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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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다시 일어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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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

며칠 전이었다.

“이렇게까지 일하는 이유가 뭘까요, 가넷.”

늦은 밤, 사무실의 어질러진 상자를 캐비넷 위로 하나하나 쌓고 있던 가넷이 고개를 돌렸다. 세절기에 비밀 서류를 넣던 스트링은 멍 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뭘 물어보고 싶은지 모르겠는데요.”

“바로 그거에요, 가넷. 난 분명히 물어볼 뭔가가 있는데, 입에서 말로 나오질 않아요.”

가넷은 한숨을 내쉬며 이번엔 몸을 돌렸다. 스트링의 눈 밑엔 새까만 그림자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박사님, 앉아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며칠 있으면 우리 임시 휴가 끝나고 바로 업무 복귀에요. 빨리 털어내고 정리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진짜 힘들어 진다고요.”

스트링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린 서류만 내려다보았다. 몇 마디 더 얹으려던 가넷은 그의 서류가 천천히 구겨지는 것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맞아. 계속해서 일을 해야 뭐라도 되겠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원래 하던 대로 서류 작업에, 환자 진료에, 부상 연구에, 방어 연구에. 평범하게 하던 대로 하다보면, 이딴 꼬인 일들도 다 기억 안날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넷.”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으며, 스트링은 나지막이 말했다.

“난 아직도, 로드가 죽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한참 동안 이어진 창밖의 건물들은 하늘의 먹구름을 닮은 양 우중충한 회색 빛깔이었다. 도로 곳곳엔 낡아빠진 신문지가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고, 가끔씩 날카로운 캔이 굴러와 조용한 차내를 들썩이게 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초췌한 모습의 사람들은 너무나 힘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생기 없는 눈길은 바닥에 질질 끌리듯 가라 앉아 보였다.

“거의 다 왔습니다, 연구원님. 앞으로 5분 내에 도착합니다.”

창문에서 고개를 뗀 스트링은 맞은편에 앉은 요원을 바라보았다. 특수 방호용 마스크에 달린 다기능 고글 너머로 눈동자가 보이는 듯 했다. 흔들림 없는 좋은 눈 같아 보였다. 스트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 가운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평소 연구원의 모습 대신, 주변의 기동특무부대 요원들과 차림새가 비슷했다. 전투 방호복, 기능성 부츠, 안경 위에 걸친 고글과 통신용 이어피스. 오른쪽 가슴팍에 새겨진 하얀 재단 마크까지.

‘차이가 있다면, 눈빛만큼은 똑같진 않겠지.’

스트링은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으며 밖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아까의 낡은 거리 대신 앙상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이더니, 이윽고 나무가 빼곡히 선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것은 반쯤 짓다 만 듯한 아파트와 주변을 빼곡히 매운 검은색 차량들이었다. 길도 군데군데 파인 포장도로 대신 투박한 흙길로 바뀌었다.

스트링의 차량이 가까이가자 멀리선 보이지 않던 철조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전석에 탄 요원이 차량을 천천히 세우며 창문을 내렸다. 요원은 임시 검문소에 설치된 단말기에 카드를 댄 뒤 소총을 든 검문소 요원에게 말했다.

“의료부 연구원 한 분 이동지원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네, 들어와요. 출입증은 나중에 받아가세요, 연구원 님.”

스트링이 고개를 끄덕이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철조망이 천천히 옆으로 열렸다. 차량은 다른 차들로 빼곡한 공터 옆에 주차됐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스트링은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서도 보였던 짓다 만 건물이었다. 대략 7층 높이에 골격은 완성되고 회칠까지 끝난 모습이었지만, 곳곳에 철근이 튀어나오고 창문 하나 없이 휑하게 뚫려 기괴해보였다. 건물 안에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로 마치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육중한 분위기의 건물이 내려다보는 숲 한가운데 공터엔 스트링과 비슷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놓인 검은색 밴 위로 통신망 기기를 설치하고 있는 직원들도 보였다. 연구원들은 저마다 반투명한 태블릿 컴퓨터를 들고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녔다.

“어라, 스트링 박사님 아니에요? 반갑습니다, 박사님. 이렇게 빨리 도착하실 줄 몰랐네요.”

소리가 난 쪽을 보자 고글을 벗은 차림새의 남자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스트링은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언제 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성함이?”

“아아, 모르는 게 당연해요. 어제 메일로만 인사드렸으니까. 북미 6기지에서 온 윤리 위원 클레버 딕슨입니다.”

딕슨은 새된 목소리로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스트링은 굳은 얼굴로 손을 맞잡았다. 왜소하고 마른 이 남자의 손은 기분 나쁘게 차갑고 축축했다.

“열 다섯 시간 넘게 날아왔네요. 제트기를 탔는데도 어찌나 오래 걸리던지.”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딕슨 씨. 통제 본부 어디 있습니까?”

“에이, 보니까 이제 막 도착한 거 같으신데, 뭐 벌써부터 일입니까? 잠 잘 곳부터 찾아야죠. 이 동네가 보기엔 우중충해도 대로 쪽으로 나가보니까 구색은 잘 갖췄더라고요. 호텔 아직 안 잡았죠? 내가 봐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짐부터 풀고……”

천천히 표정이 일그러지던 스트링이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딕슨 씨, 난 잘 곳 상관없으니까 일단 통제 본부부터 말해요. 그런 거 신경 쓸 시간 없습니다, 알아 들어요?”

“워, 진정해요. 난 그냥 친해지자고 하는 말인데.”

“친해지고 나발이고 통제 본부 어딨냐고!”

꿈뻑, 하고 눈을 감았다 뜬 딕슨은 손가락으로 대각선 방향의 2층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저 건물이 통제본부에요.”

“고맙네요.”

스트링은 내뱉듯이 말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딕슨은 이번엔 따라오지 않았다.


“뭐야, 젠장. 기껏 챙겨주려니까 병신 취급을 하네.”

딕슨은 이를 갈며 짧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발 밑에서 딱딱하게 언 흙바닥이 채이며 메마른 소리를 냈다. 딕슨이 향하는 방향에 선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니까.”

“어이가 없잖아. 지금 본부에서 여기까지 직접 확인하러 파견 나와 주셨는데. 같잖은 연구원 주제에.”

“한국에서 한국인한테 한국 호텔을 챙겨주려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닥쳐, 톰슨.”

톰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목을 슬슬 긁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이번에 저 사람 팀에서 완전 난리 났잖냐.”

“난리 한 두 번 나면 재단 망하게 생겼네. 우린 뭐 사람 한 둘 갈리는 줄 알아?”

“그 정도가 아니잖아. 팀장은 업무 중에 사망했지, 같은 팀원이라는 사람은 무단으로 개체에 접근했다 실종됐지. 보니까 나머지 팀원들도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더라.”

“뭐야 그건. 처음 듣는데? 여기에 그냥 혼자 들어간 거 아니었어?”

딕슨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톰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데이터베이스 접근 요청을 했으니까 좀 알아봤지. 팀장은 며칠 전에 이 근처에서 생긴 댐 붕괴 사고 실종자 중 한명이라고 했어. 붕괴 직전에 댐 안쪽 건물에 들어가 있던 게 확인되었으니까, 실종이 아니라 사망으로 확정하는 분위기라더라고.”

“뉴스에도 나왔던 그 일인가?”

“맞아. 뉴스엔 노후로 인한 붕괴 사고로 알고 있는데, 여기 윗사람들은 일단 재단이랑은 관련 없다고 생각하나봐.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진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쟤가 팀장이 아니라 팀장 대리로 온 거구만. 그리고?”

“잠깐만.”

톰슨은 조끼 파우치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몇 번 넘겼다.

“그래, 죽은 팀장 이름은 올리버 로드. 통신원인 미키 맥켄지는 재단 상위 보안에 함부로 접근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기술 책임자인 데일 포드는 달 기지 건설 프로젝트 참여 건으로 여기 못 오고 있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무슨 특수 업무를 보는지 내 조회 창에 이름도 안 뜨고 있어. 그리고,”

톰슨은 화면을 돌려 딕슨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엔 흰 가운 차림에 머리를 뒤로 질끈 맨 여성이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 케이시 가넷.”

“저기에 뛰어든 그 사람이지? 정신 나간 그 사람.”

톰슨은 맞은편에 선 회색 건물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게 우울한 느낌의 회색이다. 마치 지금의 하늘처럼, 언제든지 비가 흘러내릴 것 같은 색깔.

“맞아.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이유이자 장본인이지.”


“스트링, 자리에 앉게. 먼 길 급하게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에 스트링이 멈칫하자 누군가 말했다. 기지의 상관인 화이트 교수였다. 화이트는 온화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저 쪽에 자리 있네.”

컨테이너로 들어선 스트링은 고개를 까딱하며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 대부분은 그가 잘 알거나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 중 몇 사람은 예외였다. 스트링은 넓직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놓인 탁자 끝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굴렸다.

‘저 인간들은 뭐지?’

“우선 지금 막 도착한 저희 직원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실종 사태의 피의자인 케이시 가넷 연구원의 같은 팀 내 동료인……”

“잠깐만요, 과장님. 납득이 안 되는데요.”

스트링은 탁자 반대 끝 쪽에 앉은 정장 차림새의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브리핑 때 정부 관계자들을 모셔 놓고 진행을 했습니까? 아무리 청와대 비서관이라고 해도 저는 보안 등급 없는 사람한테 제 코드 네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탁자 쪽에 앉은 두 사람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뒤에 앉은 떡대들은 갑자기 서로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스트링 쪽을 노려보았다. 화이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링, 지금 자네한테 말하라고 한 적 없어. 자리에 앉아만 있고……”

“괜찮습니다, 과장.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조직의 특수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화이트에게 손을 들어 보인 남자는 고개를 돌려 스트링을 쳐다보았다.

“같은 팀 동료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번 일에 감독 및 감찰 역할을 맡아 오게 된 홍정철이라고 합니다. 당신 말대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맡고 있습니다.”

비서관은 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같은 팀원이라고 하니까 묻겠습니다. 이번에 저기로 들어간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롭니다. 저 안에 들어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습니다. 일은 잘했는지, 성실했는지, 평소 어때보였는지……”

잠깐 뜸을 들이던 비서관은 스트링을 똑바로 쳐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평소 재단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지금 장난해!”

스트링이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밀려나 벽에 세게 부딪혔다. 비서관 뒤에 있던 남자들이 움찔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스트링은 뒤에 손짓하는 비서관에게 삿대질하며 소리 질렀다.

“이봐요! 당신이 이 근처에 들어온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비서관이건 대통령이건 여긴 당신들 관할 구역이 아니라고! 지금 여기서 이딴 개소릴 들으려고 왔으면 더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스트링 박사!”

화이트의 고함에 스트링은 움찔했다. 스트링에게 저벅저벅 걸어온 화이트는 스트링의 옷깃을 잡아 끌며 밖으로 나섰다.

“잠깐 얘기 좀 하겠습니다.”

“과, 과장님……”

컨테이너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문을 닫은 화이트는 밴 몇 대를 지나 철조망 근처까지 스트링을 끌고 갔다. 철조망 앞에 선 화이트는 허리에 손을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트가 손을 놓자 스트링은 화이트의 바로 앞에 달려들 듯이 멈춰 섰다. 그로선 이해가 가지 않은 일 투성이였다.

