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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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다 끝냈어?”

민아는 열린 문으로 머리를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테레지가 완전히 피곤함에 절은 모습으로 책상에 엎드려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원기둥 모양의 조각상이 있었다. 테레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민아는 책상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올려놓았다.

“마시고 힘내.”

“고마워.”

테레지는 캔을 따더니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민아는 테레지가 방 한가운데에 세워둔 조각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원기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원기둥 모양이다. 일반적인 원기둥 모양 조각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완전한 원기둥이었다. 허. 민아는 생각했다. 좀 대단한데. 완전한 원기둥이라는 것은 멋졌지만, 그래도 뭔가…밋밋했다. 평소 테레지의 작품들을 아는 만큼,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때 보여?”

테레지가 의자에 앉은 채로 물었다. 뭔갈 마시니 조금 기운이 나는지, 목소리에 약간 힘이 돌아와 있었다. 민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상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원기둥이네.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원기둥이야.”

“그렇게 보이는구나?”

테레지가 히죽 웃었다. 민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무슨 뜻일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인 것은 확실했다. 민아는 천천히 조각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손바닥이 조각상에 닿았다. 매끈했다. 표면을 살살 만져보니, 익숙한 질감이었다. 이 색에 이런 질감이면, 대리석임이 틀림없었다. 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감도, 냄새도, 맛도 틀림없는 대리석이었다. 그렇다면 테레지는 왜 실실 웃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대리석으로 만든 완벽한 원기둥인데.”

“그렇구나.”

여전히 실실 웃고 있다. 언제봐도 한 대 때리고 싶은 그런 모습이다. 실제로 종종 때려주기도 했지만. 민아가 살짝 주먹을 쥔 채로 웃어 보이자, 테레지의 미소에 기가 살짝 죽었다.

“그래서, 뭔데?”

“별거 아냐. 그냥, 지금 나한테는 이게 작은 정육면체 모양의 석고 조각으로 보이거든.”

민아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인식을 뒤바꾸는 녀석이었다. 문뜩 조금 전 조각상의 정체를 밝혀내겠다고 자신이 하던 온갖 짓이 전부 떠올랐다.

“아 썅….”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테레지는 미친 듯이 웃었다. 망할 년. 민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갑작스러우면서도, 고요하고 천천히 찾아왔다.


마리안느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 이미 본 드라마다. 흔하디흔한, 막장 드라마. 가난한 여자 주인공이 어쩌다가 잘생긴 부잣집 남자 주인공과 만나, 최신 스마트폰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예전에 헤어졌던 남매 사이고, 남자 주인공은 부모님의 친자가 아니었고, 폭탄이 터지고, 자동차가 들이받고, 얼굴에 점 찍고 뭐 그러는 드라마다. 재미는 없는데 욕하면서 보게 되는 그런 드라마지만, 마리안느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집중하고 볼 만한 퀄리티의 드라마도 아니지만, 머릿속에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시점에서 다른 것에 집중하기란 애초에 틀린 일이었다. 시끄럽기만 했기에 마리안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텔레비전을 껐다. 검게 변한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어느새 또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게 되었다.

똑똑.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서 노크할 사람은 단둘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그녀이니까 다른 한 명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람이었다. 마리안느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크였다. 한 손에 유명 아이스크림 업체의 봉투가 들고 있었다. 봉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마크는 미소 짓고는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 왔어.”

스트로베리 초코 맛이었다. 마리안느가 가장 좋아하는 맛.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딸기의 새콤하면서 달콤한 맛과 초콜릿의 쌉싸름하면서 달콤한 맛이 퍼져나갔다. 합성 착향료의 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맛이다. 마리안느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또 한 숟가락을 떴다. 마크는 그런 여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잠깐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마리안느였다.

“요즘 일은 어때?”

마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일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현장에서 뛰는 요원인 마리안느와는 달리 마크는 실험 및 사무직이다. 의자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거나, 컴퓨터로 보고서를 추리거나, 아니면 다른 연구원과 함께 실험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쪽이 더 안전하냐고 물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재단에서 일한다는 것은 언제라도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멀쩡하게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다가 부서진 신의 교단에서 습격해와 죽어서도 움직이는 신세가 될 수가 있다는 소리다. 실제로도 있었던 일이고.

“갑자기 아이스크림은 왜 사 온 거야?”

또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마리안느는 지난번에 마크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때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아이스크림 케이크였지만. 의심. 한 번도 마크를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뭐, 과자를 어디에 숨긴 건 아닌가-이런 의심 정도야 어렸을 때 했었지만, 뭔가 중대한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마크는 먹을 것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언제나 모든 것을 내보이는 성격이었다. 누가 시험 성적을 물어보면 그냥 말했다. 잘 보든, 잘 보지 못했든. 길을 가다가 누군가 전화번호를 물어봐도- 아니, 이건 그냥 호구에 가까운 것일까. 어쨌든, 숨기는 게 많지 않은 성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마크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작은 사실 하나가 지난 며칠간 마리안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무엇을, 어째서? 평생을 함께해온 남매다. 마음의 벽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평생 해왔던 그 생각이, 얼마 전에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뭔가 자꾸 속으로만 앓고 있는 것 같아서.”

