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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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대학교 사학과에는 주목받는 젊은 교수가 있다. 제주 출신에, 민속학이라는 정체된 분야에서 서른일곱이라는 비교적 빠른 나이에 정교수를 달고, 한국 신화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그 교수는 원래라면 3월 새 학기를 맞아 강의 준비에 한창이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이날, 나 김세경 교수는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3월 7일의 일이었다.

내가 정교수 재직 3년 차에 이렇게 고향으로 훌쩍 떠나고 있는 건 당연히 여행이나 휴가 같은 것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 동료들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숨겨진 수수께끼를 발견한 교수가 그것을 파헤치러 모험을 떠나는 건 영화에서 만으로 충분하다"는데,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실제로 그런 종류의 목적을 가지고서 여정을 떠나고 있었다. 물론 허황되고 낭만적인 탐험을 기대한 건 아니다. 나름 학술적인 흥미와 탐구열을 자극하는 단서들이 나를 꼬신 것이다.

이 짧지는 않은 추적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천창희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지금 바로 그 사람을 찾으러 가는 거니까.

"세상 모든 것에는 지켜야 할 순리가 있는 법이니라."
"그 순리가 제 땅, 제 사람에 피바람을 몰고 온대도 말입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니라."
"정녕 부정의가 죽음을 휘두르고 다니는 게 순리라면…"
"…"
"그깟 순리, 전 몇 번이라도 어길 테요."

한치도 굽히지 않는 여신에게, 백발의 천신은 엄히 명했다.

"중세경신 자청비는, 인간의 삶에서 다시 깨달음을 얻도록 하라."


【1】

천창희의 이야기.



"천창희 선생? 당연히 알지. 한국 신화 공부하는 사람 중에 선생 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겠다."
"아뇨, 학장님. 선생님 저작을 아시느냐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좀 아시느냐구요."
"누구시냐고? 으음… 글쎄다. 학위에도 연연치 않고, 학회에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분 아니냐. 아마추어 연구자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개인적인 연락이라곤 통 닿지를 않으니…"

학장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슬쩍 훔치셨다. 그야 맞는 말이었다. 나도 연이 닿는 연구자들은 죄다 헤집어가면서 선생의 행적을 수소문했지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은거 학자시라지만 설마 학장님도 면식이 없으실 줄이야.

"그래서, 김 교수. 그렇게 애타게 찾는 천 선생님을 만나 뵈면 뭘 하려고 그렇게 열심이야?"
"그야 당연한 거죠! 전국의 대학 도서관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시면서 그 정도의 연구 성과라구요. 분명히 뭔가 새로운 정보원이 있는 거라니까요? 문헌이든 취재원이든, 아니 어쩌면 선생님 본인께서 구전본 전승자이실 수도 있죠. 아직 보고되지 않은 거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전 이 분 놓칠 수 없어요. 우리 상황 다 아시잖아요. 선배님들 그렇게 발품을 파시고도 본풀이 몇 개, 구전집 몇 개 말고 우리한테 뭐가 더 있느냐고요. 오죽하면 뭐라도 하나 건져보자고 환단고기니 부도지니 하는 위서들까지 털어가며 오염된 옛 신화소를 찾아 헤매는 판 아닙니까. 천 선생님이 명예욕 없는 분이신 건 이해하지만, 이대로 그분의 지식을 간헐적인 아마추어 논문에만 맡겨두는 건 학계의 직무유기에요. 한국 민속학에 있어서 범죄나 다름없다고요."

나는 열변을 토해낸 나머지 기운이 빠진 채 학장실의 손님용 소파에 푹 주저앉아버렸다. 학장님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고 계셨다.

"자네 맘 왜 모르겠나."

학장님이 안경을 다시 쓰시면서 입을 떼셨다.

"하지만 학계를 통틀어도 천창희 선생을 만나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 그야 우리도 많이 노력해 봤지. 개인적으로 선생의 학식을 흠모해서든, 자네처럼 선생이 가진 새로운 소스를 원해서든 많은 사람이 선생을 만나보려고 애를 썼단 말이야. 하지만 선생이 논문이나 기고문을 보낼 때 제주도 쪽에서 우편으로 보낸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다네."
"제주도요?"
"김 교수 자네, 혹시라도 연차 쓰고 제주도 가서 선생 찾겠다는 말이들랑 하지도 말어. 몇 명이나 헛걸음한 일이야. 제주도라고 해도 발송지 주소도 없는데 그 넓은 곳에서 무슨 수로 찾겠나? 응? 그리고 이렇게까지 노출을 꺼리는 분인데, 만에 하나 제대로 찾아가더라도 '천창희 선생님 맞으십니까,' 하면 '예 그렇습니다' 하시겠냐고. 무슨 말인지 알잖아?"
"그래도…"

나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학술지에 게재된 새 논문 보고 자극받은 거 나도 알아, 김 교수. 그래도 다음 달이면 개강인데 마음 잡아야지."
"네… 그래야죠."
"곧 수강신청도 열릴 테니까, 새 학기 강의 준비에 집중해요. 이번엔 전공 강의도 하나 더 있잖아. 김 교수가 흔들리면 학생들은 누굴 믿겠어. 안 그래?"
"…알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봐요. 학기 진행에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하시고."
"네. 좋은 주말 되세요."

나는 힘없이 인사를 드리고 학장실을 나섰다. 대충 예상한 결말이지만 역시 맥이 빠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껏 제주도라는 새로운 단서를 얻었는데, 그걸 좇는 것은 나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다. 학장실 문 앞을 몇 걸음이나 서성이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면서, 나는 그제야 내게 주어진 지금의 역할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교수 태를 갓 벗어가는 서른아홉, 원하는 대로 모험을 떠나기에 나는 내 생각보다 너무 나이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여정이라면 더더욱.

우석관 2층 한구석에 있는 내 교수연구실은 아침에 박차고 나온 그 모습 그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이 방을 처음 배정받고 감동에 벅차올랐던 과거의 나는 이제 내 안에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권태감이 그 감정을 지워내고 있었고, 당장에라도 제주도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그 자리를 대신해가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은 내 마음의 화학 반응을 거꾸로 돌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온갖 문헌 자료와 서적, 연구 공책들로 가득한 책상에 손을 뻗었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하다 보면 마음도 추슬러지게 마련 아니던가. 나는 위태롭게 기운 채 쌓여있는 구전신화 해설서와 취재 자료 파일들을 차례로 집어 책장에 꽂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천지왕본풀이 주해, 다음엔 참고용 중국 신화 자료, 그리고 미륵 신앙 분석 논문. 한 권 한 권 제자리를 찾아갈수록 작년의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윤곽이 그려졌다. 한국 신화의 핵심 줄기를 되살리겠다고 머리를 쥐어 싸매던 나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마고 할망."

내 손엔 천창희 선생의 대표 저작인 『마고 설화 복원 도상의 부도지 비판』이 쥐여 있었다.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자라며, 할머니가 해주신 오래된 이야기들을 기억하던 나를 민속학의 길로 이끈 이 소논문은 여전히 내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놓아 왔던 것이고, 오늘 아침에도 이 글을 읽다가 방을 뛰쳐나가 그대로 학장실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책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두었다. 세상이 내게 바라는 것처럼.

난 그대로 회전의자에 털썩 몸을 날렸다. 어깨에서부터 힘이 쭉 빠지며 무너져내리는 몸뚱이가 녹듯이 의자와 하나가 되는 걸 느꼈다.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싶다는 달콤한 유혹이 날 등 뒤에서 끌어안는 것 같았다.

"안 돼—. 세경아, 이 타이밍에 낮잠은 곤란하다… 끙."

멋대로 닥쳐오는 졸음, 아니 무력감을 기지개로 밀어내며 나는 자세를 곧추세웠다. 창문을 여는 것은 도움이 안 될 성 싶었다. 오늘도 예외 없이 창밖 풍경을 메운 박무는 도리어 없던 졸음병까지 붙여줄 게 뻔했다. 우선 손에 소일거리를 쥐여주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의자를 책상 옆으로 당기고 손에 닿는 서랍을 아무거나 하나 골라 열었다. 그러자 대충 주워섬겨둔 뜯지도 않은 우편물들이 잔뜩 튀어나왔다. 겨우내 우편함에 쌓인 걸 아침에 꺼내서 서랍에 처박아 뒀던 것이다.

막 정리해서 비워둔 책상 위에, 확인한 우편물이 하나씩 쌓여갔다. 세금이나 월세 고지서, 학회 초청장 따위를 빠르게 넘기며 책상에 던지던 내 손길이 쪽빛 촛농으로 봉해져 있는 멋들어진 봉투에서 멈췄다.

"발신, 제주특별자치도 서천 컨트리클럽 천 창 희. …천창희?!"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는 내 주변으로 편지 봉투들이 우수수 흩날렸다. 하지만 내 눈에 나머지 편지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채로 봉투를 치켜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석구석의 글자 하나하나까지 살펴보았다. 돌하르방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우표에는 서귀포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고, 반송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부실한 발신자 주소도 들은 대로였다. 묘한 상호명이 추가로 적혀 있었지만 그걸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수신인 기입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봤지만, 역시 내 연구실 우편 주소와 내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쓰여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사무용 커터칼을 찾아서 봉투 끝을 찢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자 그 안에는 단정하게 접힌 편지지와 빳빳한 색지가 한 장씩, 그리고 예스러운 놋쇠 조형물이 들어 있었다. 종이들을 꺼내 쥐는 내 손에는 땀이 절로 맺히고 있었다. 나는 편지 쪽을 먼저 펼쳐 보았다.



친애하는 김세경 교수님께.

갑작스럽게 보내는 서신이 모쪼록 교수님을 놀라게 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교수님과 같은 분야에서 조촐하게 배움을 찾고 있는 천창희라고 합니다. 교수님의 연구와 저술은 항상 빼놓지 않고 읽고 있습니다. 새롭고 파격적이면서도 개연성과 타당성을 견지하는 교수님의 학설을 접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예전부터 김세경 교수님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일터를 비울 수 없어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아쉬움만 달래왔습니다. 그러던 끝에 더이상 미루다 보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 이렇게 용기를 내서 초대장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 쪽에서 찾아뵈어야 할 일인데, 이렇게 결례를 범하는 것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다가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서천에도 곧 봄꽃이 만개하겠지요. 동백꽃이 물러나는 자리를 진달래 분홍빛이 물들일 무렵에 교수님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바쁘실 줄 알지만 부디 한 번 방문해주시길 이렇게 청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서천에서 존경을 담아, 천 창 희 


붙임. 초대장과 열쇠를 동봉하여 보냅니다. 오시는 길은 초대장에 있으나, 상세한 주소를 적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약간의 수수께끼를 곁들여 보았습니다. 무례인 줄은 알지만, 한편으론 저희 방식이 교수님 마음에 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느긋하게라도 좋으니 꼭 방문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이……이이이얏호!"