“과장님! 아니, 교수님! 지금 이게 뭐에요. 저 사람들 여기 왜 와 있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교수님이 저 사람들한테 왜 브리핑을 하고 있냐고요!”

“잘 들어,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게 흘러가고 있어.”

이마를 매만지며 화이트가 답했다.

“지지난 주부터 이상하게 일이 많았네. 사령부 기지에서만 개체 탈주가 다섯 번 일어났어. 여기 부산에 있는 시설에서 두 번 일어났고, 무진 쪽 구역에선 아예 시설 자체가 언론에 노출될 뻔 했어. 게다가 천안에선 D 계급 인원 몇 명이 이송 중에 탈출해버리고 여태 못 찾았지. 그렇지? 그리고 지난주에.”

화이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스트링은 화이트가 그 때의 보고를 듣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주 댐 붕괴 사고는…… 저도 같이 들었어요.”

“그래, 그렇다고. 최근 들어서 재단 관련해서 일들이 많았어. 너무 많았어. 물론 그렇다고 정부 쪽에서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야. 지금보다 더 심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스트링은 화이트가 말하고자 한 것이 짐작이 갔다. 2년 전, 대구 시내에서 있었던 대규모 정전 사건이다. 명백한 재단의 실수로 인해 발생되었고, 3일간 지속된 블랙아웃으로 여러 인명 피해가 일어났음에도 정부에선 사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재단에 위임했다. 아예 손을 놨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문제는, 지난번에 교체돼서 들어온 비서관이 저 사람인데, 요새 하는 일이 심상치가 않단 말이네. 경찰청에 있던 UIU 비슷한 조직을 승격해서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었다고 들었어. 특수사건처인지 뭔지, 지난주부터 그 기구를 통해 계속해서 사령부 쪽으로 항의가 들어왔다네.”

“어이가 없네요. 일 잘 안하냐고요?”

“아니, 더 심하게 말했지. 그러면서 거기에 대한 권한을 계속해서 요구했다더군. 개체 확보하는데 함께 참여하게 해달라던지, 조사 보고서 좀 보게 해달라던지. 거의 SCP 공조를 요청했다고 봐도 될 거야.”

스트링은 철조망을 걷어찼다. 빳빳한 그물망이 물결치듯 출렁였다. 스트링이 씩씩거리며 화이트를 노려봤다.

“지금 교수님은 그딴 개소리를 들어줬다는 건가요!”

“위에서 협조를 해달라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우리가 정부들과 ‘협력’을 하는 거지 ‘지배’를 하는 건 아니잖나. 유엔 선언문에도 우리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말한다지만 협력의 모양새로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막을 명분이 없어. 막을 여유도 없고.”

“……”

조금은 단호해진 화이트의 목소리에 스트링은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긁으며 화이트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틀 전엔 저 사건도 있었고.”

“대체 저건 뭡니까? 오면서 검색했는데 아무 결과도 나오질 않아요. 제 등급으로 열람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등록 자체가 안 되어 있어요.”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개체야. 한 달 쯤 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저 건물 주위에서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네. 지지난주부터 조사에 착수하려고 했는데, 말했다시피 바빠졌다보니 계속 미뤄지고 있었고, 이틀 전에 사고가 터졌지.”

“가넷이…… 저기에 뛰어 들었다고요?”

스트링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외부 출입대장엔 휴가라고만 써놓고 나갔다 들었네. 목적지도 국내 휴양지라고만 써놓고, 인사과에서도 당연히 여행 목적으로 나간 줄 알고 있었다더라. 그런데 오늘 아침에 주민들이 폭발 소리가 난다고 신고한 시각 직전에, 여기로 올라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네.”

“아무에도 안 알리고…… 나한테도 아무 말 안하고?”

스트링이 땅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화이트가 스트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잘 듣게. 저기 온 정부 인사들에겐 최대한 협조를 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방향으로 말을 할 거야. 자네는 최대한 가넷 양과 자네 팀에 해가 될 만한 말은 절대 해선 안 돼. 저들이 여기 온 명분도 ‘자기 인원도 관리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국민들을 지키겠냐’는 말들이니까.”

“아니 그런……!”

“자네가 계속 시비를 걸어서 회의가 지연되면 가넷 양 구출하는 데에도 시간이 지연 돼. 알아 들었나?”

“…… 알겠습니다.”

화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옷깃을 고쳤다.

“됐군. 어서 들어가서 한바탕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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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 알겠습니다, 과장. 스트링 씨라고 했습니까?”

비서관은 보드에서 눈을 떼고 스트링을 쳐다봤다. 여태 한마디도 않고 있던 스트링이 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접니다.”

“직급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책임 권한이 어느 정도 있냐는 겁니다.”

어리둥절한 스트링 대신 화이트가 답했다.

“현재 저 연구원 팀의 팀장 대리로 있습니다. 자기 팀원에 대한 책임 권한은 충분히 있습니다.”

“충분히? 여긴 굉장히 부정확한 용어를 쓰는 군요.”

입술을 한 번 물어뜯은 스트링이 대답했다.

“팀원 영입과 배치에 관한 권한 빼고는 다 있습니다. 업무 배정, 업무 일정 관리, 결과 검토,인사 평가까지 전부.”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뭐, 좋아요. 적어도 자기 일에 대한 파악은 하고 있네요.”

비서관은 앞에 놓인 종이 파일을 뒤적이며 물었다.

“그럼 이 가넷 연구원이라는 분에 대해 묻겠습니다. 본인이 생각할 때 가넷 연구원은 평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을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 그게 다입니까?”

“다입니다.”

비서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일을 마치면 따로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운동이라던지, 취미 활동이라던지.”

“그런 개인적인 일까진 관여하지 않습니다.”

“자기 직장 동료에 대해 모른다? 하나도?”

“네.”

스트링은 여전히 비서관의 미간을 노려보며 답했다. 딱딱한 말투에 비서관은 팔을 파일 위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팀원에 대해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겁니까, 협조하기 싫은 겁니까?”

“일에 대한 거 외엔 신경 안 쓸 뿐입니다. 그것보다 이게 다 중요한 질문이에요?”

“당연합니다. 평소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왜 저런 무모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니까.”

비서관은 종이를 들어 올려 펄럭였다. 가넷에 대한 기본 인사 정보일 것이다.

“당신네 재단에서 주는 이런 종이론 알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름이랑 지금 하는 일이 뭔지 밖에 없고. 사진도 없고, 자기 주소도 번호도 없는 걸로 뭘 알아내란 겁니까?”

“재단 성격 상 보안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노출 가능한 정보 외엔 기록할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서관은 턱을 괴며 종이를 노려보았다. 옆에 앉은 거구의 남자는 수첩에 계속해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국장님, 실례지만 기록물을 외부로 반출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화이트의 말에 국장이라 불린 남자는 화이트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 쪽 사령부로 저희 명의의 정보 열람 신청을 넣었습니다. 허가는 난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뇨, 아직 제가 직접 받은 공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수첩 넣어주시죠.”

국장과 화이트는 서로를 한참 노려봤다. 스트링은 탁자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청와대에 국정원에…… 살다 살다 별 걸 다 보네.’

“내일 아침에 직접 뽑아오죠.”

겉옷 안주머니에 수첩을 넣으며 국장이 딱딱하게 말했다.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질문 없으신가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비서관은 스트링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팀장 대리라고 했는데, 원래 팀장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트링을 쳐다봤다. 화이트, 기동 특무 부대장, 현장 요원, 근처 시설의 책임자, 그 외 요원 복장의 얼굴 모를 사람들까지.

스트링은 똑바로 비서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죽었습니다.”

“저런.”

비서관은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미안합니……”

“알만하군, 이 조직도.”

“뭐라고요?”

국장이 팔을 벌리며 말했다.

“느낀 그대로요. 대체 몇 명이 죽어나가는지. 조직 운영이 얼마나 어려우면 이렇게 쉽게 죽는다고 하나요?”

스트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벌려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대답을 쥐어짜냈다.

“가넷은 아직, 안 죽었습니다.”

“그렇겠죠.”

이번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국장에게로 쏠렸다. 비서관이 옆에서 국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국장님, 그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글쎄요, 안타깝게는 생각해다. 단지 전 그런 일에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분들은……”

국장은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스트링을 보고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준비가 안 된 모양이군요.”


“씨발, 진짜!”

컨테이너를 걷어차며 스트링이 소리 질렀다. 화이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리 다칠라.”

“진짜 저 새끼들 뭐에요! 지들은 이 안전한 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뛴다고!”

계속된 발길질에 컨테이너가 살짝 일그러진 듯 보였다. 스트링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교수님은 또 왜 그러세요! 저딴 허접 쓰레기한테 빌빌 기듯이 쩔쩔 매기나 하고!”

“어차피 진짜 정보는 하나도 안 줬잖나. 저런 사람들한테까지 기억 소거를 남발하고 싶지 않으니, 최대한 좋게 좋게 해야지.”

“하, 진짜……”

스트링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가넷에 대한 1차 수색은 회의 때 나온 대로 내일 아침에 바로 시작할 모양이야. 부대장이 그러더군. 최선을 다해 찾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처음 듣는 얘긴 아니네요. 회의를 이렇게까지 질질 끌 때부터, 이미 알아봤습니다.”

화이트는 스트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만 밴에 올라타게. 숙소는 잡아 뒀어. 밤에 자야 조사에 들어갈 거 아닌가.”

화이트는 스트링을 달래며 밴으로 데려갔다. 계속해서 뭔가 말을 건네긴 했지만, 스트링은 그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열이 가득 차서 제 일을 안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잘 들어가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스트링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문이 닫힌 뒤 출발한 뒤에도, 스트링은 마음 같아선 앞자리 등을 마구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특무 부대의 지휘관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이, 연구원 님. 아까는 잘 참았어요. 먼저 화를 안 냈으면 내가 큰일 낼 뻔했어.”

스트링이 고개를 들자 옆에서 고글을 벗은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스트링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지금도 못 참겠습니다. 계속 소리 지르고 싶네요.”

“하하, 참아 주세요. 이따 숙소에 가서도요.”

남자는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케일렙입니다. 케일렙 모랄레스. 들어온 지는 삼년 쯤 되었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스티븐 스트링입니다.”

손을 떼며 케일렙이 씨익 웃었다.

“비슷하다는 건 짬을 얘기하는 거겠죠? 역시 짬이 되니까 인내심이 좋은가 봅니다. 전 어렸을 때 아버지가 워낙 꼰대였는데, 한 마디 할 때마다 개겼어요. 잘 참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래서 부럽네요.”

“옛날 기억은 안 지우셨어요?”

스트링은 살짝 고개를 기울며 물었다. 주로 현장에서 뛰다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직원들은 아예 기억을 지우고 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지우기엔 옛날 추억이 너무 아쉽더라고요. 아버지도 그렇고. 꼰대라곤 해도, 그리운 사람이었으니까. 사령부 기지에 계신 고든 소령님과 비슷한 케이스죠.”

“맞아요. 그나저나 팀원이 다 오시진 않았나 보네요.”

