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aft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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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카오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저씨?"
"오냐."

뒤에서 부하들이 수근거렸다.

"폼 잡기에는 방금 벗어서 옆에 놓은 군복이 조금 깨네요."
"그러게요. 그거 아니었으면 나름 미스터리한 등장이었을 텐데."
"아저씨? 둘이 무슨 관계야?"

…제발 조용히 해 주었으면.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핫하! 예전에 말하지 않았어? 조크! 웃음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고."

그래도 카오스의 본거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재단에 구해졌듯 아저씨 또한 카오스에게 구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카오스한테 농담이라도 건네셨나요…?"
"…비밀이야."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무 그렇게 보진 말라고. 카오스에 완전히 소속된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정장을 입은 채로 빙글 돌았다.

"지금 내 의복을 보면 생각나는 단체가 있지 않아?"
"…뭔데요."
"이런! 잘 생각해 봐!"

…또 도졌다. 재미도 뭣도 없는 그의 어조가.

"재미도 뭣도 없는 대화라는 표정이구나! 잘 봐! 예술의 패션이잖아!"

예술가라기보단 마술사에 더 가까운 복장이라는 말을 가까스레 삼켰다.

"Are we cool yet?"
"뭐요?"
"아주 유쾌한 친구들이지! 너도 한 번 만나보면 친하게 지낼 지도 몰라! 너는 내가 인정한 '재밌는 사람'이니까 말이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 아저씨가 그쪽 소속이었다고?

"허먼 풀러의 불온한 서커스에도 소속되어있지!"
"허먼… 뭐시깽이?"
"이런, 나름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충 설명하자면 대중에게 관람시키고자 하는 SCP들을 포함한, 서커스를 여는 것!"

그는 어디서 꺼낸 지 모를 광대 마스크를 썼다. 눈가에 눈물이 그려져있으며,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울고 있는 괴상한 입꼬리가 그려진 마스크를.

"그리고, 이 곳. 카오스까지."
"…아저씨?"

뒤의 부하들은 이미 전투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아, 걱정하지 마. 외부로 흘러나가는 소리는 차단하고 있으니, 카오스의 지원은 오지 않아."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건 그렇고."

광대 가면에 가려진 그의 표정이,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떻게 너희를 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SCP-268[01]이 씌여있는 머리가 싸해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가 칼로 온 몸을 난도질할 것만 같은 찌릿찌릿함이 나를 감쌌다.

이곳에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십중팔구 우리 부대는 전멸이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건…"

아저씨가 말을 끌었다.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비밀이란다!"

그가 어디서 꺼낸 지 모를 담요를 머리 위에 던져 펼쳤다.

"비밀이 많은 남자는 인기가 많은 법이니까!"

담요가 차츰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다른 차원에 들어가듯, 그의 몸은 점차 담요에 들어가고 있었다. 담요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그의 모습은 어디를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담요는 바닥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아저씨."
"대장. 누구였습니까?"
"…너는 닥쳐요."
"대장은 나만 미워해…"

나는 백남이를 무시한 채로 옆에 떨어진 군복을 쳐다보았다. 가져가는 것을 깜빡한 듯 홀로 남겨져 있는 군복을 쳐다보니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허술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17

나는 군복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건 어디에 쓰시게요? 냄새라도 맡으실 겁니까?"
"제발 지랄하지 마세요. 다시 만나면 돌려드리려고 가져가는 겁니다."

수녀의 말에 나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답했다.

"뭐에요. 대장 취향이 아저씨였습니까?"

백남이가 말했다.

"취향은 존중해드리겠습니다."

수녀가 말했다.

"그 취향이 나를 향하지만 않으면 돼."

수도승이 말했다.

"…즐거운 잡담은 다 끝나셨나?"

아무것도 아닌 자가 말했다.

…?

순간적으로 들리는 제3자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회검색 거적떼기를 온몸에 둘러싼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이 모자는 효과가 있는 거야? 만나는 사람마다 다 알아보는구만.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더구나. 그 상태로 사르킥 숭배는 상대할 수 있겠어?"

부하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본능적으로 눈 앞의 상대를 적대하면 본인이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 나를 적대하는 행위를 하진 말아주렴."
"당신은 누구죠?"
"아무 것도 아닌 자. 너희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지."
"…최근에 재단과 뱀의 손을 적대하기 시작했다던?"
"적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너의 편이라는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그래… 지금은 입이 굉장히 험했지."
"나를 잘 아는 듯 말하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아니, 나보다 널 잘 아는 존재는 없을 걸."
"스토커입니까? 굉장히 역겹네요."