편지를 다 읽을 때쯤 나는 겨우 진정시켰던 두 손이 환희와 흥분으로 다시 달아올라서 요동치는 것을 두 팔과 두 눈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맙소사, 천창희 선생이 나를 초대하시다니! 그것도 내 연구를 눈여겨보고 계셨다니! 나는 너무 신나서 거의 천장에 닿을 기세로 펄쩍펄쩍 뛰면서 쾌재를 불렀다.

나는 그대로 기세 좋게 봉투에 들어 있던 두 번째 종이를 꺼내 펼쳐 들었고, 곧이어 내 흥분 어린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게 대체 뭐야?"

녹색 종이에 연둣빛 도화지를 덧붙이고 테두리를 장식한 고급스러운 초대장에는 주소나 약도 따윈 손톱만큼도 담겨있지 않았다. 거기엔 민속학적 은유로 가득한 3연 9행짜리 시 한 편만이 덜렁 쓰여있었다. 나는 손아귀에 쥔 애꿎은 (아마도 열쇠라 지칭된 그 물건으로 추정되는) 놋쇠 조각만 떼굴떼굴 굴려가며 십 분인가, 그 이상인가, 멍하니 서서 그 시를 읽고 있었다.

이건 나를 놀리려는 걸까? 신종 사기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천 선생 이외의 사람이 보냈다기엔 발신자 주소의 특징이 너무 명확했다. 학계의 그 누구도 추적하지 못했던 천 선생의 은신처를 감히 누가 위조하겠으며, 그것도 나 같은 일개 신임교수에게 선생을 사칭하며 그러할 이유는 또 뭐가 있겠는가.

이건 시험이자 도전이다. 편지에서 수수께끼라고 한 만큼, 풀 수 있는 비밀들이 이 시구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천 선생이라면 분명 내가 이 관문을 깔끔하게 해결해내서 자신을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은 없었다. 나는 책상 한구석의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들고 내용을 휘갈겨 쓴 뒤, 그대로 학장실까지 직행했다.

문을 벌컥 걷어차듯이 열고 들어가자 갓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한숨 돌리고 있던 학장님이 화들짝 놀라 잔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으셨다. 잘못 들이켠 커피 탓에 한참을 또 콜록대다 겨우 진정한 학장님이 사레들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연차 안 받아줄 거라고 했잖나?"
"연차 아닙니다. 휴직계입니다."

그렇게 내 일생일대의 미친 짓이 시작됐다.

"출발했다는 모양이야, 언니."
"그래? 생각보다 결단이 빠르구나."
"걔 성질머리 생각하면 여태 안 뛰쳐나온 게 용한 거지.

그 말에 쪽찐 머리의 여신이 쿡쿡 웃었다.

"그 말도 맞다. 잘 찾아오고 있다니?"
"글쎄, 일단 오름이란 오름은 다 뒤져볼 모양인가 봐."
"정 못 찾거든 네가 가서 도와주렴."
"걱정 붙들어 매셔."


【2】

명승희의 이야기, 하나.



다시 시점을 돌려와서 3월 7일, 나는 제주공항을 벗어나 서귀포 교외에 잡아둔 숙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넓디넓은 제주도를 본격적으로 뒤지고 다니기 위해 렌트해둔 경차가 포로롱 소리를 내며 516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는 우체국 소인만 믿고 일단 서귀포 방향으로 잡아놨지만 어느 하나 확신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제주도 내 사업자 등록정보를 조회해서 '서천 컨트리클럽'이란 사업체는 찾아냈지만, 주소지는 엉뚱한 오피스텔에 차려둔 텅 빈 사무실로 되어 있었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짜고짜 떠나온 것까진 좋았어도 이제 갈 곳이 막막했다. 비성수기 제주의 간선도로는 뻥뻥 뚫리다 못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몇 시간 후 나는 캡슐 호텔의 작은 방에서 슬링백과 트렁크를 한쪽에 팽개쳐둔 채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시즌이 시즌이다 보니 어느 숙소를 잡아도 부담은 없었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수수께끼 풀이가 진척되는 걸 따라 옮겨 다니기 좋은 임시 근거지였으므로 일부러 이런 곳으로 고른 것이었다.

하지만 단서라도 좀 있어야 쫓아서 움직이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가진 거라곤 아직 용도도 알 수 없는 놋쇠 조각을 제외하면 이 초대장 한 장뿐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도 학계에서 오직 나만 아는 대단한 단서이긴 하나, 막막한 것은 막막한 것이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대로 뻗어 누운 채로 품에서 색지를 꺼내 다시 읽었다.


서천에서 보내는 초대장


면류관과 왕홀을 잠시 내려두고
편안한 휴식과 만남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그대를 초대합니다.

셋할망네 세 오름 한가운데에 서면
흰 산 꼭대기 고개를 내민 석제의 따스한 눈길이
그대 등 뒤에서 옛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아우 왕과 형님 왕의 두 세상 사이에 화폭을 펼친
극락의 꽃밭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연은 별 의미 없는 미사여구로 보였다. 동서양에서 각각 제위와 왕권, 그 권력과 책임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나열한 건 직업인의 부담을 가리키는 것일 테니, 예비 고객에게 휴가를 권하는 컨트리클럽의 홍보 문구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소를 가리키는 단서는 아니다. 패스.

세 번째 연은 분명히 서천꽃밭을 의미하는 은유가 확실했다. 소별왕의 이승, 대별왕의 저승. 서천서역국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전승마다 서천꽃밭의 구체적인 묘사나 역할은 조금씩 다른데, 단순히 이채로운 저세상 꽃들을 키우는 정원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승을 떠난 영혼이 정화되어 저승으로 떠나는 관문으로 묘사하는 설화도 많다. 그러나 이 역시 상호에서 따온 시구일 뿐, 제주도 상의 어느 위치를 나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패스.

"결국 '오시는 길'은 둘째 연에 있다는 얘기인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세 행의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이 종이 위에 단 둘밖에 없는 지리적 표현 중 '흰 산'은 한라산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제주도에서 아무 설명 없이 산이라 하면 한라산뿐이고, 그 밖의 봉우리들은 전부 오름이라고 부르니 말이다. 굳이 눈 덮인 한라산으로 묘사한 건 설마 겨울에만 입장이 가능하단 걸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컨트리클럽은 웬만해선 사계절 내내 영업하고 대목을 꼽자면 오히려 봄여름이 보통이다. 그냥 어감이 좋은 시어를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에 아직 눈이 덮여있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석제는 아우왕, 형님왕보다도 직접적인 언급이다. 한국 신화는 문헌화되지 못하고 민간에서 구전되는 동안 불교 등의 외래 종교와 상당히 결합했고, 적지 않은 설화가 이들의 신격들을 끌어들여 고유의 신격을 대체한 채로 살아남은 데다, 그나마도 독립된 신격체가 훼손되고 뭉뚱그려진 개념으로 변천한 경우가 많다. 그런 연유로 제석천, 옥황상제, 환인, 천지왕 등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 이 신은, 한국 신화의 문명신 중 최고위 신격인 한민족의 천신을 가리킨다. 하늘님의 따스한 눈길이라고 하면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양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천문요소, 태양뿐이다.

즉, 내가 찾고 있는 목적지는 '셋할망네 세 오름 한가운데'에 섰을 때 한라산 위에 뜬 태양과 내 위치를 잇는 직선 상에서 그림자 방향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문제는 '셋할망네 세 오름'이 대체 뭔지 감이 하나도 안 잡힌다는 것이다. 제주 사투리를 섞어놓은 이 문장은 표준어로 옮기면 '둘째 할머니의 오름 세 개'가 된다. 제주어 '셋'은 형제가 세 명 이상일 때 그 둘째를 일컫는 표현이므로, 이 문장이 가리키는 장소를 찾으려면 여기서 말하는 세 자매(또는 그 이상)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출발하기 전 거의 한 달 내내 제주도 오름마다 얽혀있는 설화, 인물, 역사적 사건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늙은 여성이 셋 이상 연관된 오름은 세 개는커녕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제주도에 널린 게 오름이고 할머님들인데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무작정 여기까지 온 것도 자료 조사만으론 도저히 이 문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트렁크를 열었다. 제주도 368개 오름에 대한 조사 자료 수천 장이 뭉텅이로 쏟아졌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서류 뭉치마다 색인을 달아놓았고, 그중에서도 그나마 유력한 후보군을 추려둔 묶음에는 붉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삼형제오름, 산방산, 성산일출봉… 까짓거 368개가 대수냐. 민속학은 원래 두 발로 하는 학문이다. 나는 첫 번째 서류철을 집어 들어 침대에 펼쳐두고 답사 일정을 가다듬었다.




그 이후로 몇 주 동안은 강행군이었다. 오름들을 직접 방문하고, 오름 곳곳을 뒤지고, 인근의 인문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주민들을 취재하고, 심지어는 근처의 야생 동물 서식지 분포까지 파악해가며 서류 뭉치를 두 배 세 배로 늘려갔다. 거문오름, 물찻오름, 민오름…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올려뒀던 바굼지오름의 자료 문서마저도 열 장 넘게 축적해갈 무렵에는 내가 민속학자인지 오름 학자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3월 28일, 그날은 송당리 당오름을 오르던 날이었다. 멀리 한라산 꼭대기에는 아직 희끗하게 눈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초목과 바람에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백주또, 백주할망 등으로 불리는 향토신의 본풀이가 남아있는 곳으로, 여러 명은 아니지만 늙은 여성 인물이 직접 얽혀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가치가 있었다.