케일렙은 앞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네, 뭐. 지휘관님하고 저하고 또 다른 한 명. 이렇게 셋만 먼저 왔습니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원래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올 예정이에요. 한 삼 일이면 오지 않을까 싶네요.”

“희한하네요, 팀원 전체가 움직이지 않고 쪼개져서 움직이다니.”

“급한 상황이니까요. 안에 들어간 사람이 박사님 팀원이라고 들었는데요.”

“……”

스트링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없는 스트링을 보며 케일렙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시는 거 이해합니다. 아까 그 놈들 말은 저도 어이없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느낌에 당신 팀원은 무사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그 말에 스트링은 며칠 새 처음으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위안이 되네요. 고마워요. 솔직히, 건물 부수고 다니는 분들이라 좀 거치실 줄 알았어요.”

“하하, 아뇨. 전 부수는 쪽 사람이 아닙니다. 제 전문은 요인 추적인걸요.”

“네? 아, 그러셨나요?”

밴이 멈춰 섰고, 시종 아무 말 없이 앞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부대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랄레스, 그만 내려라.”

“네네, 대장. 아, 박사님, 내일 아침에 뵙죠. 힘내십쇼!”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케일렙이 하얀 치아를 빛냈다.

문이 닫히자, 차에는 다시 스트링 혼자 남게 되었다. 앞 쪽의 운전수는 가림막에 보여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고요함에 스트링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박사님, 도착했습니다.”

한참 손톱을 물어뜯던 스트링의 머리 위 스피커에서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문이 열렸고, 스트링은 비척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스트링의 눈앞엔 이런 시골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호텔이 서 있었다. 척 봐도 10층 높이에 황금색 조명이 번쩍이고 있었다. 감상할 처지가 못 됨을 깨달은 스트링은 로비에 들어섰다.

“어서오십시, 아. 스트링 씨 되십니까?”

로비 카운터의 직원은 스트링을 보자마자 빙그레 웃었다. 스트링은 그제야 자신이 고글을 여전히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둘러 마스크와 고글을 벗으며 스트링이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열쇠 여기 있습니다. 방은 414호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고객님.”

직원이 건넨 카드키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탄 스트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땀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 위로 AR 안경이 코끝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눈이 거울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샤워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을 따고 들어간 스트링은 슈트를 하나씩 벗어서 침대 위에 던졌다. 침대 근처의 스위치를 켜자 은은한 주황빛 수면등이 들어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편안한 방이다. 거실 쪽 테라스로 캄캄한 숲 한 가운데에 하얀 점 같은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조명 가운데로 아까의 회색 건물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답답한 기분에 크게 심호흡하면서 샤워실에 들어가려던 스트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손은 빈손이었다.

“제기랄.”

침대 옆을 살펴보니 침대 옆 옷걸이에 실험실 가운이 걸려있었다. 어쩔 수 없이 축축한 방호 바지를 껴입은 스트링은 맨 살 위로 가운을 위에 걸쳤다. 호텔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서니 텁텁한 여름 밤 공기가 덮치듯 불어왔다. 스트링은 가운 가슴팍을 펄럭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길을 따라 한참 멀리에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자,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호텔 외엔 주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외곽에 들어선 리조트 호텔인 듯싶었다.

“어?”

가까이 간 편의점 안의 사람 얼굴이 보일 무렵, 스트링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는 곧 자기 입을 때리며 잽싸게 옆 길가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고개를 살짝 빼고 아까 본 얼굴을 쳐다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까 그 떡대?’

비서관 뒤에 앉아있던 두 명의 직원들 중 하나가 편의점 계산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말을 하는 듯싶었다. 맞은편에 선 나이든 점장이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뭐라고 답하고 있었다. 스트링이 편의점 주위를 살피자 비서관이 타고 갔던 검은색 세단 차량이 바깥에 두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왜 여기에 있지?’

한참 말을 듣던 직원은 고개를 까닥하더니 편의점 바깥으로 나왔다. 보조석에 직원이 타자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움직였다. 차는 스트링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달려왔다. 스트링이 납작 바닥에 눕듯이 숨어 있는 사이, 차는 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갔다.

차의 후미등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스트링은 벌떡 일어섰다. 편의점으로 달려간 스트링은 주위를 살피며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점장의 상투적인 인사말이 들려왔다. 스트링은 곧장 계산대로 다가가 말했다.

“저기, 혹시 방금 전에……”

“아아, 이 옷이었네.”

“에?”

편의점 점장은 위아래로 스트링을 훑으며 말했다.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물어보더라고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이 혹시 여기 지나가지 않았냐고. 뭔 소린지 몰라 암말 않고 있었는데, 이거 보니까 그 말이 맞네, 맞아.”

“가운이라니, 어떤 사람이었죠? 누가 여길 또 들렀었나요?”

점장은 천장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며칠 전이었더라? 하여간 저녁 때 쯤 이었을 게요. 이쁘장한 아가씨가 그 옷을 입고 뭘 사러 왔더군요. 우유를 엄청 많이 사가던데. 여덟 통인가를 사가더라고요.”

“아가씨면, 어떻게 생겼었어요? 키라던가, 머리라던가……”

“키는 여자치곤 꽤 큰 편이었죠. 머리는 짧게 잘랐고. 무슨 척척박사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아까 왔던 사람한텐 못 말해줬었네.”

점장이 고개를 스트링의 뒤로 쭉 빼며 말했다.

“아, 다시 오네.”

스트링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아까의 세단 중 한 대가 다시 돌아와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머리가 새하얗게 된 스트링은 뒷걸음질 쳐 음료수 코너 앞에 멈춰 섰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어서오셔-.”

뒤에서 뚜벅뚜벅하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스트링은 어색하게 음료수 자판대 앞에서 뒤돌아 선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박사님?”

스트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찰스?”

“여긴 어쩐 일에요?”

찰스는 태평한 얼굴로 물었다. 캔커피에 꽃힌 빨대를 쭉 빨아올리는 찰스를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던 스트링은 흠칫하며 곁눈질을 했다. 계산대 앞에 아까의 검은 양복의 직원이 서 있었다.

“핸드폰을 두고 갔군요.”

“아예, 그러시군요. 아, 아까 말했던……”

스트링이 뒤에서 필사적으로 손짓했다. 온몸으로 가위표를 보내는 스트링을 본 점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 게 담배 달라고 했던가요?”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의점을 나섰다. 쭈그리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스트링은 다시 튕겨지듯 몸을 세웠다.

“내가 묻고 싶어요. 찰스, 여긴 뭐 하러 온 거에요?”

“헹. 이 쪽 기지에서 건강 검진 받고 올라오다가, 가넷이 여기에서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얼른 넘어왔죠. 박사님은 괜찮아요?”

“……아뇨. 별로요. 속이 울렁거리네요.”

스트링은 배를 움켜쥐고 일용품 쪽 코너로 발을 옮겼다. 속옷 세 벌과 셔츠, 바지까지 집고 생수 한 병을 꺼내든 스트링은 진짜로 배가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찰스가 옆에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 이 동네는 편의점에서 옷도 다 파네.”

“가끔 있더라고요, 이런 편의점.”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고서 점장에게 스트링이 물었다.

“혹시 이틀 전에 그 아가씨가 뭐 특별한 말을 했었던가요?”

“우리 동네에서 이상한 일 없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말해줬죠. 최근에 사람 한 대여섯이 숲에서 사라졌다고. 경찰도 와서 지금 수사 중이에요. 덕분에 해지고 나서부턴 안 그래도 사람 없는 동네가 더 적적해졌어.”

점장이 주름 짙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뭐요? 경찰인가?”

“어…… 저희 직장 동료에요.”

“직장 동료오?”

“아, 네. 같은 직장인데, 아까 그 아가씨가 휴가계를 오버해서 썼더라고요. 그래서 돈을 얼마나 쓰고 다녔나 확인하러 다니는 건데, 오늘 그 아가씨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제가.”

횡설수설하며 스트링은 점장이 건네는 봉투를 받았다. 카드에 영수증을 돌돌 말아 건네며 점장이 씨익 웃었다.

“알겠구만. 아까 그 사람은 알면 안 되고?”

“에휴, 안 되죠. 회사에 끌려가요.”

“허허허, 알았네, 알았어.”

편의점 밖으로 나서자마자 스트링은 뻐근한 목을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 나온 찰스는 마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숙소는 저쪽이에요. 박사님은요?”

“아, 저는 저 반대편이에요. 내일 가죠? 기지 가서 봐요, 그럼.”

얼른 말을 끊고 돌아가려는 스트링에게 찰스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엥? 아뇨? 저는 내일부터 작전 장소로 올라오라던데요?”

“찰스도요?”

“네. 근처 지나가니까 협력한다고 요청 넣자마자 이 쪽 업무 들어가라는 지시가 바로 내려왔어요. 과장님 지시던데.”

잠시 할 말을 잃은 스트링이 반문했다.

“과장님? 화이트 과장님?”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호텔은 세탁 서비스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호텔 직원을 보며 스트링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만난 직원에게 요원 전투복 내의를 세탁해달라고 부탁하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비닐 봉지를 다시 챙기고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가넷은 저기 뛰어들기 전에 음료수를 그렇게 많이 사가고, 교수님은 찰스를 불러들이고…… 대체 뭐가 돌아가고 있는 거지?’

가넷은 만나기 전까진 속내를 알 수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격리 시설 설계 전문가인 찰스를 불러들인 화이트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분명 부산 기지 근처에서 파견된 전문 인력들이 있을 게 분명한데도, 개인적인 요청으로 따로 불러들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스트링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방문 앞에까지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서 불이 켜진 그대로의 방에 봉지를 밀어 넣은 뒤, 스트링은 우선 가운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다른 건 우선 제쳐두고, 씻고 우선 잠부터 자자. 내일 잘 하면 확보 작전에 투입될……’

애써 다른 생각을 밀어내며 가운을 옷걸이에 걸던 스트링은 그 자리에 얼어붙듯 멈췄다. 있을 수 없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새겨진 이름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C. GA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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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 여보세요?”

화이트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벌렸다.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커다란 고함소리가 그의 귀에 고스란히 쏟아졌다.

“교수님!”

“이런, 스트링. 이 늦은 시각에 무슨……”

“교수님, 제 호텔 예약 교수님이 하신 거 아닙니까?!”

화이트는 눈을 비비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응? 나는 이미 결제된 서류에 사인만 했을 뿐이네.”

“누가 결제했죠? 이 호텔 교수님이 직접 잡으신 게 아니었어요?”

“그야 가끔은 내가 잡기도 하는데, 원래는 행정실 쪽에서 다 함께 처리해주는 거지. 나는 최종 승인만 해주면 되니까. 뭐 불편한 거 있었나?”

“……아닙니다. 내일 뵐게요, 교수님.”

갑자기 뚝 끊어진 전화 화면을 화이트는 한참 바라보았다. 통화 화면이 꺼지고 화면에 시계가 큰 글씨와 함께 떠올랐다.

2:23

“늦었잖아.”


