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쇼맨

숲 속에서 어둠 속 인영이 일렁이며 그 앞에 자리한 거대한 저택으로 흘러가듯 걸어가고 있었다. 발치에 밟히는 나뭇가지의 우지끈 소리, 풀밭의 바스락 소리, 토양의 퍼적 소리, 하나 하나의 소리가 전부 칩입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이젠 상관 없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기 때문이다.

칩입자의 눈초리가 담벼락 위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철조망에 가 머문다. 예상대로 감시가 삼엄했다. 다행인 것은 경비가 서지 않는 시각이었단 점이다. 그는 조심스레 품 안에서 긴 풍선 하나를 꺼내더니 후욱 불고는 감시카메라에 던졌다.

펑.

윽. 소리가 정적을 밀어내자 칩입자는 몸을 순간 움츠렸다. 소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풍선은 의도대로 터지면서 카메라의 촬영부를 덮어버렸다. 나이스. 그는 이내 빨간 풍선 하나를 꺼내서 미리 준비해 온 휴대용 가스로 채워넣었다.


저택 안에서 열심히 숙제를 하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담벼락 너머에서 빨간 풍선 하나가 둥실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풍선. 지난 번 학교에서 잃어버린 것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자신의 풍선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단 희망에 부풀며, 아이는 풍선이 이내 높게 떠오르는 모습을 보다가… 웬 남자가 거기에 딸려 날아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누군가의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고요히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소리는 온 방을 뒤덮은 불편과 적의를 꿰뚫고 있었다. 마치 미지의 권총에서 발사된, 역시 미지의 총알처럼.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의 흉기와도 같은 눈빛을 그 자신에게로 보낼 때까지, 그레이브스는 그 소리가 제 바지 주머니에서 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십분 전,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자에게 쌍욕을 내뱉고 난 후였다. 수십 개의 눈빛이 그를 마구 난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레이브스가 마치 찰나의 무언가처럼 녹아 없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헨리 그레이브스는 불편한 얼굴로 슬그머니 바지에서 제 전화기를 빼내어 수신자를 확인했다.

삼각균.

그는 다시 사무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뭐가 어째?"

그레이브스는 얼른 눈을 깔았다. 그러니까, 조던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일은 빈번했다. 원체 까다롭고 번거로운 녀석인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그 까다롭고 번거로운 성격이 이번엔, 적어도 이번엔 발목을 잡으면 안되었다. 저자세로 나가야함이 분명하다.

"아유, 한번 자세히 좀 들어보라니까."

"자세히 들어봐서 잘 된 적이 있긴 하나?"

"자세히 들어서 저번에 늦진 않았지."

"자네 없어도 일찍은 갔어."

"그래… 그러시겠지… 여튼.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뭘 말하느냐 아닌가."

그레이브스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조던의 얼굴을 살폈다. 날카로운 얼굴에 한 줄기 정체가 깃들어 있었으므로, 그는 내심 마음을 놓았다. 이래저래 많은 공격을 받아낸 몸으로서 주적으로 치부해도 좋을 동료의 이러한 반응쯤이야 훤했다. 들어주긴 한다는 것이다. '들어주긴 한다'니까, 들어주기만 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적어도 그는 박사의 꽝꽝 언 저 심정에 파문을 일으킬 방법을 알았으니까.

"브란트의 딸을 찾아가보세."

"돌았나?"

조던의 얼굴은 그 눈썹을 제외하곤 전혀 변한 바가 없었다. 다만 그 치켜세워진 눈썹, 거기에서 그레이브스는 다년간 경험해 온 어떤 결과를 직감하곤 주춤 물러섰다. 니가 미쳤구나, 하고 말하는 눈빛이었으니까. 단련이 영 안 된 것은 아녔으나, 그래도 좀 너무 갔나, 하는 생각이 그레이브스의 머릿속 한켠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은 그랬다.

"왜 안 되겠나? 딸을 찾아서 물어보면 우리가 상정한 그 변칙예술가에게 도달할 수도 있겠지. 지금까지 용의자를 확정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 방법이 필경 도움이 될 걸세."

조던의 침묵과 함께 한산한 복도는 정말 그 자체로 무음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통스러울 정도의 적막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처음 몇분간은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조던의 눈을 째리어보듯이 응시했으나, 십분이 넘어가자 어색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옆에 있는 큰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기 시작하였다. 텅 빈 사막은 다른 때라면 모르겠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바라보니 그레이브스에게 어떤 기묘한 불안감을 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조금 침착해진 조던에게 얻어맞고 저 멀리에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불안감.

조던 역시 어떤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상황을 돌아보면 그레이브스 이 작자가 한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변칙예술가로 여론이 몰린 이 상황에, 풍선을 사용한다는 그 사소한 특징 하나로 범인을 특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범인을 봤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목격자를 보는 것이 답이 충분히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논점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볼 수 있는가였다. 심문은 의료부에서 한다 하였으나 보안부와 윤리위원회의 입김이 충분히 들어갔을터, 일개 프로젝트원이 함부로 심문해도 될 일일까?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쉰 뒤,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흘끗흘끗 쳐다보고 있는 그레이브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어, 어어. 왜. 빨리 말해, 노려보지 말고. 그게 좀 거슬리거든, 응? 내가 무섭다는 건 아니고, 뭐 그렇다 이거지."

그러나 생각을 정리한 듯한 박사는 전혀 눈빛을 거두지 않고 그레이브스에게 말했다.

