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 - 조선 카논 투고 (3)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년) 3월 9일

왕이 이르기를, "갇혀 있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위에서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입시한 신하들은 방면할지 방면하지 않아야 하는지 각자 생각을 말하라." 하니, 대신과 판의금이 앞서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왕이 결단을 내릴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허다한 죄수들의 실정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봉산의 어염집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인홍은 방 안에 창호문을 모두 닫고 정좌해 있었고, 창호문에는 부적이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형혹은 문 밖에서 이물에 등을 돌리고 앉아, 등 뒤의 광경을 거울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남자 둘이 형혹의 말을 따라 방울을 울리고 온갖 도구와 제삿상을 옮겼다. "옳지, 옳지! 그쪽으로! 안 떨어뜨리게 조심해라! 부정탄다!" 형혹이 거울을 이리저리 돌렸다. "정인홍 대감, 심심하실 터인데 옛날 얘기나 들으시렵니까?"

"나더러 살 맞을 수 있으니 여기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정인홍이 피곤한 듯이 답했다. "나오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이제 이 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왜병들한테 죽은 놈들의 혼을 담아서 저주를 하려고 만든 겁니다. 그런데 저렇게 넣으면 이지가 없어서 아무나 원망하니-" 형혹이 거울을 홱 쳐다보고 소리를 질렀다. "천 똑바로 대고 있어라! 내장이 쏟아져 죽고 싶으냐!" 천을 슬쩍 들어보려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하여튼, 거의 끝났으니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죽여서 넣은 놈들은 말하자면 저주하려는 대상을 지정하는 역할인 것이고, 봉산 땅으로 가지고 온 것은 효력을 증폭하기 위한 것이고, 이제 여기서 의식을 행하면 다 되는 것이외다."

형혹이 낄낄거리며 방울을 울려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 때 집 너머에서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흰색 불꽃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여럿이 지붕 위로 뛰어올랐고, 이덕형과 무명(無名)이 집의 대문으로 들어섰다. 무명이 소매에서 길쭉한 한지를 꺼내 뚜껑이 열린 상자 쪽으로 던졌고, 종이는 끈으로 매어놓은 듯 날아가 상자에 붙었다. 고함과 몸싸움 끝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형혹과 그 수하들을 포위하는 사이, 정인홍도 이변이 생긴 것을 알고 문을 열고 나왔다. "좌상 대감 아니시오. 이 누추한 곳에는 어언 일로 납시셨소? 거기다 왈짜들까지 데리고 말이오."

이덕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당에 널부러진 피묻은 형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 큼지막한 제삿상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합천 재상께서 잔치를 벌이신다길래 내 주린 사람들을 모아 이리로 왔더니, 아무래도 산 사람을 위한 잔치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가 품 속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던졌다. 이물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마시오."

"헛허…" 정인홍이 웃으면서,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형혹의 두 팔이 쭉 늘어나듯 움직여서는, 양 손으로 제 수하들의 머리통 하나씩을 붙잡았다. 신음 소리가 이어지더니, 그들은 멧돼지마냥 네 발로 기어 제 몸으로 습격자들을 공격하려 들었다. 도사들도 각자 검이나 둔기를 꺼내들어 맞섰으나, 그들은 빠르게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피해다녔다. 형혹은 몸을 굴려 도사들의 틈에서 벗어나고, 정인홍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벌써 다 대사가 끝났는데, 이제 와서 무엇 하십니까? 지체 높은 나으리들께서."

"신어머니더러 스승이라 부르면서 무당이 어줍잖게 도사 흉내 내더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무명이 차갑게 응수했다. "귀신만 부릴 줄 알았지 세상 돌아가는 일은 모르나 보구나. 저것이 날붙이의 기운을 띄고 있거늘 어이 네 주술에 이런 것을 쓸 생각을 하느냐?"