그 자가 나의 말을 끊었다.

"너와의 만담을 더 할 생각은 없어.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거든."

굉장히 마이페이스인 사람이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05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알아야 하는 건가요?"
"SCP들이 일상생활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 만병통치약으로 의학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거나, 강화 액체를 통해 세계의 기술력을 진일보시키거나."
"좋은 일이군요."
"그것이 가능하다 생각해?"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18

"원래 세계… 그러니까, 각 세계였다면 가능했겠지. 본인들 관할의 세계만 관리하면 됐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박수를 짝 소리 나도록 쳤다.

"세계가 전부, 합쳐졌으니까."
"그것이 무슨 상관이죠?"
"…하나의 세계에서 SCP끼리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칙현상은 아직도 실험 중인 주제란다. 하나의 세계 내부에서도 복잡한 변칙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수십 세계가 존재한다? 그 의미를 알겠니?"
"세계가 개판이 될 것이란 건가요?"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야. 된단다. 확실하게."

마치 본 것마냥 말하는군요. 나는 중얼거렸다.

"온 세계의 모든 05는 목적이 동일하단다. 다른 단체들의 목표가 동일하듯이 말이야. 그들은 다양한 세계의 05가 합쳐진 이후로 자만해졌단다."
"자만이라구요?"
"타 세계의 기술력과 격리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대부분의 SCP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만심."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툭 내리쳤다. 나의 머리 속으로 연속적인 그림이 펼쳐진다.

머리가 세개가 된 채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듯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소리친다.

버스에 갇힌 채로 파충류에게 잡아먹히는 사람들. 죽기 싫다는 듯 빠져나오기 위해 수십 쌍의 팔이 창 밖으로 나와있다.

하늘을 나는 헬기에 거대한 거머리가 달라붙는다. 거머리가 몸을 쥐어짜자 헬기는 굉음을 내며 터져버린다.

하늘엔 거대한 눈동자가 떠있었다. 하늘을 쳐다본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한다.

전신이 하얀, 기괴한 사람이 온몸의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한 석상에게 다가간다. 석상은 순간적으로 사방에 가시를 내뿜는다.

바닥에 지네가 가득 찬 늪이 생긴다.

하나의 공이 끝을 모르는 속도로 굴러간다.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미치고, 죽어나갈 뿐이었다.

#19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날 보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05의 미래를?"
"…당신이 보여준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죠?"
"글쎄… 믿고 말고는 너의 자유란다. 그에 따른 결과는 너 자신이 책임져야 하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단도를 집어던졌다. 아무 것도 아닌 자는 몸을 휙 돌려 도를 피했다. 벽에 박힌 단도가 벽을 점차 녹여갔다.

"제가 무슨 대통령의 자식이라도 된답니까? 제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전자는 틀렸지만, 후자는 정확해."
"거 참 대단한 예언가 납셨네요. 점집이나 차리러 가십쇼. 굳이 남의 길 훼방놓지 마시고."
"…그렇다면 일단 물러가도록 할게. 혼돈의 반란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돌아가도록 하렴. 여긴 아직 위험한 곳이니까."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서 말이죠."
"…한 마디도 안 진다니까."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내가 보여준 미래는, 절대 잊지 마렴."
"엿 드세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보이지 않게 되자, 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분."
"…네…!"
"월급 깎습니다. 불만 있습니까?"
"…없습니다…"

망할. 사령관이 싸우는 동안 뒤에서 구경만 하는 것을 부하들이라고…

나는 부하들을 째려봤다.

-…아. 들리시나요?
"들립니다."
-대단하시네요. 그 짧은 사이에 수뇌부를 암살하시다니. 정보 지원도 끊겨있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뭐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떠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혼돈의 반란 수뇌부 중 일부를 죽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무튼, 이제 복귀하시면 돼요. '세계 오컬트 연합(GOC)'가 한 것처럼 증거를 조작해놨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복귀하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뱀의 손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 낫겠어.

#20

눈을 뜬다. 옛날 집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어본다. 가족들이 그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숨이 가빠진다. 밤인 듯. 집 안이 어둡다. 불이 켜지지 않는다. 뒤에서 누가 나를 껴안는다. 동생이었다. 껴안은 팔에 피가 흐른다. 아버지가 나를 깔아뭉갠다. 어머니가 그 위에 올라탄다. 시체 썩은내가 코를 찌른다. 피가 점점 내 몸을 감싼다. 숨을 쉬기 힘들어진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다. 너의 탓이야. 너의 책임이야.