본향당으로 다가가자 서늘한 팽나무 그늘이 나를 먼저 반겼다. 가지마다 내걸린 종이돈과 알록달록한 색동 천들이 신목의 영험한 기운을 대변해 주려는 듯 나부끼고, 그 앞에 서 있는 백주또상과 소로소천국상은 언제나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오름을 무턱대고 오르내리느라 지끈대는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소리가 날 정도로 펴주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학위과정 시절에 밥 먹듯이 드나들던 답사지였기에 하나같이 눈에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공간이었다.

나는 백주또 석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운 곳에 다시 온 건 반갑지만 여전히 단서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았다. 이번 제주 탐방에서 몇 번이고 내쉬었던 한숨을 다시 내쉬며 나는 백주또 상에 대고 푸념을 뱉었다.

"에휴… 백주또 할미, 할미가 둘째 할미인가요?에휴… 백주할망, 할망이 셋할망입데강?"
"아냐, 왜 둘째를 여기서 찾니?아니여, 무사 둘차를 이디서 ᄎᆞᆽ으멘?"
"왜 여기서 찾냐니… 어? 으악!"

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물음에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깜짝 놀라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했다.

"누, 누구, 누구 계십니까?"

내가 앞으로 나자빠져서 뒤를 돌아보며 묻자 석상 뒤에서 웬 여자가 깔깔대고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웨이브를 곱게 먹은 갈색 머리카락을 분홍색 셔츠의 어깨에 닿도록 늘어뜨린 여자는, 쓰고 있던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벗고 눈물까지 손으로 훔치며 웃고 있었다. 너무나 친숙하고 소탈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여자에게서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고 느꼈다.

"하하하, 미안,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 오랜만이야?"
"예…? 오랜만이라니…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거기 계신 겁니까?"
"에잉, 격식 차리면 섭섭한데. 됐고, 창희 언니한테 초대장 받았다며?"

나는 또 깜짝 놀란 나머지 이번엔 돌아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떻게 그걸… 저를 아십니까?"
"뭐, 긴말은 지금 필요 없고. 가고 싶은 거지? 서천."
"대체…"
"언제까지 엉덩이 철퍼덕 깔고 앉아 있을 거야?"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곱상한 손을 내게 뻗었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 손을 잡았다. 몸을 일으키고 몸에 묻은 흙먼지를 대강 털어내자, 내 머릿속에서 제일 앞장서 튀어나온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혹감과 호기심이었다.

"서천 CC를 아십니까? 초대장은 어떻게 아셨고요? 아니 그보다 방금 분명 제주말을 하셨는데…"
"헤이, 헤이! 질문은 하나씩! 너무 성급한 거 아냐?"
"아… 죄송합니다. 성함도 아직 안 여쭸네요. 저는 무진대에서…"

내가 자기소개를 하려 하자 여자는 가볍게 내 입을 막았다.

"그런 건 됐어. 창희 언니는 지금 속세에서의 네 위치를 알고 싶은 게 아니니까."
"읍, 속세요? 그게 무슨… 그보다 당신은 누구시죠?"
"으음… 이걸 지금 말해줄 수도 없고 어쩐담."

이름을 밝히길 거절한 이 여성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괸 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품에서 조그만 금속 조각을 꺼내 보였다. 본 기억이 있는 놋쇠 조각이었다.

"지금은 그냥 천창희 선생이 보낸 전령이라는 것만 알아줘. 이렇게 생긴 증표는 전에 본 적 있지?"
"증표… 천 선생님의 편지에 들어있던 것과 같은 거네요."
"그래. 우리는 네가 서천에 들일 수 있는 자인지 검증하길 원하고 있어. 그 자격은 돈으로 구하는 것도, 지위로 구하는 것도 아니야. 네가 살아온 삶과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만 구할 수 있지."
"하…?"
"어이없고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정을 다 알려줄 수 없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우리 교수님이 헤매고 있는 부분에 힌트를 줄게."

여자는 선글라스를 다시 멋들어지게 걸치며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여기까진 잘 왔어. 그대로 신화 세계로 시선을 돌려. 그렇다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진 말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순리대로 증표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우리가 서로 이름을 알게 될 때 말이야."
"이름을 밝힐 때…? 잠깐만요, 당신은 대체…!"
"가야 할 오름에 도착하면 증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럼 행운을 빌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팽나무 뒤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팽나무 뒤로 쏜살같이 달려갔지만 그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은은히 남은 쌀 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히며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알려줄 뿐이었다.




본향당 기와지붕 아래에 앉아 나는 혼란스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 행선지와 초대장을 알고 있고, 증표까지 보인 것을 생각하면 분명 천 선생의 관계자인 것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질 않나, 내게 힌트를 주러 왔다는 것 말고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 삶을, 내 깨달음을 확인하고 싶다니. 그게 대체 민속학자끼리 얼굴 한 번 보자는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부푼 가슴을 안고 제주로 돌아온 이유가 뭐였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해답이 보인 것이다. 신화 세계로 눈을 돌리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 말을 들으니 당장 내가 향해야 할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것 같았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포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방금 그 여자 말마따나 이런저런 의문은 가다 보면 풀어질지도 모른다. 일이 진척을 보이는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천 선생은 만나보고 돌아가야겠다 싶은 오기가 들썩들썩 솥뚜껑을 밀어내는 증기처럼 나를 떠밀었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오름을 내려가며 나는 이미 휴대전화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있었다. 가볍지만은 않은 걸음걸이에는 기대감과 의구심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어, 승희야. 웬일이니, 이 시간에?"

"지금? 가고 있다고?"

"알았어. 내가 갈게. 후후… 기대되네."

"외출하십니까?"
"그래, 만날 사람이 있어서."
"차를 준비하죠.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성산리. 서둘러 줄 수 있겠나?"


【3】

설문희의 이야기.



경차는 서성일로를 빠져나가 일출로를 타고 달렸다. 내 조급한 마음을 담은 차가 덜컹대며 속도를 내자, 뙤약볕과 파도 소리로 버무려놓은 흰 구름이 차창 밖으로 뭉게뭉게 스쳐 지나갔다. 구름은 마치 저 웅대한 성산일출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일출봉은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도망갈 일 없다 말하는 듯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내 마음은 의문과 의심으로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여기를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오늘 송당에서 처음 만난 그 여자의 말만 믿고 저지른 결단이었으니까.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여자의 언동이나 놋쇠조각을 고려하면 서천의 천창희 선생과 관련된 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방금 그 여자가 준 힌트, "신화에 시선을 두되 단순히 생각하라"는 조언을 따르자면 떠올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설문대할망…"

조용히 읇조리며 사이드를 밟고 시동을 끈 나의 시선은 차에서 내리는 동안 계속 일출봉에 꽂혀 있었다. 외따로이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그 아름다운 분화구는 오늘도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의 광채를 마주 안으며 또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남의 속은 답답해서 타들어 가는데 참 속없이도 예쁘다, 내 솔직한 감상은 그랬다.




성산일출봉 등반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을 자랑하는 유명 관광지답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중턱에 서 있는 등경돌을 지나 본격적으로 등반로를 오르면서 내 추론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신화 세계에 해답이 있다면 '할망'은 진짜 노인을 가리킨다기보단 여성 신격을 부르는 존칭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제주에는 전해오는 여성 신도 많고 설화도 많고 오름도 많지만, 오름에 얽힌 설화를 셋 이상 가진 여성 신을 찾자면, 내가 아는 한 그런 신은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제주도의 창세신이자 대표적인 거인 신인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한라산을 쌓았고 그때 흘린 흙더미들은 오름이 되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몇몇 오름에는 자신이 직접 연관된 설화들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둘째라는 이해못할 단서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보자면 수수께끼의 문장이 가리키는 대상으로는 가장 유력한 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는 많고 많은 오름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하는가? 내 첫 번째 해답이 바로 성산일출봉이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의 풍광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히는 명소이나 그 성격이 오름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갈린다. 오름을 지질학적으로 제주 도내의 단성화산이라 정의하면 일출봉은 오름이 아니다. 하지만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도의 모든 언덕배기를 오름이라 보는 견해에선 일출봉 역시 오름으로 볼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거대한 설문대할망이 한라산 능선에 걸터앉은 채 일출봉 분화구를 빨래바구니로 삼아서 자기 옷가지를 빨았다고도 하고, 일출봉에 주저앉아 길쌈을 했다고도 하는데, 이 독특한 지형이 옛 제주 사람들에게도 특기할 만한 명소였다는 의미이리라.

나는 분화구 둘레의 탐방로에 올라 제법 널찍하게 펼쳐진 억새밭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파릇파릇한 봄 억새지만 불타듯 번져가는 노을의 빛을 만나니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관광객들은 분화구에 직접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가끔은 너무 잘 관리되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는데, 특히 학교나 기관의 지원이 없을 땐 더욱 그렇다.

"하… 말이 쉽지, 이 거대한 바윗덩이를 어느 세월에 다 뒤져야 하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 마신 생수병을 슬링백에 집어넣었다. 분화구 안쪽은 정 단서가 안 보이면 도청에 출입 허가를 신청해서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오늘은 우선 당장 살필 수 있는 곳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노을로 창공을 물들이던 태양은 이제 한라산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여운처럼 남은 빛까지 물러서고 나면 이제 밤이 찾아올 터였다. 일출봉 둘레에서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고, 탐사는 꼼짝없이 내일로 미뤄질 마당이었다. 혹시나 일출봉으로 찾아온 내 추리가 아예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실망감에 내 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와…"

우뚝 서 있는 등경돌 꼭대기에서 무언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깜깜해져 가는 하늘 한가운데를 가르듯 솟구쳐오른 광채는 산산이 흩어지며 빛의 비가 되었다. 나는 잠깐 넋을 놓고 그 아름다운 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놀랍고 눈부신 광경을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야 눈치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을 하고 주변을 살피자 사람들은 끝나가는 개방 시간을 맞추려고 제각기 하산길을 서두를 뿐, 등경돌에는 누구 하나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뭐라 추론하기도 전에 등경돌의 빛은 내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훌쩍 떠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분명 무언가의 단서나 인도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빛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손전등으로 어둠을 헤치며 해안으로 내려가자, 동굴 하나에서 내가 찾던 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일제시대에 뚫어놓은 해안 진지동굴 중 하나였다. 홀린 듯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방금 보다는 은은해졌지만 여전히 밝게 빛나는 불빛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는 곧 그 불빛을 손 위에 가볍게 띄우고 있는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잘 찾아왔구나."

