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s33의 쓰레기장

더더욱 쓰레기 같은 것들만 모아놓은 곳
비평을 받을 생각 없는 글들입니다. 돌아가 주세요.(어차피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을까)

반지하에서 기어 나와 해변에서 맞는, 안개와 무언가가 타는 연기가 섞여 매캐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듯한 새벽이였다.
내 안의 희뿌연 안개에서 차마 인간이 버텨낼 수 없는 정도의 분노와 슬픔이


비로소 죽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와 내 사랑은 물안개를 좋아했다.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와 축축한 내음을 우리는 즐기고는 했다.
우리가 안개를 좋아해서였을까, 혹은 안개만이 우리를 좋아해서였을까?


나는 본래 서울 촌놈으로,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아기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을 즐겨 읽는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기억나는 것은 오직 폭력, 학대, 그리고 끓어오르는 무언가였다. 동화책에 나오는 영웅들의 서사 이야기와 나는 동일하다고 항상 생각해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이 소년은 친구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고 아침이면 봄의 꽃망울처럼 피어오르는 안개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알 수 없었다ㅡ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까ㅡ많은 노력을 했다. 공부, 공부, 공부. 마침내 서울 내의 유명 대학에 합격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축하를 건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아원이 불의의 사고로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기에…

그래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 서울에서 학교를 나온 서울 촌놈은 결국 그 대학교에서 만난 한 시골 처녀를 좋아했다. 내 눈에 그녀는 열정적이였고,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에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 있듯이, 나는 그녀가 대인기피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항상 혼자 다니며, 아무도 같이하려하지 않고,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작고 나약한 안개꽃. 안개꽃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정의로운 영웅은 항상 선긋기를 당하며 '스토커' 소리를 듣고는 했다. 하지만 내가 사람들이 기피하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언제는 한 교수가 가련한 안개꽃을 꺾으려 했다. 교수는 악당과도 같이 공주를 괴롭히려 했고 이것이 관심을 받을 기회라고 생각한 정의로운 영웅은 그녀를 구해주었다. 사악한 악당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고, 정의로운, 하지만 멍청했던 영웅은 퇴학 조치 되었다.

나의 사랑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가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때쯤이였다. 그때쯤 나는 그녀의 정보를 인터넷에서 샅샅이 찾아보고 있던 중이였다. 그녀가 무진시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무진시. 고아원 시절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짧막하게 들어본 적이 있다. '안개가 잦은 지역.'
그것 이외엔 정말 알고 있는 정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녀가 있다는 정보가 내게는 훨씬 중요했다. 나는 반지하에 있는 온갖 짐을 배낭에 싸매고 무진시로 향했다. 그 누구의 반대도 없었다. 정확히는, 가지 말라고 반대할 가족보다는 가지 말라고 독촉하는 빚쟁이가 더 많은 거지만.

그렇게 불의의 사고들로 모든 것을 잃은 서울 촌놈은 이곳, 무진에 도착했다. 반겨주는 이는 나처럼 혼자 새벽에 자라난 물안개뿐. 하지만 안개로 나의 시야가 좁혀져 오면 좁혀져 올수록, 그녀와는 더욱 가까워지는 듯 했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항상 즐겨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를 구하는 정의로운 영웅은 항상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줄로만 알았다.
달랐다. 세상 사람들이 악당으로 다가왔다. 공주는 나의 환상으로 만들어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영웅은 타락하고 길을 잃었다.

홀로 무진에 내려온지 4년째, 담배와 술에 찌들어 겨우 알바를 전전하며 반지하에 세를 얻어 사는, 빚쟁이들로부터 숨어지내는,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취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런 멍청한 영웅이 있었다. 나는 새벽 바닷가에 산책 가는 것을 좋아했다. 안개 때문이였는데, 항상 부두가 철문으로 닫혀 있다는 것에 나는 슬픔과 분노 사이의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 이외에도 바닷가에 산책을 나오는 무진시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바닷가에 산책 나온 정신병자들은 특히 나의 말벗이 되어주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산책하며 정신병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귀를 다시금 의심하고 떨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무진시의 부자 이야기, 부자의 돈을 노리고 부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 이야기, 부자의 딸이 대인기피증이라는 이야기, 부자의 딸이 가정폭력으로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

동화 속의 영웅이 마침내 공주가 갇혀 있는 탑을 알아내게 된 것이였다.
나는 정신병원에 달려가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병원은 영웅이 공주를 만나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영웅은 공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애원하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 마침내 공주는 영웅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버림받았던 가엾은 공주는 나를 처음 다시 보았을 때 조금 놀란 눈치였다.

"너…여기…진짜…어떻게 왔어?"

"으응, 니 소식 듣고 바로 달려왔어."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

"이런 모습 보이기 싫다고."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왜? 나는 다 이해해줄 수 있다고 수년 전부터 말해왔어. 항상 너를 사랑할 자신 있는 것도 나야. 그딴 쓰레기처럼 너에게 이렇게 큰 상처 주지 않을 자신 있는 것도 나야."

"그냥…니가 날 좋아했었는데…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게 너무…"

"…솔직히 말할게. 나 너 계속 쫒아다녔어. 4년 동안 너 찾으러 무진시 돌아다녔고…또"

"뭐?"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흐느끼며.

"사실 나…도망치고 싶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와 안개만이 있었다. 서울에서 무진까지 따라와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와 집안의 돈을 노리고 결혼해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사라진 채 병원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마치 드라마틱한 소설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안개 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다 보니 바닷가에 도착했다. 항상 잠겨있던 부두의 철문이, 오늘따라 열려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향해 뛰었다. 끝없는 안개와 아스팔트 바닥이 우리에게 펼쳐졌다. 우리는 계속 뛰었고, 뛰고, 뛰었다. 언제까지 뛰었을까, 언젠가부터는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서로를, 어쩌면 안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였는지도 모르는, 바라보며 어이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건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긴 부두일거야…"
"그러게나 말이야."

온몸에 추위가 느껴졌고,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 세상 사람들에게 "사이코패스"라는 낙인이 찍혔던 내가, 학대 받으며 살다가 분노로, 하지만 우발적인 사고로 집과 고아원을 불에 태워버린 내가, 무시받으며 살고 또 살아왔던 내가 살면서 처음 느낀 감정. 행복이 느껴졌다. 행복에 취해갈 때 즈음에, 다시금 새벽의 추위가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에 의지해, 천천히 쓰러져갔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나약하다고, 자살은 무기력하고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고 욕하겠지만, 저들은 우리에게 사악한 공격들을 퍼부은 악당이자 악령이였다. 나는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유로운 죽음, 바로 당신들으로부터 자유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행해지는 고통에 대해 잠시 일보 후퇴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사회의 부적격자일지도 모르며,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무진의 안개와 같이 불안정해졌을지도 모른다. 안개와 같이 살아왔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안개로 가리고. 지금 내 앞의 그이와 나만을 생각하며.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와 내 사랑은 물안개를 좋아했다.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와 축축한 내음을 우리는 즐기고는 했다.
우리가 안개를 좋아해서였을까, 혹은 안개만이 우리를 좋아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