"그런 것은 진작에 알고 있수다. 누구를 바보로 아는 게요?" 그 말과 함께 형혹이 비명을 내질렀고,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이덕형과 무명 쪽으로 날아왔다. 무명이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내저었고, 그러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다. 정인홍이 뒤에서 형혹을 말렸다. "그만 두거라. 좌의정을 죽였다가는 너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 형혹이 숨을 가다듬으며 물러났다. "저 늙은이는 어찌 하셔야 합니다. 저자도 불어도감 소속이니 명을 내리면 따를 것입니다."

"오, 그러느냐?" 정인홍이 무명에게 말했다. "내가 불어도감 도제조이니, 직제 상은 다르나 선무사의 품계가 나보다 아래이니라. 좌상도 인망이 있으나 무릇 나라의 일은 위에서 명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너도 위의 일을 해하지 말고 새겨들어 따르라." 이덕형이 시큰둥하게 끼어들었다. "도제조가 언제부터 관의 일을 도맡아 하는 자리였소? 나도 가례도감 도제조를 했으나 잔칫상을 나르지는 않았소." 무명도 마주보고 설 뿐이었다. "내 손으로 도사들을 죽여가며 따른 것은 무고(巫蠱)하는 자들이 나라를 망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제가 무슨 주술을 썼는지도 모르는 헛것들을 데리고 이리 하고 있으니 한심하여 온 것이다. 내가 온 것은 대감을 구하러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정인홍이 형혹을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소리냐?" "헛소리!" 형혹이 상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까 무명이 붙여놓은 종이에 불이 붙어 타올라 사라지고, 상자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리 잘 작동하고 있거늘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이 늙은아. 만주 먼지를 너무 먹어서 총기가 흐려진 게구나. 아니면 서토(西土) 태생인 놈들은 다 그리한 것이냐?" 무명이 혀를 찼다. "도(道)를 배운 적도 없으니 무지하기 그지없구나. 그것이 날붙이의 기운을 띄는 것은, 순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도록 묶어둔 것이다. 그런데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라 하였으니, 재액을 행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순리이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물이 이제는 눈에 띄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형혹의 주술로 멧돼지마냥 뛰어다니던 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둘의 허리가 마치 반으로 접은 양 휘어지기 시작하더니, 등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고 뱃가죽이 찢어지고 있었다.

형혹이 당황하여 잠시 서 있다가,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정인홍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이 뱀 같은 늙은이가!" 뛰어오르면서 형혹이 팔로 정인홍을 후려쳤고, 문이 박살나며 둘 모두 방 안에 엎어졌다. 형혹이 팔로 노인의 목을 졸랐다. "다 거짓이었구나. 역적이니, 토벌이니, 상치니 다 거짓부렁이었어! 꾸며낸 옥사로 나를 속인 게로구나!" 정인홍이 팔을 마구 휘둘러 형혹을 밀쳐냈다. 이덕형과 무명이 방 쪽으로 다가섰다. 이덕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 만한 자들은 다 아는 것이다. 대질시켜도 가소로운 말만 하고, 죽어나가도록 형문하고, 애초에 장계한 황해 목사도 역모가 아니라고 하였느니라." 형혹이 분을 못 이기고 몸을 떨면서 정인홍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저 고독이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고 왜병만 죽이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이 늙은이야!" 정인홍이 부서진 문을 집어들어 던지고 반대쪽으로 피했으나, 형혹이 다시 몸을 날려 덤벼들고선 정인홍을 위에서 타고 눌렀다. "재액을 행한 놈들을 다 붙잡아 죽이는 이물을 가져다 놓고서는, 억울하게 죽은 놈들로 의식을 했으니. 무고(誣告)하고 무고(巫蠱)한 자들이 다 죽겠구나! 이 늙은아, 너도 죽는 것을 면치는 못할 테다!" 뒤쪽에 버티고 선 무명이 품 속에서 천천히 검을 꺼내들었다. 정인홍이 목졸려 컥컥거리고 있을 때, 무명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형혹의 두 팔이 잘려나가 마루에 부딪치고 땅바닥으로 굴렀다. 기이하게도 잘린 팔과 형혹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팔은 물 밖의 물고기마냥 펄떡거리며 뛰어다녔다. 형혹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무명이 정인홍을 일으켜서는 부적을 하나 등 뒤에 붙여주었다. "내 대감을 오늘 구했소. 기억하시오."