마크의 그 말에, 마리안느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정확했다.

“…딱히 없어.”

마리안느는 그렇게 거짓말했다. 마크는 잠시 마리안느의 갈색 눈동자를 보다가, 아이스크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고민이라도 있으면 항상 그랬듯이 말해. 남매끼리는 원래 그런 거였잖아.”

대답은 없었다. 거짓말쟁이. 마리안느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자기도 뭔가를 숨기면서, 왜 나한테만 털어놓으라고 하는 걸까. 결코 바깥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견고한 아이스 링크처럼 보이던 관계는, 어느새 얇게 언 살얼음판 같았다. 살짝이라도 손을 대면 곧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었다.

어느새 아이스크림이 동났다. 마크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스크림을 긁어먹고, 쓰레기를 봉투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잘까.”

마리안느는 시계를 보았다. 12시 32분. 늦은 시간이긴 했다. 야근하는 날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오늘처럼 별일이 없는 날인 경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늦게 이런 거 먹으면 살찌는데.”

“이미 쪘-”

깔끔한 딱밤에 마크는 입을 다물었다. 몸무게에 신경 쓰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면 독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마크는 툴툴거렸다.

“이미 다 먹어놓고는.”

“시끄럽고, 빨리 가서 자.”

“네이, 네이.”

마크는 계속해서 툴툴거리며 방을 나갔다. 작게 쓴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뭔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마크가 앉아있던 자리였다. 몸을 굽혀 보니 USB였다. 마크의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칠칠찮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USB를 집어 들고 문을 열려던 마리안느의 손은, 문손잡이 앞에서 멈추었다.

의심. 바로 그 작은 생각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어쩌면.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그 비밀이 여기 들어있을지도 몰라.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쭈뼛쭈뼛 내렸다. 주머니 같은 곳에 들어있다가 빠진 것이리라. 마리안느는 검은색 USB의 매끈한 유광 표면을 잠시 응시하다가, 곧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재빨리 복사만 하고 가져다주면 모를 것이었다. 컴퓨터 전원이 켜지자 재빠르게 USB를 꽂고 파일 탐색기를 열었다.

눈앞에 나온 창을 본 마리안느는, 이마를 짚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USB를 뽑아 들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파일 탐색기를 열었을 때, 단 하나의 창이 그녀를 반겼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_ _ _ _


첫째는 난동을 부리고, 둘째는 슬피 울며 숨어버렸다.


“아, 고마워.”

“이런 건 조심해. 집에서도 이러는데 밖에서는 오죽하려고.”

잔소리하던 마리안느가 나가자, 마크는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띄워놓았던 옅은 미소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USB를 잠시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마 아직 내용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용물을 복사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다. 비밀번호를 보고 그냥 돌려주러 왔겠지. 마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니라 마리안느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세워 책상 위를 보았다. 구겨진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다. 영 불편한 인물에게서 온 영 불편한 내용의 편지였다. 죽도록 싫은 일을 곧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크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여태까지 얼마나 살았던가. 31년. 긴 세월은 아니다.

한 손만을 움직여 책상 서랍 가장 마지막 칸을 열었다.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붙잡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뭔지는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얼굴 앞까지 가져왔다.

검은색 권총.

31년은 긴 세월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삶을 끝장내기에는 짧은 세월도 아니다.

무기질적인 광택을 잠시 응시하던 마크는 권총을 서랍 속에 도로 돌려놓았다.

이미 각오는 되어있다. 올바른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모든 것을 끝냈다.

민아는 거기까지 쓰고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다. 나름 괜찮은 도입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을 테레지 녀석이 보면 잔뜩 비웃을지도 몰랐지만, 어차피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은 없고 그냥 자기만족용 취미로 쓰는 소설인 만큼 자기 마음에만 들면 되었다.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었다.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이 읽는 재미가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민아는 실실 웃으며 이다음에 쓸 내용을 생각했다. 작가가 곧 독자인 작품이니만큼 쓰는 재미도 있었다.


회색 양복의 남자는 회색 중절모를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관방은 딱 적당한 크기에, 딱 적당한 가격이었다. 그다지 화폐에 구애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역시 가성비가 좋은 것을 찾으면 기분이 좋았다. 적당히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고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주연 인물 하나, 사건의 시발점 하나, 키 퍼슨 하나…아니, 둘. 모두 모인 상태였다.

남은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아닌 자는 회색 넥타이를 풀어 의자에 걸어놓고, 회색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는 침대에 누웠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눈을 감으니 문뜩 며칠 전에 만났던 버나드가 떠올랐다. 그때, 조금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자신에 대해 말했었다.

그건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 다만 전부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곧 의식이 흐려져갔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으며, 아무도 아닌 자는 생각했다.

나는, 이물질이야.

슬쩍 일곱 번째 조각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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