 말썽을 부렸습니다. 자기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면서 횡포를 부리더군요." 리히터는 깍지 낀 손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렸다.

"W-222가? 처음 듣는 얘기군. 물론 그 놈이 좀 말썽꾸러기이긴 하지만, 횡포를 부린 것은 이번에 처음인 것 같군. 지금 녀석의 상태는 어떤가?" 남자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얌전히 자기 방에 쭈그려앉아있습니다. 로드버드가 녀석의 허리에 단말기를 꽂은 덕분에 간신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죠. 지금은 인공지능 시스템을 모두 백업시키고, 새로운 인공지능으로 대체했습니다. 로드버드의 말에 따르면 이제 이런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리히터가 말을 마치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에도 만약 그런다면, 나한테 말하게나. 우리 SKP한테 그런 짓을 한다면 방법은 딱 하나,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네. SCP 재단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들처럼 말이야." 남자가 히죽히죽거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듣고보니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정말 다행인 것 같군. 그 당시에 자네는 어디에 뭘 하고 있었는가?" 남자가 다시 커피잔을 들이키면서 말했다.

"저는 여느 때처럼 우루즈-28구역에서 신병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입사한 지 겨우 하루밖에 안된 놈들이었죠. 그렇게 모든게 순조로웠는데, 갑자기 커다란 진동이 우리를 덮쳐온 겁니다. 저는 처음에 지진이 난 줄 알았죠. 하지만 진동은 계속해서 우리를 덮쳐왔고, 위층에서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루즈-28구역 바로 위에는 W-222를 위한 시설이 있었죠. 뭔가 심상치가 않았던 저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지진처럼 느껴질 정도의 진동이라… 흥미롭구만. 계속해보게나." 남자는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위층에 올라가니 벽 여러군데에 금이 가있고, 직원들 몇 명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죠. 바로 W-222가 있던 곳에서요. 저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뒤, W-222의 시설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시설 내부를 살펴봤는데, 갑자기 저한테로 사람 한 명이 날라온 겁니다. 저는 그 상태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죠. 그리고나서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자세히보니, 제 바로 앞에 방독면에서 심한 연기를 내뿜고 있는 깡통 로봇 한 대가 서있던 겁니다." 리히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됬는가?"

"제 위에 있던 시체를 걷어찬 뒤, 이윽고 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W-222의 모습은 마치 성난 기계와 같았죠. 주변을 둘러보니, 벽과 바닥에는 녀석이 횡포를 부린 흔적이 난무했습니다. 마지 달에 있는 크레이터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근데 더욱 최악인 것은…" 리히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잠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리히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하, 지금 생각해도 제가 살아있다는게 다행인 것 같습니다. 녀석이 저의 턱에 주먹을 꽂으려하길래 저는 녀석의 벌어진 다리 틈 사이로 미끄러져서 간신히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언가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죠. 뒤를 돌아보니…"

"뒤를 돌아보니?" 남자는 리히터가 다음에 할 말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 전력 공급 시스템이 박살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리히터는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남자는 리히터의 소름돋는 웃음에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딱히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

.

.

.

어둠이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차가운 땅바닥에 자빠져있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안경을 집어들었다.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무언가에 맞은 기분같았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휴게실 안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차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안경 끝부분을 꾹 눌렀다. 안경 렌즈에 "방해 전파 감지됨"이라는 메세지가 떴다.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방해 전파가 흘러나아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남자는 야시경 모드를 활성화시킬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직원들의 발걸음 소리와 웃음소리는 온데간데 없었고, 방 안에는 침묵과 두려움만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할려고 했다. 남자는 마치 맹인처럼 벽면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벽면에 걸려있는 비상용 손전등을 잡을 수가 있었다. 손전등을 켜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자는 쓰러진 커피잔의 커피로 물들어있었고, 창가에 있던 담배는 그대로 땅바닥에서 천천히 불타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리히터가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전력 공급 시스템이 박살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그 당시 리히터의 표정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눈썹은 치켜올라가 있었고, 리히터의 미소가 광대뼈를 넘어 그의 눈까지 이어져있었다. 광대보다 더 무서운 얼굴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낡아빠진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세울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휴게실 문을 열어 복도로 빠져나갔다.

콰쾅!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시설 위로 새어나오고 있는 검은색 구름과, 마치 구애의 춤을 추고있는 듯한 모습의 불덩어리들 뿐이었다. 남자는 그 광경을 뻔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덥썩

"덥썩?" 남자는 그의 발목에서 소름돋을 정도의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살… 려…"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손전등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바닥에 자빠져버리고 말았다. 손전등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자신한테 말을 건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런색 군복으로 무장한 군인이었다.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남자는 서둘러 군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보게! 자네 괜찮은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발생했던 건가?"

군인이 바닥에 피를 토하였다. 군인은 잠시 숨을 헐떡이더니 남자의 옷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남자는 심긱하게 더듬거리고 있는 군인의 말소리를 최대한 알아들으려고 노력했다.

"… 이곳… 에… 자… 가…"

군인의 손이 차가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머리 또한 차가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군인을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젠장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리히터는 어디에 있는 거고? 빌어먹을, 대체 이게 뭔 상황이냐고…' 남자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면서 깊은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남자는 몇 분동안이나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꿈적조차 않았다.