형혹이 마루에서 굴러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잘린 팔들이 다시 붙으려는 듯이 몸 쪽으로 기어왔다. 헐떡거리며 팔을 향해 기어갈 때, 무명이 검을 들어 목에 가져다 댔다. 형혹이 체념하고 멈춰섰다. "네 명을 죽여서 넣었다. 부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이야."

"그게 유언이냐?"

"아니, 저 음흉한 늙은이에게 뭐 하나 물어봅시다." 형혹이 턱끝으로 정인홍을 가리켰다. "내가 산 자들의 정치에 무지하고 죽은 놈들의 말만 알아들어서 이꼴이 났는데, 도대체 무고한 까닭이 뭐요? 역적을 만들고 죽이면서 역적이 너무 많다고 한탄하는 것은 괴이하지 않소?"

정인홍은 이덕형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고 있었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그가 형혹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역적을 만들었다? 무고했다? 누가 그러더냐?" "뭐요? 내가 귀신의 말을 듣는데-" "구양수(歐陽脩)가 이르기를 군자는 붕당으로 이롭게 하여 나라를 섬기고 왕은 군자당(君子黨)으로 천하를 다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소인들이 너무 많으나 요즘의 세태가 소인이라 하여 쫓지 못하고 악을 행한 후에야 쫓아낼 수 있으니, 어찌 천하가 위태롭지 않겠느냐? 소인은 다 불충하고 기군(欺君)하니 역적이 아니더냐? 역적을 역적이라 부른 것이 무슨 무고냐? 순리라, 역당(逆黨)이 곧 순리를 어기는 것이고 재액을 행하는 자이거늘,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 어찌 순리가 아니더냐? 애매한 자들이 있다 할 수는 있으나, 무릇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나오는 것 자체가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니 소인의 증거이니라."

"저… 저 미친 늙은이가!" 형혹이 발끈했다. 무명도 거들었다. "대감, 조용히 하시지요. 이 검이 대감의 혀를 자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구족을 멸할 자가 너무 많아서 망나니가 쉴 날이 없겠군." 이덕형도 한 마디 더했다.

"맹자는 '도를 따르면서 지금의 풍속을 바꾸지 못하면 천하는커녕 하루아침도 차지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환호(渙號)하고 역옥(逆獄)하지 않으면 어찌 이 나라를 지키겠느냐. 그리고 신율이 이 옥사는 진실된 것이라고 나를 속였으니, 그를 참해야지 어찌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겠는가?"

무명이 한숨을 푹 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검을 움직였다. 형혹의 목이 그대로 잘려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이덕형이 정인홍을 꾸짖었다. "정사(政事)는 제껴놓더라도, 오늘 대감이 모살하고 무고하려 한 죄는 마땅히 저리 참수해야 하겠으나, 후대에 이리 추한 얘기를 전할 수 없으니 불문으로 하겠소이다. 대신 다시는 도감의 일에 관여치 말고, 이 옥사에도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시오. 그리고 상께 도제조의 자리에 오리(梧里) 대감을 명하라 권하시오."