다시 방에 돌아온 스트링은 부엌 쪽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화이트와의 전화 뒤에 로비로 달려간 스트링은 직원에게 예약한 사람을 물었다. 직원은 이틀 전에 전화로 예약을 잡았으며, 그 전에 머물던 손님은 규정상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약하신 분은 원래 일주일 전부터 그 방에 머무르시던 분이란 것 밖에 알려드릴 수 없네요. 방은 안에 물품 그대로 전해달라고 부탁하신 거고요. 같은 직장 다니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모르셨나요?”

알 리가 없다. 재단의 직원이 한 둘도 아닌데다, 그 대다수는 스트링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예약한 사람은……’

다시 가운을 쳐다본 스트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일주일 전이라니, 이틀 전까지만 해도 가넷은 그와 같은 사무실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일 리가 없다.

스트링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뒤쪽으로 들어갔다. 직원 말대로 부엌 옆쪽에 세탁실이 있었다. 세탁기에 장비를 뗀 전투복을 쏟아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 뒤, 스트링은 다시 가운 앞으로 돌아갔다.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스트링은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위해 이 호텔에 예약을 잡아준 사람은 가넷과 연결고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떻게 가넷의 가운이 여기에 걸려 있는지, 왜 이 호텔방이 자신의 이름 앞으로, 그것도 다른 모든 직원을 제외하고 오직 자신만 여기에 예약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스트링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전화를 하려면 역시 교수님 말대로 행정부 쪽에 전화를 걸어야겠지. 행정부 전화번호는……’


“많이 늦었군, 스트링.”
너른한 아침 햇살 아래서 헉헉 거리며 숨을 고르는 스트링에게 화이트가 던진 첫마디였다. 주변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선 채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중충한 회색건물은 여전했지만, 어제보다 옅은 색의 구름 사이로 조금씩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스트링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알람을 안 맞추고 자버려서 그만.”

“옷은 왜 그런가? 쭈글쭈글하게 되어 있고.”

스트링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검은색 기초 전투복은 다른 직원과 다르게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졌다. 장비들도 전날과 다르게 옷에서 조금 늘어져 있었다.

“어제 세탁을 한다고 세탁기에 넣었다가 깜빡하고 널지 않은 채로 자버렸습니다. 급한 대로 건조기에 넣고 돌렸더니, 이렇게 돼 버렸네요.”

“어허, 스트링. 요원용 전투복을 그냥 세탁기에 넣고 건조기까지 돌리면 어쩌나? 아마 찍찍이 접착력이랑 절연 기능이 다 죽어버렸을 걸세.”

“……”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스트링에게서 몸을 돌린 화이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얼른 따라잡은 스트링이 화이트에게 물었다.

“교, 아니 과장님. 이제 안으로 진입하는 겁니까?”

“오전 중에 벌써 한 번 해봤다네. 별다른 성과를 못낸 모양이군.”

“네?”

화이트는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켰다. 화면엔 회색 건물의 3D 전개도가 띄워져 있었다.

“어제 받은 설계도를 토대로 만든 거네. 전술 팀이 일차적으로 진입을 해봤는데, 안에서 길을 잃고 밖으로 도로 나온 모양이야. 아무래도 정신조작 효과까지 있는 놈인 듯하네.”

“그럼 언제 다시 들어가요? 어제 계획상으론 오늘은 두 번 들어가기로 했었잖아요.”

화이트는 태블릿을 덮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일단 들어갔던 팀의 요원들에게 정신 감정부터 해야 될 걸세.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한 세 시간 뒤엔 들어가지 않을까 싶네.”

“그럼 저는 어떤 걸 하면 됩니까? 뭘 도우면 되죠?”

스트링의 말에 화이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내일까지 휴가 아니었나? 자네 일은 어제 가넷에 대한 진술을 하는 걸로 도움이 다 되었네. 어디 가서 쉬고 있어도 좋아.”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 있을 순……”

화이트는 걸음을 멈췄다. 어제 회의가 있었던 컨테이너 앞에 서서 화이트는 스트링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네까지 달려들면 일이 어려워지네. 마음고생도 심할 테니, 우선 여기 있지 말고 마을에 내려가서 좀 쉬고 있어. 자꾸 참여하려고만 한다면 자네만 다칠 거 아닌가?”

“……”

말문이 막힌 스트링이 입을 벌리고 있자, 화이트는 스트링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사이로 어제 보았던 정부 직원들이 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제기랄, 저런 놈들은 안에 들어가 있고 나는 밖에 서서 아무것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스트링은 회색 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 주위로 재단 직원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건물을 향해 탐조등을 비추고, 누군가는 드론을 건물 가까이로 날려서 영상을 찍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삼삼오오 모여서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전화로 크게 소리 지르며 반대편으로 뛰어가고 있다.

스트링만, 이곳에 혼자 남아 있었다.

“우윽……”

갑작스런 울렁거림에 스트링은 급하게 간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변기로 구역질을 해댔지만, 속에선 신물만 솟아오르고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 그럴 만 했다. 한참을 변기와 씨름하던 스트링은 길게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내려가서 뭐 좀 먹을까……”


스트링은 어제의 편의점에서 나와 바깥 테이블에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버린 샌드위치를 뜯어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콜라를 얹어 놓은 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천천히 기댔다. 초여름이라 풀벌레 소리도 날 법 했지만, 날씨 때문인지 가끔씩 나무 흔들리는 소리 외엔 조용했다. 하늘은 여전히 칙칙했고 이른 더위는 전투복을 타고 흐르듯 답답했지만, 평소였다면 오랜만의 무료함에 스트링은 들떴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휴가가 왜 생겼나 생각해보면……’

마음 속 깊은 한구석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6월 말이 되면 모든 사람이 모여 다함께 휴가를 내기로 작정한 터였다. 상부에서 뭐라고 하건, 기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바다로 놀러갈 생각이었다. 미키는 휴가지에 와서도 여전히 자기 통신 기기로 주변 동호인들과 떠들게 뻔했다. 포드는 자신의 구릿빛 근육을 자랑하며 모래사장에서 성을 쌓고 있을 것이다. 로드는 모래사장 바깥 파라솔에서 두꺼운 소설책을 펴놓고 읽을 거고, 자신은 그런 로드에게 쏠 물총을 장전하고 있을 터였다. 가넷은 그 옆에서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며 빙수를 퍼먹을 것이다.

‘지금은, 나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지……’

스트링은 멍 하니 편의점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초록빛 논이 회색빛 그림자에 드리워져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고층 빌딩에 뒤덮인 도시의 모습과도 닮은 듯 아닌 듯한, 익숙한 풍경.

‘익숙한……?’

길 건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스트링은 그 자리에서 앉은 채로 한 뼘 정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급하게 품을 뒤진 스트링은 자신이 찾던 것을 꺼냈다. 끝이 구깃구깃한, 인화된 사진 한 장이었다.

“이게 어떻게……”

이틀 전, 가넷과 함께 로드의 사무실을 정리하던 스트링은 가넷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이게 뭐냐고 묻는 스트링에게, 가넷이 한 말이 떠올랐다.

‘로드 박사님 사무실에서 나온 사진이 이게 유일하네요. 박사님이 가지고 계세요. 언제나.’

처음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받으면서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조악한 풍경 사진을 로드가 자기 사무실에 둘 이유가 없었다. 사진을 뒤집자, 급한 글씨로 무언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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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은 사진을 들어 눈앞에 댔다. 풍경과 사진은 큰 차이가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스트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사진 한 구석에 선 전봇대에는 없는 안내문 종이가 진짜 전봇대엔 붙어 있었다.

‘현문가구, 여러분의 아늑하고 편안한 밤을 위한 맞춤형 침대를 비롯……’

포스터는 구깃구깃하고 우둘투둘했다. 위아래에 청테이프로 대충, 혹은 급하게 둘러 붙인 모양새가 수상했다. 스트링은 위에서부터 천천히 테이프를 뜯어내다가 작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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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스트링은 자신의 전화로 사진을 찍은 뒤 포스터를 떼어냈다. 유성 매직으로 쓴 듯한 글씨 부분만 찢고서 나머지는 휴지통에 쑤셔 넣고서, 스트링은 다시 의자에 도로 앉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넷이 왜 로드의 아이디를 나한테 줬지?’

로드의 아이디 형식으로 봐서 재단 네트워크의 계정인 듯 했다. 타인의 계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특별히 없는데, 지금 이 사진으로 미루어봐선 어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문득 스트링은 어제 밤의 일이 기억났다.

“…… 행정실 안내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기지 의료부 스티븐 스트링입니다. 6월 64 사건 장소에 나와 있는데요. 제 호텔을 예약한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잠시만요……”

딸깍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직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타인의 정보 조회를 요청하실 때엔 지난 1년간의 본인 행적에 대한 정보 제공 동의가 있어야하는데, 박사님은 현재 정보 제공 동의 처리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 처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급한 상황인데요.”

“원래는 요청을 넣으시고 직속상관의 결재를 받아서 사령부에 전송하셔야 하는데, 긴급한 경우에는 절차를 약소화하여 팀장 결재로도 할 수 있습니다. 넷 계정을 통해 온라인으로 하실 수 있으시고요.”

스트링은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 대답했다.

“잠시만요.”


스트링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의 예상대로 호텔 예약은 가넷이 잡은 게 맞았다. 혹시 몰라 결재 내역까지 전해 받았지만 사실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그나저나 로드 이 자식, 생각보다 권한이 많았잖아. 쓸데없이.”

스트링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다 식어버린 콜라를 입에 가져갔다. 뜨뜻미지근한 콜라를 삼키며 입을 훔친 그는 태블릿을 켜 시계를 봤다. 화이트가 말한 작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기의 지도를 열자 재단 직원들이 모여 있는 작전 장소까지의 거리가 나타났다. 걸어올라 온 것치곤 꽤나 빨리 올라온 편이었다.

“무슨?”

갑작스레 그의 뒤에서 낮은 경적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두 대의 탑차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에 놀란 스트링은 풀숲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피했다.

“뭐야, 위험하게.”

탑차는 가장자리 도로에 천천히 멈춰 섰다. 잠시 뒤에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평범한 작업복을 입은 기사였다. 그의 가슴팍엔 물류지원부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요원님, 괜찮으세요? 순간적으로 못 봐서 실수했습니다.”

“아아, 네. 괜찮아요. 부딪히진 않았습니다.”

요원이란 말을 정정하려다 귀찮아진 스트링은 기사에게 손짓하며 웃었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사람도 차 앞을 돌아와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 스트링 박사님. 큰일 날 뻔 했네요.”

“응? 찰스? 이번엔 여기서 뭐해요?”

찰스는 여전히 캔커피를 빨대로 빨아먹으며 답했다.

“위에 있는 개체에 대한 업무 인원을 데려가는 중이에요. 요즘 재단 손이 부족하니까, 이해해야죠, 뭐. 이 근처 기지에선 기억 소거 절차가 워낙 괴상해서요.”

“연구원 분이셨습니까? 또 실수했네요.”

머리를 긁적이는 순박한 모습의 기사에게 스트링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뭐 그런……”

“여러분.”

스트링은 기분 나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얼굴을 구겼다.

“왜 여깄어요, 비서관 님?”