눈을 뜬다.

여전히 붉은 색의 하늘에, 태양이 중천에 떠 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온 몸에는 땀이 범벅이었다.

"…악몽을 꿨어…"

나는 곧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 땀을 씻어내린다.

"일어나셨습니까?"

수녀의 목소리가 방의 밖에서 들려왔다.

"네. 일어났어요."
"잠시 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요. 어제 일에 대한 반성회?"
"…뒤끝이 심하시군요."
"어제 일인데, 뒤끝이라뇨."

나는 작게 웃었다.

"사실 크게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대 SCP전을 위해 있는 부하들이니까요."
"그건 감사하네요."

나는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대충 수건으로 털었다. 대충 걸려 있는 여분의 옷을 꺼내 입고, 방 문을 연다.

"좋은 아침입니다."
"점심입니다. 늦잠을 주무셨군요."
"어제 혼자 싸우느라."
"…점심 드시고 오시죠."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수녀를 향해 살짝 웃고는 점심을 사 먹기 위해 호텔의 밖으로 나섰다. 호텔 내부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입맛이 싸구려라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1

나는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한 덩이가 나왔다. 굽기는 미디엄 레어.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의 향이 코를 자극한다.

고기를 크게 한 점 썬다. 칼질을 앞뒤로 할 때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진다.

아직 육즙이 떨어지는 고기를 고민하지 않고 포크로 찍어 입에 집어넣는다. 묵직하고 중후한 맛이다.

웨이터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우리 지점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예. 굽기도 적절하고,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 또한 오버쿡되지 않았네요."
"다행이군요."

웨이터는 대답을 듣고도 돌아가지 않고, 나를 본 채로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합석을 요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레스토랑에서요?"
"어… 일행 분이 아니셨습니까? 7088의 번호를 가지신 분이 일행이라고 하여…"

7088…? 나의 죄수 시절 번호였는데?

"…아. 일행입니다. 잠시 까먹었네요."
"그렇다면 불러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SCP와 관련된 인물일 듯 하다. 레스토랑에서의 합석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리 과격한 진영도 아닐 터이고,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서 손해볼 점이 없을 것이다.

곧이어 정장을 입은 노신사가 날 찾아왔다.

그의 눈이 찰나에 탐욕으로 번뜩였다. 바로 그 낌새를 지운 듯 했지만 나는 이미 그것을 느낀 이후였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 어떤 단체인가요?"
"이런… 젊은이는 사교에 대해서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 같구만."

…꼰대같네.

"본디, 요점은 약간의 에피타이저 후에 진행되어도 괜찮은 법. 나도 음식을 주문해도 괜찮겠나?"
"원하시는 대로."
"고맙네."

그는 나와 같은 음식을 주문했다.

"이 곳의 음식은 참 괜찮아. 코스요리는 완급 조절이 적절하고, 디저트 또한 지나치게 달지 않…"
"그래서, 요점은 뭔가요?"
"조금 더 격식을 갖추는 것이 어떤가, 젊은이?"
"지금 제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 격식입니다. 늙은이."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22

"그래… 그렇다면 요점만 이야기하지."

그는 방금 막 나온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고 천천히 우물거렸다. 한 번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 후에야 말을 이었다.

"우리 단체에 들어오는 것이 어떤가?"
"기각."
"우리 단체는… 으잉?"
"SCP와 관련된 단체 중에 정장을 입고 활동하며, 재단과는 우호 관계가 아닌 곳은 AWCY, GOC밖에 없을 텐데. 적어도 그 Cool이란 놈들은 이런 늙은 냄새를 풍기진 않거든요. 오컬트 연합. 맞죠?"
"허허… 우리 단체를 알면서 거절을 한다…"
"모든 SCP를 파괴? 그건 반대입니다. SCP라는 존재는 사람을 해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구원할 수도 있죠."

그가 비웃었다.

"대체 누가…"
"그 예시가 저구요."
"…"
"아까부터 제 어깨 위의 나비를 노려보시는데, 어림 없어요."

재단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붙은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락였다.

"허허… 시간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정 생각이 그렇다면야. 생각이 바뀐다면 연락 주시게."
"뭐. 그 정도야."