"만날 수 있기나 한거야?"

"그건 무슨 소린가."

"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데, 우리 같은 이들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객체인가 이 말이야. 게다가 준범죄자 취급일건데."

"준범죄자?"

"어찌 되었건 사르킥교의 일원의 가족 아닌가."

그레이브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자네가 말한대로 지금은 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데다, 어린애라 준범죄자까진 아니야. 우리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객체냐…"

그는 극적 효과를 내려는 듯 잠시 빙긋 웃고는 말했다.

"내가 이런 일에 정통한 인간을 하나 알지."


할 조던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눈을 문지르고는 다시 찌푸렸다. 그러나 상황은 눈을 부비적댄다고 뚜렷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상의 경계로 훌쩍 도망쳐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발을 내딛은 이 방 자체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러하기 때문인 듯도 싶었다. 조던은 여전히 몽롱한 정신 상태임을 느끼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조금 어두운 실내는 여러 컴퓨터가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슬그머니 흘러나오는 배경음이 기묘한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여느 연구실이나 회의실, 과실과는 다르게 조금 작아, 탕비실의 느낌마저도 날 지경이었다. 이래저래 밀도 높은 방이군, 하고 조던 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정보국 변칙 정보 수집과실."

"탕비실이 아니고?"

"원랜 탕비실이었지. 프로젝트나 이것 저것 일이 많아서 최근에 개조했다던데."

그러니까 탕비실이 맞긴 하군. 조던은 입을 달싹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온 것까진 좋은데, 이런데에 도울 사람이 있다니. 여전히 그레이브스의 인맥은 영 탐탁치가 않았다. 행여 요주의 인물이라도 되면 어떠하겠는가? 박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일은 정말이지 원하지 않았다. 불쾌함을 이제 와서 더 늘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할 조던은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존재에 대해선 어떠한 방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박사는 그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망막에 삼각형 모양의 어떤 회색 존재가 들어왔다. 그 회색 피라미드가 어떤 기묘한 운동 반응을 보이자, 조던은 여태껏 느껴왔던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미지의 존재, 그러니까, 맘에도 들지 않는 이곳에 나타난 인간인지 귀신인지 변칙 존재인지 모를 어떠한 것은 몽롱해진 그의 판단력에 있어 단순한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더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가운에서 권총을 꺼내 그것에게 들이밀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이유 모를 폭소를 내뱉고 있던 그레이브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쫙 사라지고, 회색 피라미드가 몸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하는 짓거리야 이 새끼야!"

할 조던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시야가 그제야 뚜렷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조금씩 고개를 돌려 그레이브스를 보았다. 그가 총구를 잡고 바닥으로 내리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전력한테 총구녕을 겨뉜거야, 이 친구야."

"잠깐… 뭐?"

조던은 숨을 몰아쉬며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던 회색 피라미드 인간을 흘끗 쳐다보았다.

"인사해. 이쪽은 재단 광역 정보국 변칙 정보 수집과 소속 요원 삼각균. 그리고 이 등신은 공학기술지원부 소속 연구원 할 조던 박사. 앞으로 우리 계획을 도와줄거야."

둘은 뻘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서로에게 뻗었다. 뻗긴 뻗었는데, 솔직히 둘의 표정은 서로의 손이 그대로 빗나가면 좋겠다는 듯한 양을 띄고 있었다. 창피함과 공포가 섞인 모습이었다. 할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총은… 미안합니다. 요즘 제정신이 아닌가보군요. 그…건 얼굴이 아니죠?"

"네, 헬멧이죠. 절 간혹 무서워하는 분들은 봤는데, 총은 처음이네요."

이런 젠장. 조던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찡그리며 재차 사과했다.

"괜찮아요. 초면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헨리, 무슨 일로 날 찾아왔습니까? 또 원더테인먼트 장난감 공수해달라고 온 거면 그냥 아마존으로 가시는게 나아요. 거긴 별게 다 있다니까."

조던은 딴청을 피우고 있는 그레이브스를 노려보았다.

"으, 오늘은 그건 아냐.왜 그걸 여기서 말해 이 친구야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 재단 내에 구류되어 있고, 치료받는 중이지. 의료부 소관 아래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부서도 입맛 다실 것같아보여."

"구류라… 성별과 나이대는요? 관련되어 있는 요주의 단체는?"

"여성, 아홉 살짜리 애야. 사르킥과 연관되어 있지. 알겠나?"

"아직 안 찾아봤어요. 내가 안 보고 어떻게 압니까?"

그레이브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번에 격리불가 부장이 우동 먹은 건 어떻게 알았는데…?"

삼각균 요원은 그레이브스를 무시하고 조던에게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찾아서 뭐하실 작정이세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시트라 아크라 프로젝트 관련인지라, 말씀은 소상히 못드릴 것 같지만요."

요원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듯 싶더니, 가까이 놓인 컴퓨터에서 무언가를 두들기며 말했다.

"일단 찾아볼게요. 심문이 가능한가는 확인해볼텐데, 아직은 견적이 안 나와서 모르겠네요. 일단은 두분 하시는 거 하고 계세요. 나오면 이 분 폰으로 전화 드릴테니까." 삼각균은 고개로(정확히는 피라미드의 모서리로) 그레이브스를 가리키고 말을 맺었다.

"그래, 고맙네. 나중에 봄세.요새 새로 나온 신겜 좀 봐줘봐"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요원을 뒤로 하곤 둘은 재빨리 과실을 빠져나왔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