정인홍이 시선을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다시 말해두지만 나도 신율에게 속았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요. 그러나 이이첨이나 신율을 내 어찌할 수는 없소. 대신 도감의 일은 죽을 때까지 관여하지 않겠소." 그 때 깔깔거리는 소리와 함께, 형혹의 잘린 머리가 입을 열었다.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입이 벙긋거렸다. "내 원통하게 죽었으니 말하마. 오늘 검을 휘두른 늙은이는 윗사람에 빌붙어 추하게 살다 죽겠고, 조정에서 온 늙은이는 내년을 넘기지 못하겠고, 무고한 늙은이는 오늘이 아니라 여든이 넘었을 때 목이 잘릴 것이다. 이것은 저승의 명부를 보고 말하는 것이니 저주가 아니라 예언이다." 무명이 머리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머리는 여전히 웃으면서 굴러갔고, 검은 옷의 도사 하나가 다시 칼을 들어 반으로 잘라버리고서야 멈췄다. "저… 저년은 뭐인데 목이 잘리고도 말을 하는 게요?" 이덕형이 더듬더듬 물었다. "사람이 아니외다. 이미 반쯤 귀신이었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이물을 사슬과 부적으로 봉하고 있었다. "저것은 다시 도감에 가져다 놓겠소이다. 이미 주술이 있었으니 영향이 나타날 것이나, 최대한 중화하는 의식을 행해 달래보겠소. 그러나 죽지는 않을테지만 광증에 시달리기는 할 것이오."

"전하..도 말인가?" "그렇소이다. 이 옥사에 관여한 자 모두가 그럴 것이고, 관여한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할 것이오."

"알겠네." 이덕형이 정인홍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십시다. 합천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 저년 말은 무시하시오. 분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일테니."

"흥, 대명률을 보면 여든이 넘은 자를 참하는 경우는 역적밖에 없고, 그때에도 성상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럼 내가 역적이라도 된다는 말이겠나? 전혀 마음쓰이지 않네만."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년) 3월 16일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장계하기를,

"금부 도사가 죄인 최억을 잡아갈 적에 봉산 군수 신율에게 곤장을 마구 맞고 발, 손, 다리, 무릎이 모두 문드러져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신율이 조정의 처결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혹독한 형장을 가하여 곧바로 죽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매우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하였으나 국청에서 버려두고 따지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년) 3월 17일

제세가 스스로 인보를 위조한 죄로 응당 죽게 될 줄 알았으므로 밀고자[告者]가 되어 사형을 면해 보기 위해서 널리 많은 사람들을 끌어대면서 끝내 무고의 단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국청에서도 그것이 허위임을 알았으나 김직재 부자가 거짓으로 자복했기 때문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제세는 하나의 요망스런 사람이고 직재는 마음과 행실이 거칠고 어긋났는데, 형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또 싫어했던 사람을 모함하기 위하여 다같이 횡설수설하였으므로 이 옥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1613년) 3월 12일

공신은 네 가지가 있었다…(중략)…이른바 형난 공신(亨難功臣)이란 신율이 무고한 공이다. 무고한 왕손을 죽이고 그 결과로 황해도 전체에 독이 미쳤다. 사람들이 모두 율의 살을 씹어 먹고 싶어하였으나 왕은 더욱 그를 총애하였다. 국문에 참여하였던 여러 신하는 기일의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모두 녹훈되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1613년) 10월 9일

전 영의정 이덕형이 졸하였다[죽었다].


초조하게 한 남자가 손가락으로 서안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촛불이 낮게 흔들리더니 그 앞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손가락에 낡아빠진 반지를 낀 늙은 여자였다. 노인이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네 번 절을 올렸다. "미리 경하드리옵니다."

"누구인데 내게 왕의 예를 올리는 게냐?" 남자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여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불어도감의 선무사로 있는 무명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대궐 안에 계실 터여서 찾아뵐 수 없을 테니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나이다. 능양군 나으리… 아니 전하."

"그 무슨 망측한 소리더냐? 내가 역모라도 꾸민다는 게냐? 여봐라-" "전하, 이제 내일이면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만, 무릇 이 나라에 괴이한 것들을 잡아 봉하고자 선대왕께서 불어도감을 만들어 도사들을 불러모았나이다. 그러나 지금 폭군과 간사한 자들이 농락하고 있으니 통탄하여 찾아뵌 것입니다. 제가 폭군에게 충성한다면 고변하여 영화를 누리지 왜 여기 왔겠나이까."