나는 남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남은 고기를 한 입에 털어넣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먹어도 될 텐데 말이야."
"제가 좀 천천히와는 관련이 없어서 말이죠."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도청기와 추적기가 미세하게 달린 명함을 찢은 채로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참 역겨운 놈들이네…"

그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원래 있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23

"오셨습니까? 점심은 괜찮으셨나요?"

수녀가 물었다.

"네."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별로네요?"

쓸데없이 예리하긴.

"아침부터 거하게 먹어서 속이 더부룩하네요."
"점심이라니까요."
"예, 예."

수녀가 나를 슬쩍 흘겨보고는 본론을 꺼냈다.

"어제 만난 그 사람 있잖습니까."
"아저씨요?"
"아니요. 그 후에 만난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자요?"
"네. 그 사람에게서 대장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뭐요?

"어… 그저 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장과 계약할 때 사용했던 눈 또한 정신 간섭 계열이잖습니까. 그 사람에게서, 이미 그 사람과 제가 연결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 당신 또한 계약이 유지되는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이젠 하다하다 미래의 내가 나를 말리러 온다고? 타임 패러독스는? 그냥 평행세계 이론인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달사항은 그것이 다인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을 정리하러 가보겠습니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수녀가 나를 부축하려 했지만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나의 호실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정리를 해보자.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말한 것, 보여준 것. 수녀가 말한 것.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도출되는 하나의 결과.

재단은 타 진영 제압엔 성공하지만, 목적 달성은 실패한다. 그리고 어떠한 진영보다 더 괴랄한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이대로 재단의 손을 들어준다면 나는 미래에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 과거의 나를 말리러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루프되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다 고민을 하는 것을 깨달았는지, 나비가 날개를 팔락거린다. 손가락을 내어 주자 위에 살포시 앉는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24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중얼거렸다.

"듣고 있나요?"
-어머.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처음부터요."
-후후… 거짓말은 좋지 않아요.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보고 있었는 걸요?
"그러니까, 처음부터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당해주는 것도 매력이…
"당신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재단과 동맹관계인 것은, 검은 여왕과도 관련이 있습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어째서 묻죠?
"제가."

나는 말을 한 번 끊고는 다시 이었다.

"재단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참 탐나네요.
"그렇다고 검은 여왕 측으로 들어갈 것은 아니구요."
-그건 또 아쉽네요.

'이렇게 진행되어봤자 미래에는 파멸뿐이다'라고 전달해 봐야, 나의 말을 진지하게 수용할 단체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제3세력을 구축할 것이다.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세력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SCP를 세상이 모르도록.
SCP가 세상에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SCP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도록.
그런 세력을 만들 것이다.
SCP에게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을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검은 여왕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어머, 신뢰해 주시는 건가요?
"거래라고 하죠."
-거래 말인가요? 그쪽에서 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죠?
"사르킥의 해체."
-…진심인가요?
"완연한 사르킥의 붕괴는 불가능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의 목적인 SCP-999[99]의 탈취, 혹은 파괴를 도와드리죠"
-그것이 저희에게 이득이 될까요?
"손해가 되는 것을 막아드리는 것이죠."

그녀가 웃었다.

-똑같은 패로 얼마나 많은 집단에게 지원을 받아낼 셈이죠?
"가능한 한 많이."
-욕심쟁이시네요.
"자주 듣습니다."

#25

SCP의 파괴를 바라는 GOC로부터.
예술 활동을 계속하고자 하는 AWCY으로부터.
사르킥의 지배를 원치 않는 모든 집단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검회색 누더기를 쓴 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 결국 변화가 생긴 것이구나."
"당신이 선택한 '책임'이라는 단어에 울컥해서 말입니다."
"다행이야… 정말…"

나는 순간 의아해져서 물었다.

"당신은, 어느 정도로 세상을 반복했죠?"
"…"
"아무 것도 아닌 자는 한 명이 아니죠. 그리고 그들 전부가 나의, 혹은 다른 세계의 내 미래라고 한다면…"
"두 가지만 알려줄게. 첫째, 아무 것도 아닌 자는 적어도 네 자리 숫자를 넘어. 둘째, 나는 가장 처음 만들어진 아무 것도 아닌 자였단다."
"…"
"대답이 됐니?"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네가, 끊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보죠."
"나 또한, 도와줄 테니."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사라졌다.