마치 두루마기처럼 곱게 뻗은 검은 코트가 어울리는 여자였다. 단정한 숏컷, 부리부리한 눈매, 차분한 목소리에서 배어 나오는 위엄이 나를 압도하는 듯했다. 여자가 내게 다가오자 불빛이 흔들리며 동굴 안이 빛으로 일렁였다.

"당신은…"
"네가 찾는 사람에게 인도해줄 사람이다."
"천창희 선생께 말씀이십니까?"
"그래."
"당신의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궁금한 게 많겠지.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게야. 나 역시 당장에라도 예전처럼 허물없이 대하고 싶지만, 모든 일에는 지켜야 할 순리가 있는 법이란다."
"예전처럼… 송당리에서 만난 여자도 마치 구면이라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저를 아십니까?"
"잘 알고말고."
"그렇다면 대체 언제…"
"말했지?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여자는 흡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수긍이 빠르구나."
"그편이 근원에 다가가는 빠른 길일 테니까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왜 저렇게 말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네가 볼 것은 과거의 모습이다. 지금의 네가 있기까지, 무엇이 너를 만들고 지탱해왔는지… 순리가 어떻게 네 삶에 깃들어있는지 네 두 눈으로 돌아보고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뒤 주먹을 쥐었다. 증표가 발하는 빛이 잠시 사그라들었다. 여자가 잔잔하게 부는 휘파람 소리에 맞춰 다시 은은하게 맴돌기 시작한 빛은, 무언가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의 모습이었다.

"저…로군요."

나는 얼이 빠진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나는 곧 다시 빛의 소용돌이로 화하여 맥동하더니, 둘로 나누어져 새로운 형상을 갖추었다. 어딘가 익숙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던 나는, 그들이 영정사진에서나 보았던 내 부모님이라는 걸 깨달았다. 암 투병 중 날 낳으신 어머니와, 군사정권에 맞서셨던 아버지는, 모두 내가 한참 어릴 때 돌아가셨기에 금방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빛이 갓 요동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더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기절초풍하며 살짝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검은 코트의 여자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빛이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어머니는 수척한 얼굴로 힘겹게 웃으며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곁에서 손을 잡은 채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매고 있던 그때, 빛의 형상은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기억엔 없는 오래전의 모습을 재생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건강하대. 안심해."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잘 남아있지 않은, 거의 처음 듣는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당신… 괜히 나 때문에 걱정만 시켜서."
"무슨 소리야. 그런 생각 할 시간에 빨리 회복해서 세경이 안아봐야지."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난 힘들 것 같아요. 이미 폐까지 전이돼서 더 손 쓸 수가 없다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말고… 당신 없이 우리는 어떻게 살아."
"여보… 한가지 약속해줄 수 있어요?"
"응, 뭐든 말만 해."
"내가 계속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나가던 길 멈추지 말고 계속 가 줘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안 좋은 생각 하지 말라니깐, 여보…"
"세경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생각해서라도, 더더욱 포기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 부탁하는 거에요."
"하지만, 그러면 당신이랑 우리 세경이는 불쌍해서 어떡해…"
"…오전에 어머님이 왔다 가셨어요."
"어머니가?"
"아기는 당신께서 잘 키우실 테니, 저도 여보도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여보…"
"어머님 덕분에 저는 안심하고 있어요. 당신도… 약속해줘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의 표정은 도리어 평안해져 가고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결연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럴게. 약속할게."
"꼭 지켜야 해요."
"응. 아무 걱정하지 마. 당신을 위해서라도 금방 이기고 돌아올게… 세경이랑 같이 건강하게 기다려 줘."

어머니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하셨다.

다음 순간, 빛은 다시 흐트러져 파도가 되어 높이 솟구쳤다. 빛의 물보라가 잦아들자 그 안에서 빛은 내가 잘 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살포시 굽은 등, 하얗게 센 머리카락, 이마와 볼에 자글자글한 주름, 펑퍼짐한 옷가지까지 모두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나의 할머니였다. 그의 곁에는 어린 내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 울 아빠 몇 밤 기다리면 온다면서 왜 깜깜무소식이에요?할망, 울아방 멧밤 지들리믄 온담서 무사 캄캄이멘?"
"니 아버지는 좋은 일 하러 갔으니까 세경이 너도 착하게 있어야 한다 하지 않았니?늬 아방은 좋은 일 ᄒᆞ러 갔으난 세경이 늬도 착허게 잇어사 ᄒᆞᆫ다 안언가?"
"치, 할머니는 맨날 그 말밖에 몰라.치, 할망은 매날 그말베끠 몰라."

어린 나는 금세 삐져서 홱 돌아앉았다. 할머니는 손질하시던 물적삼을 내려놓으시고는 내게 이불을 둘러주며 이야기의 주제를 슬쩍 돌리셨다.

"그러면 우리 세경이가 제일 좋아하는 옛날이야기나 들을까?게믄 우리 세경이가 젤로 좋아ᄒᆞ는 엿날이야기나 들어볼로고?"

할머니는 내가 미운 짓을 할 때면 항상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짐짓 토라진 체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이렇게 나오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응, 들려줘요.응응, 들려줍서."

내가 고사리손으로 이불을 꼭 쥐며 할머니에게 앵겨붙자 할머니는 허허 웃으시며 구연을 시작하셨다.

"옛날 옛적, 김진국 대감님댁 따님이 살았어요. 대감님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 치성을 드렸는데 딸이 태어났으니, 자청하여 나온 아이라 하여 아기 이름을 자청비라 했어요. 자청비는 무럭무럭 자라서 고운 처녀가 되었어요. 어느 날 자청비가 주청강 연못에서 빨래를 하다 보니, 글공부 하러 내려온 문곡성의 아드님 문도령이랑 눈이 마주쳐서 첫눈에 반해버렸어요…엿날 엿적, 짐진국 대감님네 ᄄᆞᆯ님이 살엇주. 대감님이 아덜님 보네달라 치성을 드리는디 ᄄᆞᆯ님이 났으니, 자청하연 나아시메 아기씨 일름을 자청비라 했수다. 자청비는 모락모락 자라서 고운 처녀가 뒈었수다. 어느 날 자청비가 주청강연못디 연서답을 ᄒᆞ다 보난, 글공부 ᄂᆞ려온 문곡성네 아덜님 문도령이랑 눈이 마주치연 첫눈에 반해부런수다…"

할머니는 문도령이 하늘의 부름을 받아 떠나간 이야기, 자청비가 재회할 약조로써 문도령에게 복숭아씨와 얼레빗을 받은 이야기, 문도령이 오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리다가 노비 정수남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야기하셨다. 할머니가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조급한 기다림을 달래보려는 것을, 어린 나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옛날이야기가 좋아서 싱글벙글이었다.

나는 눈앞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4·3 때 남편을 여의신 후 홀몸으로 아버지를 키우시고, 또 아들 내외를 잃으신 후 홀몸으로 나를 키우신 우리 할머니는 참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생각했던 내 마지막 가족을 갑자기 마주하는 일은 내게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운 할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질지 말지, 나는 떨리는 팔을 차마 다 뻗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조심조심 앞으로 내민 손이 살며시 당신의 뺨에 닿자 할머니는 내 손길을 느끼셨다 대답하시기라도 하듯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린 나의 모습은 그 찰나의 교감을 뒤로하고 다시 산산이 흩어져서 광채의 일부로 돌아갔다.

다시 은은한 조명으로 밝아진 동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환상을 거두어들인 검은 코트의 여자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이미 말했듯이, 너는 너의 인생에 아로새겨진 순리를 진정으로 마주하기 위한 여정을 거치고 있다… 네가 해야 할 것이라면 여기서 멈추지 말고 그저 전진하는 것뿐이겠지. 서천을 향해서 말이다."
"서천으로…"
"…너를 사랑했던 그들도, 네가 계속 나아가길 바라고 있을 게야."

여자는 단호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북돋았다.

"네가 찾아온 여신이 죽음을 체험한 곳을 찾아가라. 두 번째 안내자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코트의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빛을 든 손을 내게 뻗어 눈에 익은 놋쇠 조각을 건네주었다. 곧이어 조각은 눈부신 광채를 내뿜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자는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이제 더이상 빛을 내지 않는 놋쇠 조각만이 얌전히 내 손에 놓여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여운에 잠겨 있었다. 지난번에 분홍 셔츠의 여자를 만났을 때도 신비한 감각을 느꼈지만, 그때보다도 더 강렬한 경험이었다. 차가운 밤바다의 바람이 동굴 입구에서 조용히 그르렁대기 시작하고서야 나는 놋쇠조각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동굴을 떠났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더이상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차분한 걸음걸이에 맞추어 검은 코트가 나직이 흔들렸다.

"지인분은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그래. 묵인해줘서 고맙네."
"이사관님이 찾으십니다."
"직접 받지."

여자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03K기지 상임고문 설세명입니다. 말씀하시죠."


【4】

안매화의 이야기.



새벽 일찍 체크아웃하고 나온 짐을 실은 채 한라산 국립공원에 도착한 경차는 비자림로 끄트머리에서 516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꺾었다. 이 분기에서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물장울교 앞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물장오리오름 탐방로 입구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고 신성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오름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물장오리오름을 고를 것이다. 현재까지도 정확한 수심이 측정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깊은 화구호의 물은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고 전해지며, 그런 만큼 이곳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가뭄이 닥쳤을 때 심신을 정갈히 하고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과 람사르 국제보호습지로 지정될 만큼 독특한 환경과 건강한 생태계를 가진 이 오름은 그러나 관광지로서 그렇게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환경부 허가 없이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껏 도착해놓고도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한숨만 쉬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자… 이제 저기를 어떻게 들어간담…?"

물장오리오름은 접근하는 탐방로조차 따로 건설하지 않았을 만큼 보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자연유산이다. 예전에 탐사하러 왔을 땐 당연히 환경부에 미리 협조를 구해 안내인과 함께 들어갔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달려와 버린 지금은 이대로 들어갔다간 습지보전법 위반 현행범이 될 판이었다.

