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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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월 전 —

“늦었잖아.”

마리안느가 꾸중하듯 말했다. 한 손으로는 캐리어 가방을 끌던 남성은, 미안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리안느는 한 손으로 뒷통수를 쥐어박았다.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렸으니 아프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문지르며 계속 걸었다. 마리안느는 살짝 앞서서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방은 트렁크에 넣은 뒤, 마리안느가 운전석에 앉고 남성은 조수석에 앉았다.

“이야, 살았다, 살았어. 영국 오는 비행기를 예약하기는 했는데 내 운전면허가 장롱 면허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그걸 잊어?”

“그러니까 장롱 면허지!”

남성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옷으로 안경을 쓱쓱 닦았다. 마리안느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라는 작자는, 이런 인간이었다. 늘 웃음을 달고 산다. 사실 화내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미친놈이라서 그래. 마리안느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마크가 제정신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유쾌한 낙천주의자일 뿐.

“왜 늦었어?”

“어? 아 그게 말이지, 공항에 가려고 버스를 타려는데 말이야, 갑자기 길고양이가 보이는 거야!”

“잠깐, 설마-”

“너무 귀여워서 놀아주느라 한 한 시간 정도가 걸렸지.”

“야, 이 화상아!”

차라리 미친놈이었으면 속이 편했을 텐데. 마리안느는 쓰려 오는 속을 부여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 운전대를 조작했다. 옆에서 아하하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하필 이럴 때 위장약을 챙겨오지 않았다니. 늘 이 작자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가방에 위장약을 넣어놨었는데 오늘은 까먹고 가져오지 않았다. 한 번의 부주의가 모든 것을 망친다. 그런 교훈을 뼈아픈 경험과 맞바꾸었다.

“제29기지까지는 얼마나 걸려?”

“한 30분 정도 걸리려나.”

“한숨 자기 딱 좋은 시간이네.”

그럼 잘 자, 하고 재빨리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는 오빠를 보고, 마리안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기지까지 가는 동안 저 입에서 나올 말들로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겠어. 끊임없이 나불댈 저 주둥이에서 나올 수다가 탈주한 SCP보다 더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짜증이 치솟아 뇌출혈로 사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벌써 잠이 들었는지 마크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고른 숨소리를 들었는지, 마리안느는 잠시 정면에서 눈을 떼어 오빠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보다 4살 많은 오빠의 얼굴. 곧 마리안느는 피식 웃고 정면을 보았다. 아직 기지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수고했네, 큐빅 요원. 제29기지에 온 것을 환영하네, 큐빅 박사.”

제29기지의 기지 이사관 제임스 플리쳐 박사가 둘을 맞이했다. 마크가 입구에서 자신의 ID카드를 제시하자 '이사관께서 뵙겠다고 하십니다.'라는 말을 듣고 따라온 것이다. 마크는 살짝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턱 부분을 긁으며 말했다.

“마리안느 큐빅 요원도 있으니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사관님.”

“뭐, 그럴까. 그렇다면 마크, 갖고 온걸 줘보시게.”

그 말에 마리안느는 짐짓 당황했다. 갖고 온 것이라니. 마크가 영국에 온다고 말할 때만 해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그냥 '너 보러 간다!'라는 말만 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갖고 온 것이라니? 하지만 마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어 플리쳐에게 건넸다.

“이게 무슨-”

플리쳐가 서류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자, 마리안느는 마크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빛으로 종이가 살짝 비쳐 보였다. 글자들이 거꾸로 보이기는 해도, 숙련된 재단 요원 정도라면 읽어낼 수 있었다. ‘임시 파견 요청서’. 정말로 느닷없는 일이었다.

“최근 저희 쪽에서 '예술가'들이 급증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유능한 요원이 하나 필요하더군요.”

“그래서 마리안느를 데려가겠다?”

“임시죠, 임시. 한 일 년 정도?”

“우리 쪽 핵심 인력인데.”

“에이, 우리 사이에 이럴겁니까?”

“나 참….”

“아니, 당사자 두고 둘이서만 쑥덕쑥덕 결정하는 거예요?”

마크와 플리쳐가 동시에 마리안느를 쳐다보았다. 마크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인사 과정에 상급자들이 참여하지, 당사자가 참여하는 게 어딨어?”

맞는 말이라 뭔가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아, 가끔 용돈 보내드릴 테니까요!”

“내 월급이 너보다 많아 이 녀석아!”

그런 시답잖은 말싸움을 벌이는 두 남자를 내버려 두고, 마리안느는 살짝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플리쳐 박사는, 평소에는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이다. 근데 마크만 만나면 뭔가 사람이 가벼워진다. 플리쳐가 큐빅 남매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랬다. 정말이지, 어느 쪽이 문제인 걸까. 마리안느는 생각했다. 한참을 그러던 두 사람은 어느덧 합의점에 도달했는지, 차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좋아. 지금부터 1년간 마리안느 큐빅 요원은 그쪽 소속이라네, 마크 큐빅 박사.”

“감사합니다.”

마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플리쳐와 악수를 했다. 겨우 끝났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마리안느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다시 한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몇 시간 동안 도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는 건지. 빨리 숙소로 가서 위장약을 복용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두통약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시간이…. 아직은 좀 이르군. 있다가 한잔할까?”

“간만에 좋죠. 마리안느, 넌 어때?”

“알아서 해, 알아서….”

“그럼 있다가 보지.”

둘은 플리쳐 박사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 내려가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마크를 노려보는 채로 마리안느가 말했다.

“임시 파견이라니, 금시초문인데.”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안 했어.”

“이런, 고양이를 탓해야겠네.”

또 그놈의 고양이냐. 숙소까지 가는 길은 왜 이리 멀까. 슬슬 속이 쓰려 오기 시작했다.

“뭔 일이라도 있는 건지 요즘 우리 쪽에서 전시회가 잦아져서 말이야. 손이 부족하더라고.”

“그냥 그쪽 직원에서 충당하면 되잖아?”

“이왕이면 숙련된 요원을 쓰는 게 낫지.”

확실히, 새로운 사람을 쓰면 교육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것이 많다.

“뭐, 그렇게 된 거야. 내일 플리쳐 박사님이 비행기 한 대 준비해주실 테니까 그거 타고 가자고.”

“하…. 그래.”

이미 결정된 일이라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윗대가리가 결정한 일을 어찌 바꾸랴? 곧 마리안느의 숙소에 도착했다.

“그럼 있다가 보자.”

“그래.”

마크는 아까 플리쳐 박사가 준 카드키를 꺼내 들고는 그의 숙소로 향했다. 마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마리안느는 곧 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갔다. 언제나 보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재빨리 컵에 물을 받아, 위장약을 삼켰다. 먹자마자 바로 효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플라시보 효과라도 있는지 벌써 조금 좋아진 느낌이었다.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익숙한 방. 1년간 보지 못할 방. 마리안느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플리쳐 박사가 연락하려면 아직 1시간은 남았다. 그때까지는 조금 쉬어도 괜찮으리라.


— 현재 —

마리안느는 어두운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술을 몇 잔 마셨어도 취기라던가 그런 것은 딱히 없었다. 취할 만큼 도수가 높은 술도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몇 개 보였다. 조금 전에 만났던 남자가 생각났다. 회색 양복에 회색 페도라. 정말로 지쳐 보이는 인상이었다. 마리안느는 멍하니 별을 보다가, 머리를 흔들고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조각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