동시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26

말 그대로 세상이 반전되었다. 차의 내부와 외부가 뒤집히고, 중력이 상단으로 올라갔다. 일직선으로 난 길이 점점 꼬여갔다.

"꺄아아악!"
"으아악!!!"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세상이 갈라졌다. 나의 눈 앞으로 하나의 선이 생겼으며, 선의 좌측은 정글과 사막, 초원과 바다가 뒤섞인 듯한 혼돈스러운 광경이 생겨났다.

"하!"
"후!"

그리고, 온 몸이 새빨간 사람들이 그 혼돈 속에서 튀어나왔다.

누군가는 갈비뼈가 가슴의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으며, 누군가는 전신에 눈이 달렸다. 그들은 선을 넘어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온 몸이 도끼로 난도질당하고, 모든 관절이 반대로 꺾이며, 칠공에서 혈이 새어나오는 사람들. 그들은 절규하며, 죽어갔다.

시체가 된 사람은 온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람을 죽인 붉은 존재들의 모습이 점차 더 기괴해지기 시작했다.

"…잡아…!"
"저것들 쳐 죽여!"

나는 소리쳤다.

수도승, 광전사가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붉은 주술사가 불길한 주문을 외우자 수녀가 그것을 사전에 차단한다. 백남이가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도끼로 난자하는 붉은 존재를 터뜨려 죽였다. 녹색 피가 나를 뒤덮었다.

내가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했다. 마치 악마를 보듯.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원래 쓰레기였으니까.

나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세게 후려쳤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구하러 왔어요."

#27

"세계의 신비 속에서 개미 같은 인류는 죽어나갈 것이다!"

한 남자가 단상 위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원사르킥의 인원 또한 들고 일어났다! 위대한 카르시스트 이온께서, 우리를 지키고 계시니!"
"#~;!"#@"
"신사르킥 또한 신의 신비를 마주할 것이며!"
"@"~;*!&"
"신비 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갈 것이노라!"
"#×-/*#!"

알 수 없는 소리로 남자의 연설에 호응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었다. 피부가 하얀색으로 변했으며, 붉은 존재들처럼 생김새가 기괴하게 바뀌었다.

나와 일행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전투의 시작은 백남이가 쏜 총이 연설을 마친 남자의 머리를 터뜨리는 것으로 알렸다.

하얀 존재 하나가 입에서 초록색 액체를 뱉었다. 내가 하얀 천을 꺼내들어, 허공에 펼치자 천은 액체를 흡수하고 소멸했다.

수도승이 존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얀 존재의 복부에 난 이빨 사이로 주먹을 꽂아넣고, 그대로 위로 들어올렸다. 두 손을 그곳에 집어넣은 채로 양쪽으로 찢어버린다. 수도승의 손에 난 상처는 이내 아물었다.

"재밌어! 때리는 맛이 있어! 좋아!"

광전사가 메이스를 바닥에 찍어내린다.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린다.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이단이라고!"

광전사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적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28

질척거리는 녹색 액체가 사방에 흩어졌다. 신발이 그 액체 위를 철벅 소리를 내며 밟는다.

"…다들 무사합니까?"
"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존재의 시체가 가득했다. 사지가 찢겨 죽고, 머리가 터져 죽고. 심장만 적출되어 죽은 시체도 있었다.

"이동합니다."
"네!"

어떤 자는 가스를 전방위로 내뿜었으며, 어떤 자는 많은 질병을 몸 속에 모아놓은 채로 자폭을 하기도 했다.

동물과 곤충을 융합한 듯한 신체를 가진 자가 있었으며, 온몸에 바늘이 꽂힌 채로 비명을 질러대는 자 또한 있었다.

저 모든 것은 인체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에게 제물을 바쳐, 신비를 얻었으며.
신비라는 것에 기대어 공포를 얻었겠지.

저치들에게 죽어간 이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를 빠득 갈았다.

불길이 몸을 둘러쌌으며, 크기를 점차 키워갔다.

발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하얀 존재를, 빨간 존재를 죽여나갔다.

이미 죽어나간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날 살릴 수 있었잖아! 하는 원망이 들려온다.

시체가 일어서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악마의 자식이라며 나를 잡아끈다.
비난과 원망의 눈초리가 나를 관통한다.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회색이 된 나비의 색이 점차 검은빛을 띄기 시작한다.

눈을 감는다.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한 일에도 책임을 못 지는 나다.