깊은 정적이 흐르고, 남자는 다시 손전등을 집어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시설 전체에 비상사태령을 내려야해." 남자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남자의 호주머니에는 먼지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가 절실히 아끼던 카드가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젠장할!" 남자는 짜증을 부렸다. 잠시동안 남자는 침묵을 유지하다가 죽은 군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구리쪽에 카드가 끼어져있었다. 남자는 군인의 옆구리쪽에 있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카드에는 군인의 얼굴사진과 그에 대한 정보가 새겨져있었다.

이름: 요하네스 루즈베르

소속: 기동특수작전군 페후-13("엔지니어Ingenieur")

보안 인가 등급: 지도인력(P)

"페후-13 친구였구먼… 가족들에게 안부는 꼭 전해주도록 하지…" 남자는 요하네스에게 기도를 한 뒤 그의 카드를 호주머니에 넣고 붉은색 피로 도색된 복도를 걸어나갔다.

'사방이 피로 물들어 있어. 젠장할,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고…'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복도 한 복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그의 사무실로 곧잘 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또한 붉은색 피로 도색되있었고, 여기저기에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삐빅-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인식기에서 컴퓨터 음성 목소리가 들려왔고, 커다란 회색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작동하는 것을 보면 예비 전력은 작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 모퉁이를 지나서야 자신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남자는 간신히 그의 사무실로 들어올 수 있었고, 곧장 문을 잠가버렸다.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애지중지하던 책들이 바닥에 찢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찢어진 자신의 책들을 보면서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할!" 남자는 자신의 책상에 손전등을 놓은 뒤 서둘러 자신의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화면은 금이 가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그는 서둘러 컴퓨터에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컴퓨터 화면으로 한 메세지가 떴다.

주의: 비상사태는 한 번 발령되면 다시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

비싱사태 발령

대상: 제21특별시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령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설 전체에서 뚜우-하는 소리와 비상사태 대응 안내 절차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평소같으면 굉장히 거슬릴 정도의 큰 소리였지만, 남자는 지금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비상사태 발령 메세지 창을 끈 뒤 서둘러 사령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로딩 화면이 떴다. 15%… 25%… 37%… 51%… 방해 전파 때문인지, 인터넷의 속도가 원할하지 않았다. 남자는 컴퓨터 화면을 흔들었다.

"젠장할, 정말 느려터졌네!"

… 79%… 83%… 96%… 컴퓨터 화면에는 '96%'라는 숫자가 몇 분동안이나 떠있었다. 남자는 컴퓨터 화면 맨 밑바닥을 바라보았다. 인터넷 신호가 끊겼다는 표시가 유난히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남자는 또다시 짜증을 부렸다.

"아까는 잘 되더니, 이제와서 안 된다는게 말이나 돼?" 남자는 몇 번이고 마우스를 클릭하였다. 남자는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랬다. 그는 마우스에 이어서 키보드 자판까지 두드리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붉은색의 표시는 도통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빨리 오스왈드쪽으로 연락을 해야…"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서 소름돋을 정도로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창가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발라클라바를 쓴 누군가가 남자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키보드에서 당장 손 떼시지." 낯선 모습의 사내가 남자의 머리에 총부리를 더욱 갖다대면서 말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키보드에서 손을 땔 수 밖에 없었다.

"… 니놈들 짓이냐? 지금 이 곳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는…"

"닥쳐." 사내는 남자의 말을 끊었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이번 계획도 범슬라브가 구상한 멍청한 작전이로구만. 저번에도 털렸던 놈들이, 복수라도 하겠다는…"

"닥치라고 했다." 사내는 남자의 머리를 향해 총부리를 더욱 더 가까이 갖다댔다. 남자는 코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위대한 대독일이 세계의 질서를 하나로 통일한 이후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의 억양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느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있더라고. 보아하니, 니놈은 빌어먹을 미국놈인…"

그 순간, 사내의 왼쪽 귀에서 뚜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남자를 향해 계속해서 총부리를 겨눈 채 왼쪽 귀에 자신의 손을 갖다댔다.

"나다… 이런, 알겠어. 정리하고 바로 그쪽으로 갈게." 사내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끝마친 뒤 총부리를 겨눈 채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사내는 남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맹인이셨군요, 율리안 님." 율리안은 자신의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마치 10대 청소년의 목소리같은, 짧고 굵직한 저 목소리, 율리안은 자신한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사내가 리히터였음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리히터? 어떻게 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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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는 다시 자신의 왼쪽 귀에 손을 올려댔다.

"3층 확보 완료." 그러자 리히터의 귀에서 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도요?-

"응, 모두 다."

-그럼 빨리 여기로 와주세요. 상황이 말이 아니에요.-

"… 알겠어."

리히터는 자신의 권총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나서 책상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율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그래도 탁해 보이던 율리안의 피부는 더욱 탁해보였고, 그의 소름돋게 생긴 눈이 정확히 리히터를 향해 있었다. 리히터는 문뜩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나서 리히터는 율리안의 사무실 문을 열어 유유히 복도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