맞은편 길가엔 어제 본 두 대의 세단이 멈춰서 있었다. 스트링 앞에 선 비서관 대신 국장이 대답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림새의 남자가 돌아다니는데, 눈을 안 끌래야 안 끌 수가 있나? 지나가다 보게 됐네요.”

“네, 그럼 가세요. 갈 길 가시죠.”

“아뇨, 민표 씨, 뒤에 탑차 열어주세요.”

뒤에 섰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기사는 탑차 문손잡이로 다가가는 남자의 손을 붙들었다.

“어이 어이, 뭐하는 거요?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비키세요.”

“후송반! 안 내리고 뭐 하냐!”

기사가 뒤에 소리 지르자 뒤에 선 탑차에서 두 남자가 소총을 들고 뛰어 내렸다. 양복의 직원도 곧장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며 겨눴다. 국장도 권총을 든 채 소리 질렀다.

“지금 해보자는 거냐!”

“시비를 건 건 당신네들이지! 어디 말 같잖은 것들이 와서 회사의 물건에 손을 대!”

“회사? 웃기는 소릴 하네.”

코웃음치는 국장에게 스트링이 말했다.

“이봐요, 재단 측에 협조를 하고 있다고 쳐도 지금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래, 말 잘했다. 박사님, 댁들이 원하는 요청 문서랑 협조 문건 들고 왔소! 뭐 더 필요하면 수사 허가라도 여기서 바로 뽑아줄 수 있는데? 말 만 해!”

“……”

“네, 네. 지금 바꿔 드리겠습니다. 연구원?”

스트링은 전화를 내미는 비서관의 손을 쳐다봤다.

“당신 상관입니다.”

“…… 과장님?”

“스트링. 괜찮으니까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게. 어차피 협력하는 입장이야. 알아 듣는가?”

“……”

가까스로 전화를 내던지지 않은 스트링이 돌려주며 말했다.

“기사님, 재단 요청입니다. 열어주세요.”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스트링을 쳐다봤다. 스트링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씩씩거리며 탑차의 뒤로 다가갔다. 기사가 자물쇠를 열고 손잡이를 당기자 비서관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보호입니까?”

스트링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탑차 안에 앉아 있던 건 수면 상태로 의자에 고정된 여섯 명의 D 계급 인원이었다. 비서관은 탑차에 올라타더니, 잠들어 있는 인원들을 가리키며 스트링을 노려봤다.

“전부터 느꼈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뭘 위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민을 수호하고 국가의 안녕을 지키는 게 내 일입니다. 이걸 보고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양복 아저씨, 이 사람들은 전부 사형수에요. 심지어 네 명은 당신네 나라 사람도 아니구만.”

찰스의 말에 비서관이 찰스에게 걸어갔다. 태연한 얼굴의 찰스에게 비서관이 소리쳤다.

“그래! 바로 당신 말대로야! 난 당신들이 뭘 하는진 모르지만, 이 사람들을 데리고 뭘 할지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사형수라고요? 판결이 내려진 사람들은 짐짝처럼 트럭에 실어서 이렇게 휘둘러도 된다는 겁니까? 사람 목숨이, 사람 목숨이 당신들한텐 그렇게 쉬워요?”

한참 주위를 노려보던 비서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타고서 차 창문을 내린 비서관이 스트링을 역겹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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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 진짜 가는 곳곳마다 시비네.”

탑차에 얻어 타고 검문소까지 달려온 스트링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사람의 존재가 영 거슬렸다.

‘그래, 처음. 가넷은 처음부터 어떻게 된 거지?’

스트링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떤 이유로 가넷이 잠재적인 변칙 개체에 잠입했으며, 개체에 대해서도 꽤나 긴 시간 동안,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알고 있었다. 가넷이 들어간 직후에 재단에선 가넷을 구출하고 개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 팀이 파견되었으며, 그 책임자로 화이트가 들어온 상태다. 그 사이 가넷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흔적을 남겨뒀다.

‘대체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가넷은 왜 이런……’

한참을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작전 장소 중앙에 다다랐다. 스트링은 주변을 둘러보며 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려오기 전보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좀 더 적어진 느낌이 들었다. 스트링은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전투복 차림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전술 팀은 안에 진입했나요?”

“전술 팀? 아아, 특무부대 말인가요? 아뇨,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한답니다. 저기 앞에 서 있네요.”

직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건물 입구 부분에 정렬해 있는 십 여 명의 전투복 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다. 직원에게 인사한 스트링은 거의 뛰다시피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중엔 얼굴이 익은 사람도 있었다.

“아, 스트링 박사님. 다시 뵙네요.”

케일렙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스트링과 케일렙 쪽을 쳐다보았지만, 특별히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케일렙, 오늘 아침에 진입했을 땐 어땠나요?

“아아, 기밀이긴 하지만, 스트링 박사님이시니까 그냥 말씀 드릴게요. 어차피 우리 들어가면 좀 있다 전환될 정보니까. 처음에 들어갔을 땐 그냥 허름한 폐건물 모습이더군요. 그런 형태의 구조는 시야에 걸리는 게 없으니까 탐색하기 수월해서 쉽게 끝나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말이죠.”

케일렙은 고개를 쭉 빼며 앞에서 다른 직원과 기기를 들여다보는 지휘관의 눈치를 보고선 말을 이어나갔다.

“위층 수색은 다 끝났어요. 정말 별 거 없었고요. 그런데 건물 구조상으론 지하 3층까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안 보이더라고요. 설계도에 나와 있는 위치엔 계단도 없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바닥이 끝났어요. 그 뒤론 아예 갈 방법이 없다 생각해서 밖으로 나왔고요. 이번엔 회수 장비를 동원해서 안에 뭐가 있든 떼어내서 들고 나올 계획입니다.”

“케일렙, 자리 지켜라. 5분 뒤에 진입한다.”

지휘관이 케일렙이 아닌 스트링을 쳐다보며 소리 질렀다. 케일렙이 경례하는 동안 스트링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지휘관과 케일렙에게서 등을 돌리던 스트링은 무심코 전술 팀의 다른 요원들의 부서 마크를 훑어보았다.

‘웬 내무부 소속 요원들이 이렇게 많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저만치서 화이트가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느긋해 보일정도로 태연했던 어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화이트는 이상하리만치 굳은 채 스트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과장님. 먼저 인사 못 드렸네요. 지금……”

“스트링, 따라오게.”

짧게 말을 던진 뒤 화이트는 곧장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당황한 스트링이 서둘러 뒤쫓아 갔다.

“과장님?”

“시간이 없어. 얼른 차에 올라타.”

거의 뛰다시피 하여 검문소 쪽으로 간 스트링과 화이트는 열려있는 밴에 올라탔다. 차량은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을 꺼내 들여다보는 화이트에게 스트링이 물었다.

“과장님?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잠시만, 지휘관 님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예정대로 진입 후 대형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다른 인원은 다 철수했습니다. 행적 확인된 마지막 인원은 제가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네.”

태블릿을 통한 화상 전화로 대화를 마친 화이트는 기기를 덮고 카시트에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링은 화이트에게 재차 물었다.

“과장님, 저한테 설명을……”

갑작스런 굉음에 스트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스트링은 한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옆면 의자에 거꾸로 처박혔다. 혀를 씹은 스트링은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뭐……!”

차량은 갑자기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다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부딪혀 멈춰선 차량은 기우뚱 하더니 제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스트링 주위의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트링! 스트링! 밖에 나가서 다른 차에 타게!”

흐릿한 가운데 화이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고개를 털어낸 스트링은 기어서 깨진 유리창으로 나갔다. 먹먹한 물결소리는 이윽고 커다란 굉음소리로 바뀌어갔다. 총소리였다.

스트링은 입에서 핏덩이를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머리 위로 빠른 무언가가 지나갔다. 스트링은 다시 주저앉았다.

“박사님!”

누군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스트링은 저항했으나, 붙잡은 팔의 힘이 더욱 셌다. 그는 끌려가다시피 하며 수풀 속으로 기어갔다.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 앉았다.

“박사님! 정신 차려요!”

갑작스레 눈앞에 불이 번쩍 하더니 왼쪽 뺨에 얼음을 갖다 댄 느낌이 들었다. 얼얼한 뺨을 감싸자 초점이 서서히 들어왔다. 케일렙이었다.

“따라와요!”

이번엔 그의 팔뚝에 기대며 일어섰다. 스트링은 케일렙의 부축을 받아 뛰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등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스트링은 케일렙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연기가 나는 원래의 밴을 돌아가자 수풀 너머에 문이 열린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좁은 흙길을 둘러싼 빽빽한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서 밴에 올라타자마자 밴이 출발했다. 바람에 맞서며 케일렙이 문을 닫는 동안 스트링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스무 발걸음 너머에서 수십 개의 불꽃이 번쩍였다.

“적대 조직의 습격이에요. 벨트 매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적대 조직이라니?”

스트링의 손이 벨트에서 빗겨나 제대로 매지 못하자 케일렙이 끼워주며 말했다.

“이번 작전은 모두 덫이었어요. 재단 안에 숨어 있는 스파이를 찾아내려고!”

흙길 위에서 밴이 덜컹거리자 케일렙이 윗 손잡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 건물 안에 있던 개체를 어느 요주의 단체에서 훔쳐갔다고 들었어요. 반만! 그래서 나머지를 가지러 분명히 올 거고, 나머지가 있다는 걸 알려준 누군가도 함께 잡아들이기 위해서 작전을 짠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면 가넷은요? 가넷은 어떻게 된 거에요?”

“가넷 박사님은 건물 안에 잘 계십니다. 전술 팀의 절반은 저 건물 안으로 진입해서 경계 중이고, 나머지 절반 중 다시 반은 남은 직원 분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제가 있는 반은 마지막 호송 팀 호위를 위해 따라왔어요.”

밴이 격하게 흔들렸다. 공중에 떴다 내려온 케일렙이 소리 지르듯 말했다.

“지금 우린 57-2 기지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박사님과 일부 직원들은 그 곳에서 보호하기로 되어 있어요!”

갑작스레 케일렙의 어깨에 달린 무전기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케일렙은 이어피스를 눌러 전환한 뒤 스트링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외쳤다. 동시에 차량 옆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스트링은 의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엎드려요!”

케일렙은 차문 옆에 난 스위치를 눌렀다. 창문 옆에 살짝 열린 실틈 사이로 총구를 내밀어 발사했다. 귀를 때리는 발포음이 계속해서 터졌다. 다시 한 번 커다란 폭발이 반대편에서 터졌다. 잠시 삐끗한 차량은 다시 질주했다. 탄창을 갈아 끼우며 케일렙이 다시 소리 질렀다. 곧바로 차량 앞이 폭발했다. 창문 너머로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갑자기 터진 하얀 섬광으로 하얗게 물든 창문에 가느다란 실금이 길게 내달렸다. 유리에 비쳐 더 짙어 보이는 잿빛 하늘 아래로 새까만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올랐다.

“터널로 진입! 터널로 진입!”

한동안 수풀을 헤치며 달리던 차량은 갑자기 터널로 진입했다. 주황색 전조등 아래 이따금 비추는 벽면은 차가운 금속면이었다. 더 이상 굉음과 폭발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후, 굉장했네요, 박사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데요.”