아직까지 트라우마에 떨며, 자기 전에는 악몽을 꾸지 않게 해달라 소원한다.

그런 미숙한 사람이, 남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지나친 만용이다.

나는 다리에 붙은 시체를 떨궈냈다.

입술을 꽉 씹어 피가 배어나온다.

죽은 사람들까지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최선을 다한 행동에도 실패했다면, 그것을 비난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자책감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친다면, 그것은 나의 탓이다.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며, 불길을 키웠다. 한결 거세진 불길에 존재들이 타들어간다.

-대규모 교전이 발생했어요. 이쪽으로 올 수 있을까요?

뱀의 손. 아니, 검은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29

나는 일행과 집결지로 달려갔다.

집결지에 도착하고 보이는 것은, 단 하나의 지옥도였다.

몇몇 인원이 후드를 입고 페인트 스프레이를 든 채로 벽에 용의 그림을 그린다. 완성이 된 그림은 살아나와 붉고 하얀 존재를 물어죽인다. 존재들은 용에게 저주를 걸었다. 용은 이내 전신이 썩어들어가, 심한 악취를 내뿜기 시작했다.

우측 어깨에 GOC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군복을 입은 단체가 존재들을 무장 진압하기 시작했다. 총과 칼로 존재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뼈와 주술로 대응했다.

어두운 색을 가진 거적떼기를 뒤집어 쓴 자들이 여러 도구형 SCP를 사용하며 인당 여러 존재들을 상대해 무위를 뽐냈다.

하지만 전황은 그리 유리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밀고 나오는 존재들. 어디서 소환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하나가 죽으면 셋이 달라붙는다. 사람들은 하나 둘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일행이 인간 진영에 가세했다. 백남이는 GOC에게. 수도승과 광전사는 아무 것도 아닌 자에게 합류하며 각자 수 인분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수녀는 숨어있던 검은 여왕의 진영에서 정신공격을 막아냈다.

-이리 오거라…
"!?"
-이리로…

혼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자들을 둘러보았지만, 전투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싶었다.

나는 일행에게 교전을 지시하고 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어디 가시는 거에요!
"잠시. 누군가 절 부릅니다."
-누가 부르는데 이 때!
"이온. 카르시스트 이온."
-허? 그게 무슨 말이죠?
"사르킥의 창시자이자, 현재 환생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교주 말입니다."
-농담이라면 재미 없…

그녀와의 연결이 끊겼다.

#30

"오랜만이로구나."
"…예."
"그래서, 결국 탈출은 했나 보지?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예."
"재밌는 이야기는 많이 쌓여있는가?"
"…당신에게는 재미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 채,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다가, 주황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좌선 중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번개에 둘러싸인 모습으로도 보였고, 코끼리의 모습으로도 보였다.

"SCP-003…? 이라 불러야 할까요."
"저런. 신님이라고 부를 땐 귀여웠는데."
"…3년 간, 저를 농락하셨던 겁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만."

천연덕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울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저에게 기회를 준 것 또한!"

나는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변덕의 일부였습니까..?"
"변덕이라니."

SCP-003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편도 아니었네."
"나는 말했지.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것은 언제나 부탁이라고. 소원이며, 희망이라고."
"그것은 사르킥 숭배에게 인체실험을 당하는 인간이기도 했네."
"본인의 몸이 괴물이 되는 것을 맨 정신으로 지켜보며 나에게 빌어댄 사람이기도 했으며"
"부서진 신의 교단에서 신의 일부를 찾게 해 달라며 빌기도 하였지."
"누군가는 하느님이라며, 부처님이라며, 알라라고 하며."
"그저, 소망을 빌기만."

SCP-003이 의욕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보는 것은 그리하여 고통, 불안, 절망 뿐이었네. 그것에 대한 희망은 나였으니까.'
"그리하여, 네가 나에게로 왔을 때에는 정말, 정말로 행복했지."
"용기를 내고, 공포를 극복했으며, 절망을 숨기는 이야기."
"나는 너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내린 단비에, 내가 느끼는 것이 갈증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나는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되었네."
"말하자면, 3일 굶은 사람에게 김밥 한 조각을. 아니지, 치킨 한 조각을 준 느낌이라 해야 하겠군."
"그렇게 나는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네. 치킨을 알기 전 10000년은 괜찮았지만, 그 이후의 3년은 참을 수 없었지."

그는 말했다.

"그래서, 이야기는 준비되었는가?"