어젯밤 검은 코트 차림의 여자에게 들은 힌트, 설문대할망이 죽은 곳이라면 꼽을 수 있는 후보가 둘로 압축된다. 하나는 오백 명의 아들을 키우다 사고로 솥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오백나한인데, 전승에 따라 그 주인공이 설문대할망이라 하는 본도 있고 무명의 아낙이라 하는 본도 있어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곳 물장오리오름은 논란의 여지 없이 설문대할망의 죽음이 설화로 내려오고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출입제한령을 생각하지 못한 건 뼈아픈 실수였다.

그렇게 온갖 궁리를 하며 차에 앉아있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 차창을 똑똑 두들긴 것이다. 나는 살짝 놀란 채로 창문을 내렸다. 오름 입구에 상주하는, 산뜻한 등산복 차림의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분이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김세경 교수님이시죠? 빨리 오셨네요."
"네? 아… 네, 맞는데요."
"바로 올라가실 거죠?"
"네?"

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이 빠진 채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엊그제 탐방 신청하고 오셨잖아요. 안 가실 거에요?"
"어… 그러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엊그제 탐방 신청은커녕 이때 물장오리오름에 오게 될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대체 누가 나 대신 신청을 했을까? 하지만 나는 왠지 이 상황이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나를 제주 곳곳으로 인도하고 있는 그들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이리라, 나는 멋대로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맞습니다. 가시죠!"




물장오리오름으로 가는 길은 말했다시피 포장은커녕 등산로조차 제대로 깔지 않은 숲길이나 다름없었다. 중간중간 나무에 매어놓은 붉은 리본을 표식 삼아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오름 꼭대기의 화구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인솔을 위해 앞장서 걷고 있는 직원은 내 컨디션을 확인하려 계속 말을 걸었다.

"지난번엔 대학에서 단체로 오셨지요?"
"네, 그땐 조교수였는데… 용케 절 기억하시네요."
"그때 늙은 교수님이랑 외국인 교수님이 싸울 때 사이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아하."

나는 사실 이 직원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그때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학장님의 사학과 팀과 리스뷔크 교수님의 생물환경과 팀은 같은 무진대 연구진으로 제주에 왔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으르렁대곤 했는데, 두 분이 제일 열렬하게 맞붙었던 게 바로 여기에서였다.

"한 분은 막, '오름을 도민에게서 떼어놓아 뭘 어쩌자는 거냐'면서 열을 내고, 외국인 교수님은 '호수 다 썩어 없어지는 꼴 보고 싶으면 맘대로 하라'면서 더 열을 내고… 그제껏 봤던 탐사팀 중에서 제일 격렬하게 다퉜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 폐를 끼쳤던 것 같아서 좀 죄송하네요. 자기 주관이 워낙 뚜렷한 분들이셔야 말이죠."
"아뇨 아뇨, 여기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저도 항상 고민하는 주제인걸요. 이런 문화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중요한 사적지를 모두가 알고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관광지로 개발해서 오염되고 파괴되어서도 안 될 일이니까요."
"언제라도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네요."

우린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계속 걸어갔다. 끝이 없는 것 같던 빽빽한 숲 저편에서 고여있는 아침 햇살이 스며 나오듯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줄기 사이로 뻗어 나오는 빛줄기들이 점점 늘어나 마침내 하나가 되자, 눈부시게 햇빛을 머금고 있는 물장오리오름의 화구호가 조용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와…"
"몇 번을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죠."
"정말 그렇네요."

숲 한가운데에 동그랗게 구멍이 난 듯 뻥 뚫린 하늘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호수를 나는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골풀이나 송이고랭이 같은 습지 식물들이 소박하지만 어여쁘게 호수 곳곳을 꾸미고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는 맑은 물과 물풀과 햇빛의 색이 어우러져 더욱 신비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과연 '신이 빠져 죽은 호수'라는 전설이 생겨날 만한 곳이었다. 나는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채로 동행인에게 물었다.

"설문대할망도, 이런 풍광을 마주한 순간엔 감탄을 금치 못했겠죠?"
"분명 그랬겠지요.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마고할미라도, 설문대할망이라도, 삼신할미라도, 바리공주라도… 자청비라도 그랬겠지요."
"네?"
"하여간, 둘째 스승님도 짓궂으시단 말이죠. 굳이 보내도 자기가 한 번 죽었던 곳으로 직접 보내다니."
"무슨 말씀을…"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으려다가, 퍼뜩 깨달았다.

"설마 당신이, 두 번째 안내자인가요?"
"하하하, 오름에 다 오기도 전에 정체를 밝히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그럼 아까 조교 시절 얘기는?"
"당신을 계속 지켜봐 온 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죠."

국립공원 관리인, 아니, 내게 길을 인도하러 온 또 다른 정체불명의 안내자가 품에서 예의 그 놋쇠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가 증표를 살며시 들어올리자, 놋쇠 조각을 휘감은 빛이 수면 위로 날아가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벌였고 그 빛을 받은 모든 수목이 일제히 꽃을 피워냈다. 산딸나무 꽃, 송이고랭이 꽃, 금새우난초 꽃, 그밖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많은 꽃들이 만발하자 호숫가는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대단한 건 자연이죠. 이 모든 풍경은 이 오름 스스로가 가진 아름다움이에요. 전 그저 북돋아 주었을 뿐."
"그것도 순리인가요?"
"피어야 할 계절에 꽃을 피우고, 맺어야 할 계절에 열매를 맺는 것. 온 산의 풀과 나무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죠. 순리라 말하기도 우스울 만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전… 혼란스러워요. 일평생 이 땅의 설화를 쫓아 살아왔지만, 그저 옛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역사를 탐구한 것이지 그게 사실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어제오늘 제게 벌어진 일들은…"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꽃향기와 풍경이 긴장을 풀어주자 어제는 당혹감과 그리움에 밀려 자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은 너무나 놀랍고 경이로운 것들이었지만,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따라가기엔 내게 불안을 주는 것이었다.

"잊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때론 힘들게 마련이죠."

어느새 멋들어진 쪽빛 양복 차림으로 탈바꿈한 사내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께 주어진 시련이 너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벌이라고는 해도, 당신이 성장해온 여정은 분명 고되고 험난한 삶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딛고 이겨내는 걸 보며 저 자신도 깨달음이 부족했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는 것에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고난 그 자체는 누가 의도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도요. 그저 순리에 따라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을 마주하여 의미를 찾아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고난의 뜻이요 인생의 가치가 되는 것… 당신을 보며 다시 배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순리대로 따라가면 알게 된다 말씀하시겠죠?"
"잘 아시네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봄바람이 귀를 간질였고, 곧 오름 곳곳의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당신이 볼 것은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먼 과거의 모습이기도 하죠. 어째서 당신에게 깨달음이 필요한지, 이 여정에서 당신을 이끌고 있는 순리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증표가 다시금 빛을 발하면서 바람이 강해졌다. 꽃잎들은 세찬 회오리바람이 되었다가 몇 개의 인영으로 변하였다. 두루뭉술하게 일렁거리는 실루엣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저마다 다른 누군가를 비추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성난 꽃사람이 노래하듯이 말문을 틔웠다.

"내가 기어코 여쭐 것이 있으니 우리 언니들 답 좀 들읍시다. 큰언니, 언니가 세상을 지을 적에 디딘 땅은 이승의 땅이었소, 저승의 땅이었소? 둘째 언니, 언니가 오름을 높이고 계곡을 낮춘 것은 지상의 도리였소, 천상의 도리였소? 셋째 언니, 언니가 아이를 점지할 적에 그 아이들은 인간의 아이요, 서천의 아이요?"

그러자 나머지 꽃사람들이 합창하여, 이승의 땅이며 지상의 도리이며 인간의 아이라 답했다. 그러자 첫 번째 꽃사람은 의기양양 분기탱천하여 더욱 쏘아붙이며 열변을 토했다.

"신들의 일이 굴러가는 섭리가 이렇듯 인간의 것과 진배없거늘, 어찌 나는 내 땅에 농사짓는 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오? 이 나라 농토가 다 세경신의 권세이거늘, 어찌 나는 고시래를 던지는 저 사람들에게 정당한 응답을 줄 수 없소? 내 비록 신이라 떵떵거리며 산지 수천 년은 지났소만 김진국의 대감댁 딸로 태어난 나의 뿌리는 인간과 같거늘, 어찌 나는 고통받는 내 핏줄이 대오를 갖출 때 함께하지 못하느냔 말이오."

성난 꽃사람의 자기변론에 좌중이 술렁였다. 그러자 곱슬곱슬한 머리를 휘날리는 분홍 꽃사람이 사뿐사뿐 걸어 나와 그녀를 달랬다.

"막내야, 나라고 어찌 내가 아끼고 보듬은 아이들이 험난한 시련을 겪음이 안타깝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가 가꾸고 벼려낸 아이들을 내가 믿지 않으면, 그들이 누구에게 신뢰를 받겠느냐? 내가 택하고 짝지은 아이들을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그 눈길에서 빗겨난 이들은 누구에게 가호를 받겠느냐? 내가 세우고 점찍은 아이들을 내가 간섭하여 이끈다면, 이 풍진세상에서 그들이 홀로 설 힘을 잃을까 나는 두렵구나."

성난 꽃사람은 개의치 않고 논박하였다.

"셋째 언니, 이 서천에 온사방 온천지의 신들을 모셔보고도 여즉 모르시오. 태호 복희는 제 백성이 자신을 돕기만 기다리니 백성의 힘이 닿지 못하였고, 용모 여와는 제 백성에게 힘만 내주고 구원치 않으니 백성이 끝내 멸족을 당하였으며, 우리 또한 접때 우리 백성들이 고난에 빠졌을 때 외면한 대가로 신앙도 백성도 모두 잃을 뻔하였소. 허나 아미타불은 제 이름을 내어 뭇 중생을 구원하니 천하에 불자가 번성했고, 야훼는 제 아들을 내어 뭇 죄인을 대속하니 만방에서 서학의 도를 따랐으며, 염화는 제힘 닿는 데서나마 사람을 지켰으니 스스로에게 떳떳하였지 않소. 나서야 할 때는 나서야만 하외다."

짧은 머리의 거뭇한 꽃사람이 일갈했다.