간신히 대답한 스트링의 말에 케일렙은 시원하게 웃으면서도 눈은 창문 밖에서 떼질 않았다. 스트링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터널이 끝나자 길게 뻗은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 주변으로 새까만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텅 빈 이차선 도로를 따라 달리던 밴은 공장 지대를 지나 외곽으로 들어섰다. 외곽의 좁은 도로 끝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검문소가 보였다. 철조망과 감시탑 사이의 검문소를 멈추지 않고 지나친 밴은 공터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스피커에서 째지는 목소리가 터지면서 밴의 문이 덜커덕거리며 열렸다. 스트링은 땅에 내려서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늘이 잠시 노랗게 보였고, 저 멀리서 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두들기며 케일렙이 지나갔다.

“고글이랑 헬멧 쓰세요! 안에서 뵙겠습니다!”

스트링은 허리춤을 뒤졌지만 고글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헬멧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자 시큰한 통증이 머리부터 턱까지 내달렸다. 앞주머니에서 액체가 든 주사기 하나를 꺼내 허벅지에 찔러 넣자 약물이 천천히 퍼지는 게 느껴졌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스트링은 주위를 살폈다. 매끈한 군청색 벽이 높게 둘러싼 넓은 구역의 양 끝 벽에 검은 차량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 사이 공간에 몇 대의 밴이 불규칙하게 서 있었다. 새까만 구멍이 나지 않은 차량이 없었다.

“스트링! 이 쪽이네!”

멀리서 화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링이 고개를 돌리자 차량 건너편에서 화이트가 자리에 앉아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텐트와 칸막이가 가득 서 있었고, 하얀 가운과 파란색 수술복을 입은 의료부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처치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임시 구호소의 모습이었다. 스트링은 화이트에게 뛰어가 그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갑한 전투복을 벗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스트링이 물었다.

“과장님! 다치지 않으셨어요?”

“보다시피, 꽤나 굴렀지. 허허.”

“구른 정도가 아닌데요, 과장님.”

너털웃음을 짓는 화이트는 왼팔에 스플린트를 감고 팔걸이를 목에 맸으며, 같은 쪽 다리는 전체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얼굴은 군데군데 까만 멍이 들어 상당히 아파 보였다.

“자네 학부생 때 졸업 논문으로 낸 진통제가 여기서 잘 먹히지 않나. 난 기쁘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우선 이 곳에서 움직이세. 듣는 사람이 많으니.”

스트링은 몸을 일으키는 화이트를 부축했다. 화이트는 목발을 짚으며 구호소를 가로질러갔다. 멀지 않은 곳에 반듯한 벽돌 모양의 건물로 향한 화이트는 스캐너에 자신의 카드를 댔다. 문이 열리고 나서 바로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음? 화이트 박사님, 벌써 오셔도 됩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스트링은 고개를 들었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은 마주 선 딕슨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게 선 채로 화이트에게 팔을 뻗던 딕슨의 뒤에서 톰슨이 나와 인사했다.

“무사한 걸 보니 다행입니다, 스트링 박사님. 화이트 박사님은 좀 더 쉬시다 오시지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이 친구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화이트를 자리에 앉힌 뒤, 스트링은 책상에 기대어 선 딕슨에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화이트는 그런 스트링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걱정 말게, 스트링. 기지로 데려온 직원들은 모두 신원 확인이 된 사람들이야. 안심하게. 또 윤리위원회 소속 분들 아닌가.”

“아닙니다, 다른 일로 이 분께 실수를 했습니다.”

스트링은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딕슨 씨, 어젠 제가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급하다 보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비록 저와 톰슨은 소속된 기지가 다르지만, 저라도 톰슨이 위험에 처했다면 같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동료니까요.”

“실없는 소리를 하는 군, 딕슨. 이리 와, 눈치 없이 알짱거리지 말고.”

톰슨은 딕슨을 끌고 사무실의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널찍한 사무실 안엔 다치지 않은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이 다른 기지에서 온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 설명해주세요, 과장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스트링은 화이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무 의자에 가라앉듯이 기대앉은 화이트가 말했다.

“처음 우리가 있던 작전 장소의 개체를 발견한 건 스틸러스라는 이 지역의 현장 요원이었네. 마을에서 실종 신고가 두 건 들어오자마자 자체 조사에 착수할 정도로 우수한 요원이었다더군. 삼 주 전에 첫 보고가 올라왔고, 이 곳 기지 관리자는 근처에서 의료 시설 점검 중이었던 가넷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에게 조사를 명령했네.”

“맞아요, 그 때는 저와 가넷이 시설 점검을 할 순번이었어요. 로드는 기지에서 잡무 중이었고요.”

“여튼, 개체에 대해선 대강 파악이 되어서 보고를 올린 모양이야. 요원이 직접 목격한 바로는, 저 건물 지하 2층엔 수영장 시설이 있는데,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수영장의 물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은 모두 원인 불명의 임신을 하게 된다더라고. 남녀 불문으로 말이야.”

“남자고, 여자고 말이요?”

“그래. 여자야 어떻게든 생물학적으로 가능은 하다고 쳐도, 남자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지. 수영장에서 임신을 하게 된 사람들은 물에서 나오는 즉시 출산을 한다고 하네. 이 과정에서 여자는 통증 없는 자연 분만을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배가 터지며 출산을 한다고 하네. 물론 남자와 태아 둘 다 사망하게 되지.”

스트링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럽네요. 그런데 뭐가 문제였나요?”

“보고서도 깔끔했고, 희생자도 총 여섯 명 정도인 선에서 마무리 되어서 사령부는 특별하게 생각 안 했나봐. 그런데 이틀 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가넷은 그 자리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네. 개체와 요원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총격전이라면 설마……”

“그래, 요주의 단체지. 그 자리에서 파괴를 하지 않고 들고 간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반란 쪽이 아닌가 싶네. 하지만 꽤나 큰 실수를 했지.”

“실수요?”

화이트는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실수. 어떻게 들고갔는진 모르지만, 여튼 들고 간 수영장 물은 이 변칙 개체의 일부에 불과해. 진짜 핵심은 여과 장치였지. 가넷이 저장고에 고인 물과 다른 액체로 실험해보니까, 여과 장치를 통과시킨 액체는 영양 성분이 수배로 급증했다더군. 끔찍한 비유긴 하지만, 그 건물이 사람이라면 수영장은 생식 기관, 수영장 물은 양수, 여과기는 태반이라고 볼 수 있다네.”

“……”

할 말을 잃은 스트링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화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거네. 가넷은 곧바로 내게 먼저 보고를 올렸어. 아마 이 기지의 위치나 연락할 주소를 몰라서 그랬겠지. 근데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하던대로 사령부에 보고를 올려버렸네. 당연히 내부 보안부에서 노발대발하며 쫓아왔지. 신분이 기밀인 현장 요원이 실종 사태이면 기밀 유출이 있었던거고, 내부에 변절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아무 생각 없냐고 하면서.”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야, 스트링. 참 끔찍한 일인데, 내 머릿속에선 가넷이나 그 요원의 안전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네. 내 제자가 큰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걸 역이용하자는 생각이 들었어. 덫으로 말이야.”

“덫이요?”

스트링이 의아해하자 화이트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내부에 변절자가 있다면, 내부 보안부에서 쳐들어온 그때쯤이면 아마 사실 확인을 위해 사람을 보낼 테지. 그렇다면 우린 저 건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치면 되네. 그 사람을 통해 내부의 변절자를 잡아낼 수 있을 테지.”

“무슨……”

“나는 가넷에게 우선 위치 교란 장치로 위장한 뒤에 숨어 있으라고 했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사령부와 기지 관리자 모두에게 재차 보고를 송신했지. 개체는 이동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거짓 보고와 함께. 얼마 뒤에 개체를 향한 움직임이 보이는 조직을 포착했고, 동시에 가넷에게 개체에 접근해 있으라고 했네.”

스트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돼요. 왜 이런 일에 과장님과 가넷이 목숨을 건 겁니까? 내부 보안부에 그냥 맡기고 가넷은 피해 있을 수 있었잖아요!”

“내부에 적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하잖아. 그럼 시간이 생명이야. 최대한 빨리 꼬리를 낚아채서 끌어내야 한다고. 심지어 사령부도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이대로 냅두면 아무리 재단이라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말을 마치며 화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발을 짚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린 화이트를 따라 나서며 스트링이 따졌다.

“하필 왜 가넷이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거기에 가넷이 들어갈 이유는 없잖아요!”

“나라고 그곳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 괴물 안에 들어 있던 건 내 제자였어. 자네나 로드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제자라고! 또 내 제자가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 걸 내 손으로 직접 저지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자네가 알아!”

어느새 언성이 높아진 화이트에게 스트링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다고 가넷을 거기에 집어넣었습니까? 과장님 손으로 직접! 아무리 그게 중요하다고 해서, 거기에 또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집어넣었어요?”

“자네는 몰라.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어렵고 힘든 일은 다함께 손을 잡고 이겨내면 그만이지만, 서로 맞잡은 손을 거꾸로 넘어뜨리려고 당기면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이 무너지게 돼! 그건 막아야지 않겠나?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잡아야해. 내부 보안부도 동의한 일이라고!”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해야 해. 이게 재단에서 돌아가는 원칙이야. 이것이 순리라고. 이게 재단이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방법이야.”

화이트는 스트링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든 게 무너지고 다시 세우는 일,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네.”


“썩은 나무가 왜 위험한 줄 아나? 껍데기만 멀쩡한 채로 겉만 번지르르하기 때문이야. 가뭄도 벌레도 가지를 쳐내면서 버틸 수 있지만, 안에서부터 썩어버리면 방법이 없어. 베어 넘기고 새싹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생물학 시간, 화이트는 슬라이드를 넘기며 건강한 나무와 병든 나무의 단면도를 보였다. 몇몇 여학생은 비위가 상했는지 신음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무 상한 거로도 저러냐.”

“그럴 수도 있지.”

턱을 괸 채 펜을 굴리던 스트링의 옆에서 로드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스트링은 펜을 윗입술로 고정한 채 로드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런 비위 약한 애들은 버리고 나랑 과제하자, 응?”

“네가 제일 역겹다.”

“조용.”

화면을 탁탁 치며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병든 가지가 있다면 이파리를 모조리 뜯어서라도 쳐내야해. 그래야 뿌리가 썩지 않고, 그래야 나무 전체가 살아남는 법이네. 그래야 모든 게 다 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지.”

“교수님, 병든 나무는 심폐 소생할 순 없나요? 어레스트일 수도 있는데.”

스트링이 손을 들며 말하자 교실의 반은 괴상하다는 눈초리를, 반은 키득거리는 웃음을 보냈다. 화이트도 찡그린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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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그럼 누굽니까?”

화이트는 고개를 들어 스트링을 바라보았다.

“누구에요. 과장님이 봤을 때, 내부 변절자는 누구냐고요.”

“아직 변절자가 정확히 누군진 몰라. 하지만 실마리는 잡았어.”

화이트와 스트링은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보를 흘리자마자 우리에게 접촉한 인물이 있어.”