"그래…그래서…원하는 게 뭐요?" 능양군이 여전히 경계하듯 물었다. "지금 도감이 정인홍과 이이첨의 무리에게 장악당해 있으니, 폭군이 폐주가 된 이후에 폐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부디 그러지 마시옵고, 힘을 실어주시옵소서. 일찍이 정인홍이 망신을 당하고 도감에서 손을 떼겠다 하였으나 문익 대감이 졸한 뒤 다시 기어와 폭군의 위세를 업고 찍어누른 것이지, 도감의 누구도 마음으로 따른 자가 없사옵니다."

"문익 대감이라면… 한음 대감 말이요? 그도 도사들이 이 나라의 녹을 먹고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오?"

"전하." 무명이 흐느끼듯 말했다. "도사들이라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다를 것이며 충성을 모르겠나이까. 지금 도감을 폐하면 나라가 도탄에 빠지고 구미호와 귀신의 무리들이 판칠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허어…" 능양군이 한숨을 쉬었다. "내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니, 다른 자들과 마땅히 논의해야겠소." "아니 됩니다!" 무명이 말을 끊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즉위하신 뒤에 알리시옵소서. 그 전에 약조해 주시옵소서. 전하. 일찍이 문익 대감이나 문충 대감[이원익]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도감의 필요성을 알고 기꺼이 중책을 맡으려 하셨나이다. 약조하여 주시면, 반정에 반드시 필요한 비책을 알리겠나이다."

"흐음…." 능양군이 고민하듯 말을 끌었지만, 솔깃한 표정이었다. 도사라는 자들을 처음 본 호기심과 두려움에, 결국 그가 승낙했다. "내 그리 하리다. 그래, 그 비책이 뭐요?"

"즉위하시면 정인홍을 능지처참하시옵소서."

"정인홍을? 음… 곤란한 일이오. 대명률을 보면 여든 넘은 자를 참수하는 경우에는 형을 감하라 되어 있지 않소이까. 멀리 정배(定配)하거나 자진(自盡)을 명하면 모를까 능지가 가하겠소?"

"대명률에는 역적을 참할 때는 전하의 재가가 있으면 참수할 수 있다 하니, 그를 역적으로 몰면 될 일입니다. 모든 소인은 다 역적 아닙니까. 또 이유가 있나이다." 무명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인홍이 도사들을 부려 일찍이 진시황이 찾던 비책을 시험했으니, 그자는 지금 반쯤 귀신이옵니다. 팔을 잘라도 피가 나지 않으며 목을 잘라도 얼마간 살아있을 것이니, 반드시 능지하여 조리돌림해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허어, 그런 도술이 있단 말이요?" 능양군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사들은 참으로 모르는 주술이고, 일부의 무당들 사이에나 극히 비밀스레 전해오던 것인데, 정인홍이 억지로 도사들을 부려 알아낸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정인홍을 잡아 국문하시고 몸에서 피가 흐르는지 보시옵소서. 그러면 자연히 아실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무명의 모습이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종이 하나만 흩날리다가, 그 종이도 허공에서 스스로 타올라 없어졌다.

능양군이 어안이벙벙해 있을 무렵, 무명은 비틀거리며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십년도 전에 죽은 형혹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추해도 나라가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어찌하겠느냐. 정인홍이 소인과 역적에 대해 한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내 이제야 알겠다." 무명이 무릎을 두드리면서 걸었다. 그 모습은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1년(1623년) 4월 3일

왕이 이르기를,

역적의 괴수 정인홍은 뱀과 같은 성품이며 음흉한 귀신 같은 마음을 가졌다…(중략)…사람이 아무리 악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누가 이처럼 극단에 이르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늙어서도 죽지 않은 것은 필시 하늘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리라.

정인홍 등을 능지처참하여 머리를 사방에 돌리고 재산을 적몰하고 연좌법을 시행하며 집을 헐어 못으로 만드는 등의 일을 모두 법[律文]에 따라 시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