"막내야, 신에게 어째서 역할이 있다 생각하느냐? 너는 농경의 신이지 투쟁의 신이 아니요, 농토의 신이지 전장의 신이 아니며, 농부의 신이지 민중의 신이 아니다. 네가 지상에 직접 나가 무언가 하려 할 때마다 순리가 어긋나고 이치가 깨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느냐? 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쟁취해야 할 자가 얻지 못하고, 승리해야 할 자가 이기지 못하며, 해탈해야 할 자가 깨닫지 못하니라."

성난 꽃사람은 여전히 한 치도 굽히지 않으며 쏘아붙였다.

"둘째 언니, 나는 천상 말괄량이인지라 순리가 무언지 이치가 무언지 모르오. 그러나 나는 신랑을 좇을 땐 사랑의 신처럼 굴었으며, 꾀를 낼 땐 지혜의 신처럼 굴었고, 천상을 지켜낼 땐 무예의 신처럼 굴었소. 그러니 혹여 나를 규정하려거들랑 부디 내가 이미 지상과 천상과 저승과 서천에 이뤄놓은 업을 살펴주길 바라는 바요. 지금 지상이 혼란한데, 그놈의 순리나 찾고 앉았다가 무익한 목숨들을 잃게 하느니 나는 그깟 명분들 조금 접어놓겠소."

마지막으로 쪽찐 머리에 비녀를 꽂은 꽃사람이 나섰다.

"막내야, 네 말이 백번 옳고도 옳으나 딱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구나. 대별왕이도 지상을 구원한 적이 있으며, 소별왕의 아들왕도 지상에 나라를 세웠고, 하물며 나 또한 바리데기 사희를 도운 적이 있으니 어찌 지상에 손끝조차 대지 말라 하겠느냐. 그러나 신화의 시대는 끝이 났고, 우리가 공공연히 나서는 것을 저들은 두려워한다. 장차 네가 초래할 혼란이야말로 수많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니라. 네가 이미 저지른 업보는 천지왕에게 처분을 물을 것이다. 그리 알고 이 쟁의는 이만 파하라…"

마지막 꽃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손을 번쩍 들자 천둥소리와 함께 꽃잎들이 소용돌이치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산산이 흩어졌다.




다시 시야에 돌아온 쪽빛 양복의 남자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일 터였다. 그러나 어째선지, 내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내가 어디서 이걸 봤지? 나는 어디에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려낼 수 없었지만, 나는 분명히 이 대화를 본 적이 있다. 남자가 슬며시 물었다.

"기억이 나시나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내가 이 여정에서 얻어야 한다고 저들이 말하는 '깨달음'이, 이 대화에 담겨 있으리란 느낌이 강하게 오고 있다는 것뿐. 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 대며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아요."
"지금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이 기억의 파편이 머지않아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따뜻한 놋쇠 조각이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한라산의 적장자를 찾아가세요. 성질 급하신 세 번째 안내자가 벌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가 내 손을 놓자 잦아들었던 세찬 바람이 되살아났고, 꽃잎들도 바람에 몸을 내맡겨 우리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오늘은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스승님, 부디 여정을 무사히 이어가시길!"
"다섯째…?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저기, 기다려요!"
"하하, 제가 무슨 말을 할진 알고 계시죠?"

순리대로, 라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꽃바람이 나와 남자를 휘감았다. 세찬 바람에 떠밀린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길가에 세워둔 내 렌터카로 돌아와 있었다. 손바닥에 얌전히 남아있는 놋쇠 증표만이 방금 내가 겪은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증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계속 망설이려는 내 마음을 정리하듯이 결연하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놋쇠 조각 셋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였다.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도, 목적지가 다시 명확해진 것은 일단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경차는 물장올 다리를 지나 서귀포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진짜 아버지는 안 만나실 거에요?"
"사면받는 좋은 날에 어정쩡하게 죄인이 끼어 무엇하겠니."
"그래도, 기억 찾으시면 다들 보고 싶어 할 텐데."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일이 생기겠지."

답답해하는 아들과 달리 사라도령은 그저 느긋했다.

"나랑 네 엄마는 신경 쓰지 말고, 맡은 일에나 최선을 다하렴."
"어련하시겠어요. 이번엔 어디로 가시게요?"
"글쎄다, 요즘 북유럽이 꽤 핫하다던데?"


【5】

명승희의 이야기, 둘.



서귀포 시내에서 일주서로를 따라 30분쯤 달리면 드넓은 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불쑥 솟아있는 산방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과 더불어 서귀포 서부의 주요한 오름 중 하나인 이 산은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 도내의 화산체 중 가장 커다란 오름이기도 했다. 산 이름의 유래가 된 중턱의 해식동굴이나 제주답게 풍부하고 다양한 식생이 번성하는 것도 중요한 특징들이지만, 지금 내가 산방산을 찾는 건 역시나 여기에 얽힌 설화 때문이었다. 산방산의 밑둘레는 백록담의 둘레와 얼추 비슷한데, 여기서 착안한 것인지 이 산방산이 원래 한라산의 봉우리였으나 설문대할망에 의해 잘려서 이곳에 놓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라산에서 떼어낸 봉우리이니 적장자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용머리해안의 평야에는 때 이른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조금 떨어진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나는 곧장 산방굴로 향했다. 산방산 역시 대부분 지역은 자연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굴에 자리하고 있는 산사까지는 탐방로가 뚫려 있으므로, 이 산방산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십중팔구는 그곳에 있으리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중턱까지 산을 오르는 가장 좋은 길 또한 산방굴사 탐방로이니 헛걸음이 될 일은 없으리라.

나는 어느새 한 달을 꽉 채워가는 여정에 지쳐가는 다리를 억지로 북돋우며 길을 걸었다. 물장오리오름의 경험 이후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기억의 파편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 해답도 역시 이 여정의 끝에서 얻을 것이었다. 나는 계속 나아가야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산방산 탐방로에는 꽃샘추위를 뚫고 이곳의 정기를 받아가려는 방문객들이 붐볐지만 나와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빗겨간 모양이었다. 중천에서 약간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햇살을 내리는 이른 오후, 산방산의 작은 동굴에는 나 말고는 사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불상은 바위 동굴 안에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산방덕이의 눈물이 샘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방울방울 영롱히 울리는 소리를 함께 듣고 있으니 마치 나도 돌부처가 되어 시간 속으로 침전해가는 것만 같았다. 이 경험이야말로, 오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산사에 오게 되는 마력이 아닐까.

몇 분이 지났을까, 산사를 가득 메웠던 풍란 향기 사이로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은근한 쌀 내음이 코를 간질여왔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자 송당리 당오름에서 만났던, 분홍 셔츠와 갈색 머릿결의 그 여자가 시치미를 뚝 뗀 채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성질이 급하시다고 들었는데, 의외네요. 명상도 다 하시고."

내가 가볍게 우스개를 던지자 여자는 약간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얹어뒀던 선글라스를 내려썼다.

"누가 그러든. 매화야? 문희 언니야?"
"아직 본인 이름도 말해주지 않으셨는데 다른 분들이라고 제가 알겠습니까."
"아이코, 맞네 맞어."

여자는 헤실헤실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잠깐 침묵하더니 곧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린 아직 통성명도 서로 안 한 셈이지."
"오늘은 당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음, 아마도.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야."
"그것이 순리이기에… 겠죠?"

말을 하고서야 나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래. 이 여정의 종착점이 이제 보이고 있어."
"종착점…"

그 말을 듣고 나는 여정의 중간부터 줄곧 품어왔던 의문을 그에게 물어볼 용기를 냈다.

"이 여정은, 제가 알기 훨씬 전부터 예정되었던 건가요?"
"역시 직감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 맞아. 우린 계속 너를 지켜봐 왔고, 너를 기다려왔어. 이건 그 기나긴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셈이지."
"천창희 선생님의 저작을 보고 제가 진로를 정한 것도 혹시 의도된 건가요?"
"글쎄… 네 운명을 다른 누가 정한 건 아니야. 창희 언니가 너를 위해 그 글들을 쓴 건 맞지만, 그걸 찾아보고 길을 정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야."
"그것도… 순리, 인가요?"

나의 마지막 질문에, 여자는 선문답 같은 질문으로 답했다.

"지금 너는, 순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무엇이라고…?"
"이 여정에서 네가 느낀 순리를… 네가 살아온 삶의 깨달음을 이야기해주렴.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

여자는 어느새 선글라스도 품에 집어넣은 채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그 눈빛은 위압적이라기보다도 신성한 것이어서, 나는 그 따스함에 압도되고 있었다. 답을 빚어내는 내 입은 알게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답변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솔직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부조리하기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조리하다, 란 말이지."
"예… 부당함이 넘쳐나고 고통으로 얼룩진 세상에 그저 따르라는 건, 폭력이라고요. 그에 거스르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세상이라면 더더욱."

여자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그시 나를 지켜보았다.

"부모님은 그런 부당함에 맞서다가 허망하게 가시고… 할머니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으시다는 듯 그저 절 키우는 것밖에는 여념이 없으셨죠. 어린 마음에는 세 분 다 밉기만 했어요. 세상이 그렇게 험하게 굴면 굽히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면서 살지… 왜 그리 힘겹게 살기만을 고집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담담히 말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야기 속의 세상은, 억울한 죽음은 한을 풀고, 선한 삶은 보답을 받는 세상이었으니까요.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뒤부터는 거의 도피하다시피 공부와 설화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간 이 부조리한 세상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아무도 저를, 우리를 돕지 않는다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죠."

여자는 흐뭇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어제 송당에서 당신을 봤을 땐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이후론 계속 희한하기 짝이 없는 일만 벌어지고, 저 자신도 잘 모르는 과거를 보고, 신들의 논쟁을 목격하고… 그런데 이젠 왜 저에게 이걸 물어보는지 알 것 같아요."

나는 눈물이 뺨을 타고 천천히 흐르는 걸 느꼈다. 산방덕이의 샘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리대로 산다는 건, 당연히 세상사가 흘러가는 이치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거겠죠. 하지만 그 말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것에 그것이 순리라면서 체념하고 살아가란 뜻은 아니에요. 올바른 이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삶이야말로 순리를 따르는 삶이에요. 그건 너무나 치열한 삶이라, 다른 누가 계도해줄 수 있는 게 아니죠."

나는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지 않았다.