스트링은 복도 한 쪽 끝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의 한 쪽 벽면은 커다란 스크린이 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 선 채로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크린엔 단조로운 취조실의 모습이 떠 있었다. 취조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스트링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서관……”

“대체 어떤 경로로 정보를 입수했는진 모르지만, 자네가 내려오기 전날 밤에 이미 내려와 있었네. 업무 끝났다고 해도 돌아가지도 않고. 협조하겠다고 떼쓰면서 정보를 요구하더군.”

“그러고 보니 어제 밤에도 마을에서 가넷에 대한 정보를 캐고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 자리에 있었나? 알 수가 없군, 이 사람도.”

스크린의 비서관이 맞은편에 앉은 요원에게 말했다.

“지금, 얼마나 많은 법을 어겼는지 아십니까?”

“지금 귀하께서 계신 이 곳은 대한민국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입니다. 규약에 따른 절차로 현재 구금된 것이며, 성실히 답변하지 않으실 경우 귀하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비서관은 딱딱한 말투로 종이를 읽어 내려가는 요원을 노려보았다. 바로 옆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딕슨이 톰슨에게 스크린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걸었다.

“조사관은 인증을 통과했지? 너무 순하게 나가는 거 같은데.”

“글쎄, 딕슨 너는 북미에서 와서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선 공권력이 약한 편이라.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할 수 있는 것도 분위기를 봐가면서 해야 하거든.”

“글쎄, 정치인이라 막 나가는 거 아냐. 워, 나를 좀 보시오, 내가 바로 비서관이요?”

갑자기 스크린 속 비서관이 이쪽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딕슨은 외마디 소리를 냈으며, 스트링도 움찔했다. 비서관은 매섭게 노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카메라 숨겨 놓지 않냐, 보통?”

“대단한 사람인가보지.”

스크린 속 요원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재단 활동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뭘 얻었다는지 모르겠군, 나는 이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국적 기업이 이곳에서 인가받지 않은 수사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는 걸 들었을 뿐입니다.”

“이런 사건 사고에도 직접 개입하는 것이 당신의 업무에 포함됩니까?”

“내가 속한 부처에서 담당하는 일이고, 거기 책임자인 내가 직접 업무를 보기로 한 것뿐입니다. 당신은 책임자라고 해서 현장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합니까?”

지휘관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요원은 다음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다음 질문 하겠습니다. 사고가 발생했다는 진술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십시오.”

“민간인 수 명이 실종된 사고가 경찰을 통해 보고가 되었고, 그 중 하나는 유령회사의 소속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마지막 실종자에 대한 수사 행위가 파악되었고, 회사의 출처를 찾던 중에 당신들이 파악된 것뿐입니다.”

스트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과장님,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근거가 뭔가?”

화이트는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스트링은 비서관의 입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도 그랬고, 계속 말하는 게 개체보단 사람을 신경 쓰는 것 같아요. 개체를 들고 갔다는 사람치고는 거기에 관련된 질문은커녕 언급조차 안하고 있어요.”

“정치인인데 오죽 연기를 잘하겠나. 좀 두고 보지. 그것보다……”

화이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작전 장소에서의 피해가 적은데……”

스트링은 화이트의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피해 규모에 대한 표가 떠 있었다.

“사망자 없고, 부상자도 경상이 다수…… 이건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요?”

“내가 군사 전문가도 아니니, 이놈들이 뭘 원하고 거길 갔는지 모르겠군. 개체를 회수하러 온 거 아니었나?”

화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크린 속 비서관이 말했다.

“당신들, 제대로 된 집단 맞습니까?”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오면서도 봤어. 당신들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이송하고 다니더군. 내가 호송 차량에 타고 있었다고 그 상황도 몰랐을 거 같습니까?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두고도 인류를 수호하는 목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필요 외의 발언을 삼가십시오. 조사 기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비서관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럴까?”

갑자기 스크린의 화면이 나갔다.

“뭐야?”

“화면 왜 이래?”

“불 나갔어?”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려는 스트링을 화이트가 붙잡았다.

“자리에 앉아 있어.”

“교수님?”

“자리에 앉아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발밑이 심하게 흔들렸다. 스트링은 비틀거리며 접이식 의자를 붙들었다. 천장을 타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전인가? 교수님, 기지가 전력이 나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파악이 될 때까지 앉아있어!”

다시 한 번 건물이 전체적으로 흔들렸다. 스트링은 화이트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연락 주십쇼, 과장님!”

“스트링!”

스트링은 파우치에서 자신의 태블릿을 꺼냈다. 깜깜한 복도에서 화면이 켜지자 눈이 부셨다. 기기가 구동되고, 네트워크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스트링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로그인 이후에 뜰, 그의 팀장 인계 확인 화면이 두려웠다. 그가 부정하던 사실이 진짜가 될까 두려웠다.

멀리서 복도 끝 문이 보였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건물은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스트링의 눈은 화면에서 깜빡이는 커서에 고정되었다. 그의 심장 박동 수에 따라 깜빡임이 빨라졌다. 지금까지 그의 친구에게 미뤘던 책임이 그에게 넘어오는 순간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해보게나.’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만 있을 순 없잖아요?’

스트링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 그의 아이디 뒤에 별이 하나 붙은 채로 네트워크가 켜졌다.

스트링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네트워크에 따르면 비서관이 억류된 곳은 스트링이 있던 곳의 맞은편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이미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구호소에선 천막 밖의 사람들을 건물 안이나 천막 아래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스트링은 천막 사이를 가로질러 뛰었다.

“거기 들것 좀 잡아주세요!”

“전력 복구는 아직이야?”

“D동에서 화재 발생했어! 그 쪽으로 가지마!”

커다란 폭발음이 기지 뒤쪽에서 터졌다. 몇몇 사람들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긴 경보음이 기지 곳곳의 스피커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알림, 기지 내 직원들은 신속히 자기 자리를 이탈하여 지정된 위치로 이동할 것, 외부 인력은 현장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기 바람. 알림……”

사람들을 헤치며 기지 끝에 다다른 스트링은 카드를 대고 문을 열었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스트링은 뛰듯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기기의 지도를 따라 취조실로 향한 스트링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늦었다……’

책상엔 심문을 하던 요원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주위로 새빨간 웅덩이가 번져 있었다. 서둘러 요원의 맥을 짚어본 스트링은 입을 틀어막으며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간 거야……”

지도를 열고서 축소하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건물 내부가 드러났다. 지하층을 손가락으로 훑던 스트링의 손가락이 멈췄다.

‘서버실’

서버실로 뛰어가려던 스트링이 다시 제자리에 섰다. 그는 죽어 있는 요원을 돌아봤다. 생각이 바뀌었다.


“스트링 박사님?”

“찰스, 기지 상공에서 기지 전경 찍어 보내줄 수 있어요?”

대피소로 이동하던 찰스는 기기에 띄어진 스트링의 통신화면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런 짓 하면 이 자리에서 총 맞는 거 몰라요?”

“안 보이게 살짝 올라가던가, 드론이라도 띄워줘요. 빨리!”

할 말만 말하고 통신을 끊어버린 스트링은 화면에서 사라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찰스가 투덜거렸다.

“젠장, 이 사람도 자기 친구 닮아간다니까.”

줄을 따라 걷던 찰스는 바로 옆의 창문을 열고 훌쩍 뛰어 내렸다.


“네, 노래마인 님. 연락 받았습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대피 중입니다. 네, 저희 보유 SCP는 보존 상태에 들어갔고요.”

기지 관리자 옥샌은 갑작스런 폭발에 정신이 없었다. 기지 외부에서 전투 상황이 벌어진 것을 확인했을 뿐이지, 기지 안에서 이런 소동이 일어날 낌새는 하나도 없었다.

“네네, 잠시만요? 누구세요?”

화면에 띄워진 통화 대기열 중 하나는 모르는 번호였다. 누군가의 얼굴이 사진 한 장과 함께 떠올랐다.

“연구원 스트링입니다. 관리자 님, 지금 요주의 단체 침입에 대한 대처를 알려드리려 전화했습니다.”

“뭐, 뭐요? 잠깐만, 당신 어디서 왔어요? 정보창에……”

“아 지금 바쁘니까 뒷조사는 나중에 하고! 불러드리는 거 좀 보내달라고요!”

스트링의 말을 들은 옥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스트링은 지도를 확인했다. 거대한 서버실 공동 한 가운데에 빨간 점 두 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가 뛰고 있는 건물 주변으로 수십 개의 빨간 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시간이…… 애매하네?”

스트링은 잠시 고민하다 최근 조회를 눌렀다. 가넷이 아이디를 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산시 광역 지도…… 표준 기억 소거 절차…… SCP-884-6-4172 사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생각하길 그만뒀다. 이런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얼마나 됐습니까?”

“잠시만……요. 거 시스템이 참 훌륭하게 좆같네요. 보안이 엉망진창이야. 만든 놈 낮짝을 보고 싶네요.”

비서관은 국장의 뒤에서 초조한 듯 서 있었다. 웅웅거리며 단조로운 불빛으로 깜빡이는 주변 시설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만지는 모든 물건에서 전기가 흘러와 손이 따끔따끔했다. 비서관은 숨도 쉬지 않는 얼굴로 가만히 국장이 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데 이런 정보들이 정말로 유용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국장이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비서관에게 물었다. 비서관이 답했다.

“이 곳에 와 있으면서 이 조직이 위법적인 일을 셀 수 없이 많이 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여러 가지지만, 좋은 일이라고 볼 순 없겠죠. 동시에 굉장히 값어치가 나가는 일일 테고요. 이 사람들이 기를 쓰고 지키려는 것으로 봐선, 네. 그렇다고 봅니다.”

“비서관 님이 말씀하신 정보 말고 다른 자잘한 건 벌서 뚫었는데요, 장비나 인력 면에선 우리나라보다 더 대단해보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다 이리로 몰려온 모양인데.”

자리에 주저앉아 노트북을 두들기던 국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트북을 덮으며 국장이 기지개를 켰다.

“끝. 다 뚫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타앙 하는 단발 음이 서버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메아리치며 울리는 총소리에 덩달아 서버실 곳곳에서 정전기가 튀어 올랐다. 국장은 나무토막처럼 서버 기계에 처박혔다. 핏물을 뒤집어 쓴 기계가 연기를 뿜어내며 터졌다. 비서관은 총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비서관.”

노트북을 줍던 비서관은 몸을 돌렸다. 스트링이 그늘에서 천천히 벗어나 다가갔다. 비서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스트링이던가요? 당신네 코드 네임.”

“설명해봐요.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비서관은 크게 웃었다. 오랫동안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소리가 어색했다.

“설명은 당신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거대한 시설에, 방대한 규모의 조직 구성에, 잘 짜인 정보 체계에. 내가 볼 땐 당신도 전부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요?”

“내려오면서 당신에 대한 파일을 봤습니다. 홍정철 씨.”

비서관은 입을 다물었다.

“학교 입학 년도부터 시작해서 정부 채용과 승진 모두 최연소란 말이 붙지 않은 곳이 없던데요. 그 옛날이라고 보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에 대한 안목도 탁월했고.”

“다른 말 더 없습니까? 그 파일에?”

스트링은 잠시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년 전에 사고로 딸을 잃었다고……”

“맞습니다. 이년 전에, 당신네들이 빌어먹을 사람 하나 찾자고 온 도시에 정전을 불러 왔을 때였지.”

