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네

손님네 이야기.

김뭄은 비가 추적추적 내림에 따라 슬슬 나무하기를 멈추어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이런 진날에는 나무도 잘 베이지 않을 뿐이거니와, 괜한 흙사태 따위에 휘말릴 수 있는 까닭이다. 그가 나뭇단을 지게에 올리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끝낼 제는 거의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귀로에 올랐음에도 뭄의 발걸음은 축축하지 아니하였다. 해가 나있을때 미리 많은 양을 베기도 했고, 집에는 내다팔 삼베가 더미로 쌓여있음이다. 마 값을 후하게 쳐주는 아랫골 아주먼네를 뵐 생각을 하니 더욱이 다리가 거뿐해진다. 그는 지게를 고쳐 매고 다리를 재게 놀려 귀로를 달려 내려왔다.

뭄이 자신의 집 — 집이라기보단 을씨년스러운 폐가에 가까운 자신의 보금자리에 다다랐을때, 궃은 비는 의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게를 내리며 평소보다 훨씬 아득허이 일렁이는 큰 집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달뜬 기대감에 산길을 뛰어내려오지만 않았더라면 몇 발자국 전부터서 알았을 마른 기시감 — 너무나도 익숙한 3년 전 즈음의 그것을 닮은 공기가 자욱하니 퍼지고 있었다. 익숙한 분위기. 그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마당에 나뒹굴던 낫을 잡아채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집에 다가가는 자세가 불안하다. 비는 궃게 추적거리었고, 질척거리는 흙이 신에 묻고 있음에도 한 발짝 떼기가 고통스러웠다. 사랑채 저 안에 들어 앉아있는 무정형의 무언가가 뭄의 손발을 차거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로 비를 맞아내며 천금처럼 느껴지는 제 걸음을 걸었다. 걷는다고 해도 그저 힘겨운 것을 감내한다는 느낌이라, 결국엔 걷는 것이 아닌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 하였다. 이렇게 긴장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운좋게도 지난 3년간 그럴 일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문이 그 눈 앞으로 덜컥 다가올 즈음하자 그는 걸음을 늦추잡았다. 그리하면 자기 앞에 박두한 일말의 두려운 미래에서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문은 이미 그 앞에 도래하였다.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면서도 그는 선뜻 들어가기가 힘겨웠다. 행여나 정녕 저안에 그가 어찌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의 거처를 차지하고 앉아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 따름이다. 물론 그러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그가 느끼는 두려운, 초조한, 긴장 따위가 다 저 망할 놈의 날씨 때문임도 잘 알고 있다. 뭄은 자신이 그걸 잊지 않기를 바랬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창호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밝은 방안에 인영이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하였지만, 이내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 안에 사람이 있었다. 뭄은 몸에 아로새겨진 뿌리깊은 공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눈이 밝기에 익숙해지자 뭄은 제 집을 차지한 기묘한 찬탈자들의 행색을 또렷히 여겨볼 수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강렬히 다가오는 여인의 수려하고도 기이한 외모가 스쳐지나가며 그 주변에 본 적 없는 의복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중년의 사내, 그리고 그들 옆에 우물쭈물하며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는 가장 어려보이는 사내의 행색이 눈에 걸리었다. 그 중 어린 사내를 제외한 세 사람은 한 눈에 봐도 신라인은 아닌 것이, 신라인이기보단 고구려인, 고구려인이기보단 말갈인, 말갈인 같으면서도 회회 사람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자신 앞에 자리하고 있는 이 네 침입자를 향해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 뉘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당혹스러운 되물음이었다.

— 그러는 그 쪽은 뉘시오?

청년의 입에서 나온 그 어조와 인상으로 미루어보아 결코 오만방자함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벌벌 떠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장해 보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히 그러했다. 그러나 뭄은 피로함과 당혹감으로 그만 성을 내듯이 호통쳤다.

— 남의 집안에 기어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려는게냐, 이놈!

— 그럴리가 없소, 이곳은 본디 내 가족의 집이었단 말이오!

당황해하며 측은해질 정도로 안색이 파리해지는 청년의 말에, 뭄은 되받아 소리치려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생각이 닿았다.

— 그… 김부잣집?

그 이름을 듣자 사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마치 뭄이 그의 손을 붙들고 네 말이 옳거니라고 말하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 옳소, 그게 우리 가족을 이르는 말이었소. 나는 이 집에서 18살까지 살았느니, 헌데 무슨 연유로 그대가 이곳에 기거하는 것이오?

— 내가 이곳에 왔을 제 마땅히 살 곳이 없어 움막을 지었소. 헌데 추위와 바람에 금방 죽게 생겼더군. 그래서 사람이 없어 다 쓰러져가는 이곳 사랑채만 좀 치우고 살고 있는 것이오.

뭄은 조금 몸을 옹송그리며 대답했다. 비가 그의 몸을 적잖이 적신 탓이었다. 뭄은 마루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을 물었다.

— 허면 그대가 그 앓다 죽은 아들이란 말이오? 내가 갓 이곳에 여숙을 풀었을 제 이웃의 노인이 이 집안의 우환을 일러주었소. 이 집의 부자가 역신을 잘 모시지 못해 그만 아들을 죽였다했는데, 허면 그대는 분명 죽은 사람일 진저, 어찌 내 눈앞에 살아 있단 말이오?

사내는 난처한 듯이 웃으며 그때까지도 군말 않고 앉아있던 세 이방인의 눈치를 보았다. 뭄이 느끼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주인은 그와 대화하던 그 어린 사내가 아닌 그들인 모양이었다. 이때를 틈타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색한 침묵이 끔찍해,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 그럼 그대들은 이곳에 다시 살려는 것이오? 나는 괘념치 않소.

뭄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인정하긴 싫었으나, 이들에겐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어, 말을 조심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 아니오, 우린 금성으로 가서 왕을 뵈어야 하오. 이곳은 단지 내 옛 집이었으므로, 단지 쉬어가려고 온 것이오.

— 그러하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청년과 세 사람을 치어다보았다. 절대 좀도둑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뭄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풀었다.

—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나, 원하는 만큼 쉬다가시오. 방은 많으니. 당신 아버지의 재력에는 언제나 놀라는 중이오. 헌데… 왕이라 하시었소?

청년은 의아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 신라가 망한지 다섯 해요. 왕실은 와해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