"그분들은 그저 당신들께서 추구하시던 이치에 솔직했고, 거친 세상에 맞서 당당하셨을 뿐이에요. 비록 당장은 억울해 보이고, 당장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여도… 신이라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삶은, 무가치한 게 아니었어요…"

여자는 말없이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따뜻한 품속에서 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이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대로 제법 오랫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내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자, 여자는 포옹을 풀어놓고 내 두 어깨에 손을 올릴 채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세경아… 슬프고 힘든 일이 너를 옥죄어왔음을 몰랐던 게 아니야. 네가 이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되길 기다렸을 뿐이지. 네가 우릴 원망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하지만, 그저 네 가족과 너 자신을 원망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왜 그러겠어요… 지금의 저는 너무나 많은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는 걸 알았는데."

나는 비로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당신들께서 자랑스러워 할, 당당한 저 자신이 되어야죠."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손을 모아쥐었다. 따스한 손길이 자리를 비켜주자, 두 손바닥 위에는 마지막 증표가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자격을 증명한 걸 축하해."

우리는 서로의 눈을 다시 마주 보고 웃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때문에 그의 미소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마른 자리를 재차 닦았고,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처음 만난 그날에 그랬던 것처럼 희미한 쌀 내음만 남겨두고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불상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고, 산방덕이도 언제나처럼 고요한 동굴에 시간의 흐름을 자각시켜주는 샘물을 똑똑 떨어트리고 있었다. 개운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 버린 나는 잠시 이 조그만 산사에 다시금 기도를 올리고 동굴을 나섰다. 탐방로는 방금까지 텅 비었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 다시 산방굴사를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석별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더욱 짙어지는 풍란 향기를 맡으며 나는 하산길을 걸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분명했다. 증표를 얻은 세 오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오름. 세 오름을 이은 삼각형의 내심에 가장 가까운 오름. 산방산을 목적지로 정할 때부터 진즉에 찾아놓은 그곳은 바로 물오름이다.

묵은 감정을 훌훌 털어낸 내 마음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증표 네 개를 싣고 다시 일주 도로에 오른 경차 또한 경쾌하게 속도를 올렸다.

"그래, 수고했다, 승희야. 사희한테 준비하라 이를게."

쪽찐 머리의 여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떠나보낼 땐, 40년이면 금방일 줄 알았는데."
"그러게. 문희 너도 올 거지?"
"당연하지. 그럼 날 빼놓을 셈이었어?"

두 여자는 참 오랜만에 깔깔대며 맘껏 웃었다.
제법 긴 여정의 끝이 네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6】

김세경의 이야기.



성판악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내려선 나는 먼저 한라산을 보았다. 서쪽으로 슬며시 기운 태양에 닿아보려 발돋움을 하는 듯한 산꼭대기에는, 백록담 분화구 둘레에 쌓인 마지막 눈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대로 시선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옮기자, 드넓게 펼쳐진 울창한 숲 중간에 수줍게 불쑥 튀어나온 곡선으로만 보이는 물장오리오름이 내게 반갑다 인사하고 있었다. 시선을 계속 돌려 도로 건너에 이르자, 그곳에는 전파 중계탑이 불쑥 솟아있는 언덕배기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제주를 일컬어 삼다도라 할 때는 돌, 바람, 여자가 아니라 신, 전설, 오름이라 할 만큼 제주엔 많고 많은 오름이 널려 있다. 그 수많은 오름 중에 내 여정의 종착지가 된 이 물오름은 국립공원 종주의 거점이 되는 성판악 휴게소에 바로 접해있음에도, 큰길을 따라 남진하면 바로 나오는 또 다른 물오름에 밀려 검색조차 잘 안 될 만큼 잊혀진 오름이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오름 꼭대기에 떡하니 자리한 항공무선표지소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내 마음에 혹시 들어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여태 겪은 신비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생각하면, 내 답이 틀린 게 아닌 이상 내 앞길이 막히진 않을 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것은 그보단 오름에 오른 후에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가까웠고, 그것은 불안보단 설렘을 주는 것이었다.




물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은 중계소 운영을 위해 닦아놓은 시멘트 도로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내가 겪어온 중에 가장 무속적이고 신령스러운 여정이 끝날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컨트리클럽의 진입로라면 그야 차가 드나드는 게 편하겠지만, 이 작은 오름 꼭대기에 골프장이 펼쳐져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나를 웃겼다 울리는 이 고약한 여정은 끝까지 제 정체를 쉽사리 드러내려 하지 않는 듯했다.

비록 오름 중에는 산림이 많이 훼손된 편이라 하나, 올라가는 길 좌우는 여전히 빽빽하게 뻗은 삼나무와 구상나무 숲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곳 물오름은 이름처럼 과거엔 물장오리오름처럼 물이 가득 찬 화구호가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오랜 침식의 결과로 한쪽 사면이 무너진 탓인지 지금은 명확한 화구호 지형이 없는 말굽형 오름으로 남아 있다. 그 커다란 반달 모양의 능선 한쪽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이 진입로는, 한쪽 꼭짓점에서 크게 꺾어서 다시 정상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큼직한 전파 송신탑이 이정표인 양 세워져 있는 전환점을 돌아 아무 말 없이 바람과 숲 향기를 느끼며 걷던 나는 점차 가팔라지는 경사에서 정상에 가까워져 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아서, 나는 곧 단조롭지만 기능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녹색 지붕의 하얀 콘크리트 건물 단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철장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이 하늘길의 안내소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관계자를 제외하고서야 웬만해선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망 문 앞에서 경비를 찾는 내 목소리에 그리 자신감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나름대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직원을 불러냈다.

이것은 나로서는 제법 긴장하고 저지른 일이었으나, 일은 싱겁게 풀렸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험상궂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거구의 경비 직원은 내 얼굴만 슥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선 그냥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더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가슴팍의 명찰에 박힌 무장승이라는 이름이 슬쩍 보였기 때문이었다.

열린 문 너머를 조심히 살피며 들어가자, 무슨 거대한 갓을 벗어둔 것 같은 형상의 항행안전 통신설비를 지붕에 이고 있는 무선표지소 본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근방에 펼쳐진 드넓은 제주 섬의 절경이 노을에 물들어가는 광경이 아름답게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하얀 모자를 벗어가는 한라산 풍광이 석양에 젖어드는 모습도, 물장오리오름의 호수가 봉숭아 물을 들인 듯 불그스름하게 변해가는 모습도, 저 멀리 내 어린 시절이 담긴 서귀포 시내가 저녁을 맞아 도심을 무화과 색으로 바쁘게 칠해가는 모습도, 사진을 찍어 내 마음에 영원히 저장해두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그러나 마냥 풍경만 감상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곧 해가 져버릴 것이고, 그러면 초대장의 암호를 풀 수 없게 된다.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서 사방을 살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용케 들어는 왔지만, 이 상황을 알아챈 다른 직원이 와서 날 쫓아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해가 저물어가면서 나는 거의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내 안에서 살포시 눈을 뜬 무언가 다른 나는 침착하라 말하지만, 지금 여기서 문제에 봉착한 나는 여전히 민속학 수수께끼에 인생을 걸고 달려온 일개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여하간 내가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무장승 선생님!"
"에그… 보낼 거면 제발 제대로 좀 알려주고 보낼 것이지."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자 아까부터 심드렁하게 내 쪽을 지켜보고 있던 경비가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찌뿌둥함과 귀찮음이 잔뜩 담긴 표정으로 경비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불러내었다.

"오사희, 퍼뜩 나와보라."

그러자 부지 공터의 동쪽, 그러니까 주건물 쪽에서 서서히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여정에서 놋쇠 증표가 뿜어냈던 광채와 같은 색이었다. 빛은 점점 영역을 넓히더니 선을 이루고, 그 선이 조금씩 벌어져 구멍이 되니, 그 너머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에 감탄하고 있기도 잠시, 새하얀 무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사뿐사뿐 빛의 통로를 걸어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이번 여정에서 만난 안내자들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여자는 내게 말을 걸기 전에 먼저 경비에게 엄하게 물었다.

"여보, 아직도 그 습관 못 고쳤어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먼저 도울 궁리를 하라고 했잖아요."
"그치만, 내 일은 어디까지나 서천 입구를 지키는 거지, 여기까지 와서 길을 잃은 사람을 맡아주는 미아 보호자는 아닌걸."
"당신이 마음 고쳐먹고는 사람 만나길 부끄러워하기에 일부러 신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는 이곳으로 좌정하게 해 줬으니, 백 번 참고 천 번 고치는 마음으로 심성을 가꾸어야지요. 아이들 보기에 당당한 아빠가 되겠다고 했죠?"
"…흥."

무장승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대놓고 팔짱을 끼며 토라졌다는 티를 내고는 경비실 앞의 간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여자도 비로소 미소를 짓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수고 많았다, 막내야. 언니들이랑 매화가 잘 이끌어줬구나."
"당신도 저를 아시는군요."
"당연하지."
"여기 있으면, 세상에 들켜서 곤란한 것은 아니십니까?"

여자는 허허 웃고는 답했다.

"안심해라. 저기 저 사내가 태도는 서투르긴 해도 장승신 하던 경력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이미 널 여기로 들일 때부터 이승 현세와는 한 꺼풀 다른 차원에 들어온 거야."

여자가 슬쩍 그를 쳐다보며 말하자 무장승은 헹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는 잘했다는 표시로 손짓과 미소를 날린 뒤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오름에서, 승희 언니의 인정을 받았다고 들었다."
"…예."
"자 그럼, 지금까지 모아온 네 개의 증표를 내게 주렴."
"아… 여기 있어요."

나는 진즉에 가방에서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던 놋쇠 증표 네 개를 그에게 내밀었다. 조각들을 건네받은 여자는 품에서 새하얀 무명천을 꺼내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어느새 천에 꿰어진 증표들이 가볍게 묶인 천 끄트머리에서 짤그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느새 새하얀 두건으로 머리를 덮은 그는 세습무 특유의 절제된 동작으로 굿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어떤 굿 중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절도 있으면서, 가장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춤이었다.