비서관의 말에 스트링이 움찔했다.

“내 딸은 그 때 응급실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의사였지. 당신들이 온 도시를 뒤집어 놓은 덕분에 병원이 아주 바빴고. 죽은 사람의 심장을 되돌리려고 기계를 쓰던 내 딸은, 당신들이 터뜨린 폭탄 때문에 그 전기를 뒤집어썼습니다.”

“……”

“그 때부터 당신들이 보였습니다. 그 전까진 몰랐지만, 이미 이 나라에 단단히 뿌리박아 버린 당신들 재단이란 곳을 말입니다. 당신같은 단체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알고 싶었습니다. 대체 뭐하는 곳이길래, 온 나라에서 행패를 부려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고작 그거 하나 알자고 이 짓을 벌였어요?”

스트링의 목소리가 서버실 곳곳에 메아리쳤다. 비서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끝냅시다. 어차피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으니.”

“이 아수라장에서 멀쩡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서관은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그럼요. 물론이죠.”

순간 소름이 돋은 스트링은 몸을 돌렸다. 반쯤 돌렸을 때 무언가 그의 어깨를 뚫고 깊숙이 들어왔다. 숨이 목에 걸린 스트링은 땅바닥에 처박히려는 몸을 굴려 기계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아까같은 총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이번엔 그의 다리를 뚫고 지나갔다. 스트링은 비명을 지르며 기계 사이로 쓰러졌다.

“정보는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직접 뛰지 않으셔도 되셨는데.”

스트링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니까. 저는 이 USB만 가져가면 됩니다, 딕슨 씨.”

“네. 비서관께서는 신속하게 이탈해주십시오. 저는 마무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스트링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가슴팍에 빨간 점이 생겨났다.

“스트링 박사,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아, 없다고는 못하겠구나.”

지근거리까지 온 딕슨이 총을 겨눴다. 스트링은 눈을 감았다. 총소리가 났고,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헉……!”

스트링은 눈을 떴다. 딕슨이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트링의 머리 한 뼘 거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안 늦었습니까?”

스트링은 목소리가 나온 왼쪽 어깨 파우치의 무전기에 대고 답했다.

“아뇨, 딱 좋아요, 케일렙.”

“주변에 몇 명 더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스트링은 기계를 짚고 일어났다. 따다닥 소리와 함께 무언가 굴러다니더니 주변에서 폭발했다.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와 그의 몸을 강타했다.

“안 돼! 케일렙! 폭탄 쓰면 안 돼요!”

“너무 많아요! 몇 명 수준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요!”

스트링은 그의 주머니에서 병을 꺼냈다. 하루에 두 번 맞는 건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병 속의 주사기를 꺼내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비틀거리던 그는 곧 뛰기 시작했다.

“비서관!”

눈 앞에 검은 양복이 보이자마자 스트링은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동시에 그의 옆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둘 뛰쳐나왔다. 스트링을 향해 뛰어오른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폭죽 터지는 요란한 총소리가 터졌다. 스트링은 팔로 연기를 막으며 무너진 기계를 뛰어넘었다.

“저기! 저쪽!”

비서관이 뛰어가던 방향의 통로를 스트링이 가리키자, 어디선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갔다. 통로에 처박힌 그것은 돌가루를 퍼뜨리며 통로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미친! 폭탄은 안 된다고!”

“로켓이에요!”

“돌았네!”

스트링은 무너진 복도 앞에 멈춰 섰다. 비서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만하죠, 이제. 나갈 구멍도 없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뭐, 더 말하자면 나는 언제든 나갈 수 있고, 당신은 무기 하나 없는 상태죠.”

비서관은 USB가 꽂힌 자신의 휴대 전화를 들어보였다.

“케일렙! 저 사람을 쏴요!”

“…….!”

“케일렙?”

“제가 닿은 조직에서 생각보다 사람을 많이 보낸 모양입니다.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니.”

스트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당신을 여기에 봉쇄시킨 다음에 철수하라고 말했습니다.”

“뭐?”

“에구, 이 화면에 떠 있는 게 뭔지 알아요?”

스트링은 바닥에 털썩 앉으며 기기를 꺼내 보였다. 화면엔 새까만 글자들과 함께 확인 버튼이 떠 있었다.

“이 기지의 기억 소거 절차는 이제 재단에 몇 없는 희귀한 방식이에요. E등급 기억 소거라고, 머리를 전기로 지져서 기억을 날리는 거지. 과격하지만, 활용 방법이 다양하거든.”

“무슨……”

“여기에 시설도 없고 정전이라 못 쓸 거 같지만,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곳 주위에 피뢰침이 꽤 많잖아요. 휴대폰이라던가, 철근이라던가. 서버실은 자체 동력이라 전기도 넘치고.”

“당신은 무사할 거 같습니까? 하지도 못할 거, 허세가 심하군요.”

“글쎄요.”

뒷걸음질 치는 비서관에게 스트링이 씨익 웃었다.

“그건 해봐야 알지.”


막 전력이 복구되었던 57-2 기지는, 다시 정전이 되었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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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만 있을 순 없잖아요?”

가넷의 말에 스트링은 고개를 들었다. 가넷은 천천히 다가와 스트링 앞에 앉았다.

“우리가 하려는 일의 이유를 찾으려 들고, 책임 따지고 들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두 분이 가장 싫어하는 일 아니었어요?”

“그러다 한 명 갔잖아요. 한 명은 연락도 안 되고, 한 명은 어디 끌려가고. 우리 팀, 그냥 완전 망했어요. 산산조각 났다고.”

“그럼 다시 해야죠. 깨진 거 다시 이어붙여야지. 이렇게 손 놓고 있을 거예요, 진짜?”

가넷은 주저하다 스트링의 손을 붙잡았다.

“박사님. 우리 예전에 건축물 가지고 일할 때 기억나요? 한 번은 거의 다 조사한 게 무너져서 했던 일 다 쓸모없게 된 적 있잖아요.”

“아뇨.”

“그 때 박사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깜짝 놀라니까.”

가넷의 말에 스트링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가끔은, 모두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자네 참 대단한 일 했어.”

스트링은 눈을 끔뻑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양 팔에 정맥 주사가 꽂혀 있었고, 그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붕대와 축축한 거즈가 칭칭 감겨 있었다.

“교수님?”

“거 참, 호칭을 통일하게나. 일할 땐 눈치 보면서 과장님이라고 그러고, 아닐 땐 교수님이라고 그러고. 나도 헷갈리네.”

“여기 어디에요?”

옆 침대에서 화이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진짜 기억을 잃은 모양이구만. 자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날짜 대보게나.”

“7월…… 날짜는 기억 안 나는데, 그날 점심이 삼계탕이었어요.”

“삼 일 치라. 기지 관리자가 기억 소거 절차 폐기를 다시 번복했다는 말이 일리가 있구만.”

침대에서 화이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 상태를 본 스트링이 깜짝 놀랐다.

“교수님 왜 이렇게 다치셨어요?”

“자네가 더 심해. 쯧쯧, 내가 그 약 용량 조절 잘하라고 논문 때 그렇게 말했다만. 하루 반나절 동안 코마였어, 자네.”

화이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스트링을 바라보았다. 교수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설명은 나중에 듣게. 우선 칭찬하고 싶어. 자네 덕분에 기밀 누출도 막았고, 적대 조직, 그러니까…… 요주의 단체의 인물들도 많이 확보했네. 비서관은 아직 혼수상태고, 깨어나는 대로 심문 후에 귀가 조치할 거야. 기억은 하려나 모르겠지만. 깨어나면 기억 소거 후에 정부 측에 인수할 걸세.”

“비서관?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듣게나. 나중에 설명을 들으면 다 이해할 거야. 고마워서도 그렇고. 윤리위에서 내 손발을 많이 묶었었거든. 자기 위원들을 의심하냐고 해서 말이지. 특별 부서라고 행적 조사도 못하게 막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여튼 이제 그 성역도 어지간히 뒤집어 질 걸세. 세상에 반란에 윤리위라니, 웃기지 않은가? 톰슨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뒤집으면 뭐가 나올지 아는가. 덕분에 내 발언권도 꽤나 세졌고.”

“……?”

“부산 쪽 기지는 서버실이 날아간 통에 당분간 기지로썬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네. 건물도 몇 개 날아갔으니, 전체적으로 기지 재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더군. 뭐, 관리자만 바쁘게 됐지만, 관리자야 원래 바쁜 사람 아닌가. 그러려니 해야지. 덕분에 사령부 뿐만 아니라 재단 네트워크에 대한 전반적인 심의가 들어갈 거야. 더 안전해지고, 더 튼튼해지겠지.”

“아…… 네. 좋은 일이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스트링에게 화이트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스트링이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는 동안,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인사할 사람들이 많네. 특히 케일렙 요원이 자네를 굉장히 보고 싶어 하더군.”

편지를 읽던 스트링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두서없이 두리번거리던 스트링은 수액 폴대를 뽑아들고 옆의 휠체어에 끼웠다. 휠체어로 낑낑거리며 올라타는 스트링에게 당황한 화이트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 가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가서 들어볼게요. 고맙습니다, 교수님!”

스트링은 휠체어를 삐걱거리며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비명 소리와 뜀박질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가자, 화이트는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엔 온몸에 튜브가 꽂힌 채 누워 있는 비서관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화이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기억 못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스트링은 쫓아오는 의료진을 피해 휠체어를 굴렸다. 그의 친구가 팔 아프다며 투덜거리는 것이 이해가 갔다. 진통제 때문에 팔이 아픈 건 아니지만, 뛰는 거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스트링은 온 힘을 다해 가넷이 기다리고 있는 병실로 휠체어를 밀었다.

그의 재건이 시작되어야 할, 이유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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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 박사님께.

안녕, 박사님. 솔직히 편지도 오글거리지만, 말로 하긴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써요. 할 말이 꽤 많거든요.

제가 이 년 전에 처음 재단에 왔을 때, 처음 본 사람이 박사님이랑 로드 박사님이었어요. 그 땐 팀도 뭐도 없었으니까 어색했죠. 체계도 하나도 없었고. 그 때 박사님이 저한테 가넷이라고 이름 지어준 거 기억나세요? 자기들도 진짜 이름으로 암호명을 짓는다면서, 저한테 직접 지어주셨잖아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솔직히 말하면 되게 힘들었어요. 재단 나가고 싶을 때가 거짓말 안하고 대부분이었던 거 같아요. 주변 사람들한테 말도 못했지만, 버틸 자신이 없었거든요. 갇혀있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래서 박사님한테도 고마워요. 박사님이 해준 말 덕분에, 저는 옛날 기억을 지우고서도 남들처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박사님과 로드 박사님, 포드 씨, 맥켄지 씨, 그리고 다른 모든 분들까지. 전부 이 년 전의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박사님,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둘 뿐이라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잖아요? 박사님 말처럼 무너졌더라도 다시 일어나요. 박사님이 내게 말해준 것처럼, 언제나 내가 박사님 곁에 있을게요.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시면 로드 박사님 찾는 거부터 시작해요. 실종은 사망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박사님도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기다릴게요. 건강하세요, 박사님.

케이시 가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