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테르커 박사는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일어나서 비틀거렸다.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재단 양호실의 풍경이었다.문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재단 양호실이 아니라 숙소였다.
"으… 제가 왜 여기 있죠?"
"제 숙소 앞에서 주무시고 계셔서 끌고 왔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으으, 어제 너무 마셨나….."
"테르커 박사님, 어제 저녁에 무슨 일 있었나요?"
길베르트 요원이 말했다.
"흐…머리야… 그러니까 아는 요원들이랑 술을 한잔 했습니다. 저번에 조기주 요원이 보너스를 받았거든요. 축하하려고 한잔 했죠."
테르커 박사는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혹시 알베르트 박사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알베르트 박사라면 이것저것 섞어 마시더니 중간에 나가서,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되는데요.""으…. 알베르트 박사는 ██ 기지 주변의 산에서 쓰러져서 발견되었습니다."
"흐.. 그 친구 주사가 심하긴 하죠. 잠시 화장실에 ㅈ…으아!"
"여기 비닐봉지 있습니다."
"으. 감사합니다"
"알베르트 박사가 발견되었을 당시 박사는 지금이 2015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네? 혹시 술이 덜 깬 건 아닌가요?"
"검사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0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대체 무슨…."
"손에 들고 있던 컵을 조사한 결과 A급 기억 소거제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테르커 박사의 얼굴이 순간 백지처럼 하얘졌다.
"알아요, 알아. 거짓말 못하는거 잘 알아요, 제가 박사님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나저나 혹시 뭘 마셨는지 확인할 수 있었나요?"
"에.. 그러니까 포█리 스웨트랑 토█타, 맥주랑 소주랑 ██와인을 섞어 마셨을 겁니다. 겁니다."
"흠… 진상이 확인되는 대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0일 정도 지났을까, 업무에 치여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테르커 박사는 간단한 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A급 기억 소거제를 개발하는 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포상 받으면 한턱 내겠습니다. 솔직히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재단이니까요 뭐."

하늘이 어두워진지 벌써 이틀째다. 옐로스톤 화산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두산도 폭발했다. 일본에 있는 온갖 화산도 전부 폭발했다. 하늘은 화산재로 가득하다. 길거리는 혼란에 빠졌다. 한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의 재단은 이미 파괴되어 온갖 변칙 개체들이 유출되었다. 하지만 여긴 안전하다.
여긴 도서관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어느 도서관의 깊은 곳, 변칙 개체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또 하나의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이 지어지고부터, 누군가가 조금씩 변칙적인 책을 옮겨 놓은 기록이 있다. 여긴 안전하다. 보안 시스템은 10년은 유지될 수 있다. 뜯어먹을 수 있는 책도 있다. 전기가 일어나는 책도 있다. 아 물론, 뱀의 손과는 상관이 없다. 나는 기지 관리자에서 좌천된 뒤로 재단에서 관리하는 이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 이 작은 도서관은 외부에서 침투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다. 책들을 기지로 이동시켜 격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많아서". 이 많은 책을 옮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의 재단은 괴멸했다. 재단에 누군가의 테러가 있었다. 그 어떤 요주의 단체도 아니였다. 재단의 일부 생존자들은 우호적이던 요주의 단체와 연합해 개체들을 격리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재단과 마지막 연락은 어제였다. 이젠 재단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마추어 전파 통신 설비를 며칠 전에 사 놓았는데, 아직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을 뒤져 보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받은 기록은 절망적이었다. 세계 곳곳에 기괴한 자연현상이 생기고 있었다. 쓰나미, 초거대 싱크홀, 엄청난 화산 폭발, 지진. SCP-2000을 비롯한 온갖 수단은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도마뱀 자식은 탈주했다. 온갖 변칙적인 물체들이 세계를 장악했다. 어딘가에는 좀비들이 날뛴다. 녹색 점액이 시체에 닿는다. 그 와중에, 이 도서관만 안전하다. 주변에 변칙 현상이 감지되지 않는다. 망할, 세계가 멸망했다. 그걸 복구할 방법은 없다. 그 와중에, 나 혼자만 안전하다. 기막힐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