#31

"그렇게 이야기를 원한다면, 책이나 볼 것이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의 이야기나 들을 것이지!"

나비의 색이 검게 변했다. 파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린다.

"어째서… 어째서 저입니까."
"내가 그것을 바랬기에."
"뭐라구요…?"
"주인공과도 같은 이야기. 트라우마를 겪었지만, 극복한 이후 출세한다. 하지만 후에 세상에 얽힌 큰 비밀을 깨닫고, 절망하지."

그가 크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아닌가!"
"그 좆같은 시나리오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겁니까?"

나는 몸에 불꽃을 둘러쌌다.

"당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렇네. 카르시스트 이온의 환생이 되어, 사르킥을 움직였고, 혼돈의 반란의 수뇌부에게 계시를 내려 재단과 전쟁을 벌이게 했지."
"…당신은 신이 아니야."
"신이 맞네. 당신들이 비는 소원의 결정체."
"그저, 악마일 뿐이야."
"나를 만든 아버지는 인간이었으며, 나를 따르는 신도들 또한 인간들이네."

불꽃은 SCP-003을 태우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는 살신 또한 인간일 터인가?"

그가 전신으로 신성함을 내뿜었다. 대지가 갈라졌으며, 천둥이 온 세상을 덮었다. 어디선가 홍수가 일어나 땅을 바다로 만들었으며, 태양이 세 개가 되었다.

나는 하늘을 날았으며, 총으로 그를 사격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녹이는 액체를 집어던졌으며, 시공간을 왜곡하는 기계장치를 작동시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인가? 내가 읽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이것이 엔딩이란 말인가!"

그가 일갈했다. 진동하는 소리에 피가 입 밖으로 왈칵 솟구쳤다.

나는… 죽는 것인가?

순간 시야가 검은색이 되었다.

짙은 색의 누더기가 나를 덮은 것이다.

면류관을 쓴 사내의 팔이 잘려나갔다. 부처의 얼굴이 반 녹아내렸으며, 코끼리의 코가 통째로 소멸되었다.

"으…으아아아아!!"
"아픈가?"
"그것으로 아픈 것인가?"
"남의 고통을"
"이야기로 치부했으면서."
"더한 절망과 고통을"
"그저 듣기만 했기에"
"그것으로 아픈 것인가?"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닥쳐라!"
"그저 듣고, 읽은 것으로는"
"남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대는 고통스러운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는 알 수 없지."

남자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머리 자체가 사라졌으면서, 목소리는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온몸에선 새하얀 피가 새어나왔고, 고통에 몸부림치듯 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하면 충분한 것들이!"
"너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
"누군가가 너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너에 대해 글로 적으며"
"누군가는 너를 잊어갈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말을 이었다.

"네가 그리 원하던 이야기."
"꿈과 희망"
"용기가 가득하던 이야기에서"
"너는 한낱"
"지나가는 악역이었을 뿐이다."
"으으…으아아아!!!"

그는 큰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시체는 검회색 가루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32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말을 걸어왔다. 하얀 가운이라고 하면, 이제는 과학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첫째, 3등급을 기억소거를 받는다. 당신은 지금, 정신적으로 굉장한 타격을 입은 상태입니다. 어쩌면, 영구적인 장애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요. 개인적으로는 이 방법을…"
"두 번째."
"네?"
"저는 재활훈련을 하겠습니다."

두렵다. 당당하게 말한 목소리는 사실 떨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이 누군가의 소설이었을까봐. 트루먼 쇼의 이야기처럼, 나를 속이고 있었을까봐.

내가 살았던 삶이 거짓일까봐 두렵다.

"그래도… 해야죠."
"힘들 겁니다."
"알아요."

나는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고통스러웠고,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이겨냈다.

"내가 만일 기억 소거를 받는다면, 지는 것 같잖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겨낸 고난에. 어려움에. 굴복하는 것 같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무시당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과거를 잊지 않을 것이다.

"…뭐.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이해할 수 없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갔다.

새하얀 시트에, 새하얀 이불. 회색인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재단과 카오스는 적대할 것이다.
여전히 AWCY는 예술활동을 하러 다닐 것이며.
여전히 GOC는 SCP들을 파괴할 것이다.
사르킥 숭배 또한, 실패를 거름 삼아 여전히 종교 활동을 이어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여전한 이 세상에서.
한 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잊혀진 신 하나와,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 하는 사람 하나만이
과거와 달랐을 뿐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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