"마고 마마 생일 생시와 아기 자청비 생월 생시 적어 두렁이 끝에 매신 후에 아기 앞에 기우려 놋코 놋엸쇠 놋자물쇠로 채여 계하에 신들 불러 들여 어주삼배 먹인 후에 옥함을 안고 돌처서니 아미타불 염불이요 세지 고개 넘엇스니 압흐로는 황청강이요 뒤으로는 유사강일러라…"

천천히 곡선을 그리는 순백색의 천 끝에서 마치 방울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었다. 느릿느릿하지만 누구도 감히 대어볼 수 없을 신력이 담긴 굿판이 계속되면서 여자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한라산 백록담에 천천히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기억 일코 신성 일코 적강하야 이제는 이별 시년 원망 시년 자강 시년 배움 시년을 다 마치고 서천에 도라오니 순리 깨다른 자청비 이세희 김세경이 마고 마마 만나길 청하매 무조신 바리데기 오사희가 놋엸쇠 다시 맹그러 놋자물쇠 깨트릴려니…"

고조해가는 굿 속에서 여자와 증표가 발하는 빛은 마치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여자는 힘차게 휘돌린 천 끝을 반대 손으로 움켜잡았다.

"금년금월금일금시 중세경신 자청비에게 자물쇠 주신 듯 엸쇠 주소셔 엸쇠로 하여금 추억 주신 듯 기억 주소셔 기억으로 하여금 깨침 주신 듯 신성 주소셔 나무아비타불."

증표의 빛은 빙그르르 나선을 그리며 무당신의 손을 따라 바닥에 내려앉았다. 여자는 여전히 절도있는 무용의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고운 손가락 사이로 눈 부신 빛을 발하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살며시 손을 펼쳐 내게 내밀자, 그 안에는 증표 네 개가 아름답게 합쳐진 전통 양식의 놋열쇠가 뉘어 있었다.

"이것을 네 심장에 찔러넣어, 힘껏 돌려라."

거스를 생각이 들지 못하게 할 만큼 엄숙하게 열쇠를 건네받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열쇠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나는 높이 치켜든 열쇠를 온 힘을 다해 가슴팍에 내리꽂았다. 고통이 아닌 빛이 내 몸으로 번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열쇠가 일각을 돌아갈 때마다, 물장오리오름 이후로 어렴풋하게만 내 안을 맴돌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꽃사람의 형상을 갖추며 되살아났다. 열쇠가 다시 일각을 돌아갈 때마다, 그 전에 만들어졌던 꽃사람의 기억들에서 꽃잎이 날리며 모든 기억이 제 모습을 찾았다. 빛과 바람과 꽃잎이 내 곁에서 소용돌이를 만들며 흩어져 날렸다.

마지막 일각을 돌아 한 바퀴를 채운 열쇠는, 한순간에 빛으로 화하여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 뒤로 태양이 작열하며 지상에 노을을 내리쬐는 게 느껴지고, 땅에서 초목이 용솟음치며 새순을 틔워내는 게 느껴졌다. 바람에선 생동감이, 냄새에선 생명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생생함을 그대로 간직한 내 기억이 느껴졌다.

내가 그 감각을 받아들이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추스르고 있자, 무복 치마 옆으로 다른 사람의 모습이 걸어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쪽찐 머리의 그 여자, 천창희 선생… 아니, 이 땅의 창세신, 마고할망 천창희 언니였다.

"그래, 내가 그래 보고 싶었다고?"
"…창희 언니!"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서천 안방마님으로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켰을 그의 모습은 내가 떠날 때 그대로였다. 조금 진정을 하자 그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다른 형제자매 신들도 눈에 들어왔다.

"잘 따라 줬어! 고생이 많았다."
"문희 언니…"

검은 두루마기가 어울리는 숏컷의 제주 토박이 창세신, 설문대할망 설문희 언니는 그저 씩 웃어주며 격려를 건넸다.

"용케 그 힌트들을 보고 다 따라왔네?"
"승희 언니…"

연갈색 꼬부랑 머리에 분홍저고리 다홍치마를 갖춰 입은 우리 삼신할미 명승희 언니는 여태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제 다 같이 환영연이라도 해야지."
"사희 언니…"

방금까지 온 힘을 다해 굿을 벌이느라 얼굴이 벌게진 무조신, 바리데기 오사희 언니도 얼굴만은 싱글벙글이었다.

"여하간, 이렇게 시련들을 통과하신 막내 스승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매화야…"

그리고 우리 모두의 귀여움을 받던 서천의 진짜배기 막내 신이자 현직 서천꽃감관, 신산만산 할락궁이 매화까지 (저 뒤에 퉁명스럽게 박수만 치고 있는 무장승을 빼면)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자, 정말로 내가 세경신 자청비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해후의 기쁨을 누리며 서로 얼싸안은 뒤,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선 어느새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을 때, 슬며시 좌중의 주목을 모으며 창희 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흠… 각설하고,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뭔데요, 언니?"
"모두가 우리 자매 자청비가 지상에서 김세경으로 살면서 너무나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었음을 알고 있지. 아무리 신이라 하여도 마음속에 상처가 응어리지면 그 고름은 영원히 그를 괴롭히기 마련… 그래서 나는 우리 세희에게 선택을 내릴 기회를 주고 싶다."

신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경신 자청비,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그대가 지상으로 적강했을 때의 기억을 지워줄 것이다. 원치 않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천신지기, 인귀정괴, 금수초목의 창세자인 나 마고 천창희가 묻건대, 자청비 이세희야. 너의 선택은 무엇이냐?"

나는 잠깐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그 말이 옳다. 바리데기 사희 언니가 그렇게 고생하고, 사라수대왕 근화 선생이 그렇게 후회했던 것처럼, 육친을 잃은 지상의 삶은 두고두고 내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이 되고야 만다. 하물며 이번 생은, 옛적 내가 나고 자란 김진국의 삶도 아닌 그저 가르침을 얻기 위해 거쳐 가는 삶에 불과하니, 상식적으로는 잊는 것이 마땅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 중세경신 자청비 이세희는 사랑하는 자매들에게 고할 바가 있습니다."

나는 좌중의 주목을 내게로 모으고 담담히 선언했다.

"나는 이번 생의 기억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청컨대 이제부터 나의 이름을 이세희가 아니라 김세경이라 불러주길 바랍니다. 나는 고예향의 손녀, 김영재와 박라희의 딸이었던 기억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또 나는 그들의 자손이었던 기억에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들이 제 자식, 손주를 위해 희생했던 것을 저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과 나의 삶이 오늘 세경신 자청비에게 깨달음을 주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권리이고, 그것이 나의 책임입니다."

자리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쑥스러워진 탓에 점점 움츠러들며 말을 맺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괜찮죠?"

그렇게 할 말을 끝내고 눈치를 살피던 나는, 묵묵히 나의 선택을 듣고만 있던 창희 언니의 눈빛에서 뭔가 독기가 사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뒤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신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진심으로 기뻐하기 시작했다.

"역시,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성급하고 멋대로여도 속은 깊고 바로 선 녀석이라니까."
"다행이다, 다행이야."
"유후—! 진짜 마지막 시련을 통과한 걸 축하해요, 스승님!"

내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며 서 있으니, 창희 언니가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니는 등 뒤의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연연하지 않고 나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사랑하는 막내야…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시험이었단다. 만약에 네가 이 깨달음이 전부 네 삶에 녹아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감히 잊겠다는 선택을 내렸다면, 너의 구제는 다음 생으로 미뤄질 것이었단다. 하지만 기우였구나! 순리의 진짜 뜻을 알고, 인간과 신의 삶을 깨우친 너를 함부로 의심해서 미안했다."
"그런 거였어요…? 흥, 괜찮아요. 내게 새로운 뿌리를 주었으니 그걸 확인해보는 게 죄는 아니죠."

내가 허세를 부리며 언니를 용서하자 주변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창희 언니도 날 보며 실실 웃더니 결국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언니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내 손을 높게 치켜들어 보였다.

"자, 우리 서천 형제자매들이 잃었던 아픈 손가락을 신들의 제전에 다시 맞이하게 된 것을, 서천과 온 천상과 온 저승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모두 자청비 이세희, 아니, 김세경에게 박수!"
"와아아아!"
"막걸리 따라라!"
"좋지!"

그렇게 일곱 신들은 웃음꽃을 피우면서 빛의 구멍을 지나 서천꽃밭, 서천 컨트리클럽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한데 모인 신들은 한참 동안 연회를 즐기며 오붓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아 참, 나는 이 다음날 숙취를 잔뜩 껴안은 채 아침 비행기를 타고 무진으로 돌아가, 학장님께 제출할 보고서와 경위서, 다음 학기 강의 계획서를 작성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민속학자에서 전통 신앙의 신으로 처지가 바뀌어버렸지만, 지난 삶을 버리지 않겠다 선택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또한 김세경으로서 계속 살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피로와 술기운으로 비몽사몽 한 채 쓴 서류들은 단박에 퇴짜를 맞아야만 했다. 미쳤다고 학기 직전에 휴직계를 내서 추억여행이라도 하고 왔느냐는 학장님의 버럭질은 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내 삶의 이정표가 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삶은, 그리고 자청비의 삶은 내게 어떤 사건을 몰고 올까. 그것은, 누구도 감히 알 수 없는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깃든 순리를 따라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어떤 시련도 문제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다음의 이야기는, 서천 컨트리클럽에서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며 담소를 나눌 때가 있겠지.

그때를 기약하며,

김 세 경.






"예향아, 예향아, 선ᄒᆞ곡 굳센 제주 사름 고예향아. 하늘의 ᄉᆞ정이 이러한 즉 세경신 자청비가 홀로 적강하야 늬 손지로 날 거난, 세희네 할망 뒐 고예향아, 늬가 진정 중세경신 자청비의 할망 뒐 준비가 뒈언가?"
"아유, 신님네 ᄉᆞ정이랑 접어둡서."

노파는 두 말 할 것 없다는 듯 손사레를 쳤다.
간만에 태몽을 직접 전하려 행차한 삼신은 놀랍다는 듯 그를 지켜보았다.
담담히 말하는 노파의 눈빛에 의문은 없었다.

"가의레 내 아덜네 ᄄᆞᆯ, 세경이 뒐 애기믄, 그거믄 뒈엇수당."
"늬 뜻이 ᄎᆞᆷ말 경ᄒᆞ연가?"
"게민 무시거 더 필요ᄒᆞ우꽈?"

삼신은 흐뭇하게 웃었다.

"늬 말이 옳고도 옳고나. 선한 사름 예향아, 세희… 세경이를 잘 부탁ᄒᆞ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