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펼쳤다.
가파른 산길을 홀로 걸어가는 내 뒤로 흙탕물이 흘러내렸다. 벌써 이 길을 떠난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내 몸, 내 다리는 아직 이 길을 기억한다.
산 위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그렇게 뵈진 않지만 산 위에는 버젓이 학교가 있고, 넓은 눈동장도 있다. 심지어 꽤 넓다. 예전에는 운동장이 헬기 이착륙지로 쓰였다나 뭐라나.
정확히 9년 전, 나는 이 학교에 전학을 왔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의 심각한 아토피가 그 이유였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환경에서 지내다 보면 아토피가 나을거란 의사의 소견도 있었고.
당시의 난 참 하얬다. 피부가 하얗다는게 아니고, 마음이 하얬다. 조그만 펜으로 쿡 찍어도 티가 많이 나는, 새하얀 화선지같은 느낌.
이런 외진 학교를 다니다 보면, 아이들과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일단 학생도 별로 없고, 갈데가 없으니 어딜 가든 만나게 되어 있다. 같이 놀면 더 재미있기도 하고 말이다.
당시 같이 놀던 친구는 총 5명(나까지)이었다. 한명은 나처럼 도시에서 왔고, 다른 세명은 원래부터 살던 애들. 도시에서 온 애는 여자애였는데, 꽤나 이쁘장하게 생겼다. 생각해보니 엄마를 닮았었지. 얘는 아빠가 군인이라서 이쪽으로 전학온, 특이한 케이스였다. 처음엔 쭈뼛쭈뼛했는데… 나중엔 많이 친해졌다. 단둘이 냇가에 놀러갈 정도로 말이지.
다른 셋은 다 남자였는데, 얘넨 서로서로 많이 친했다. 우리가 오기 전부터. 그래서 친해지기 꽤 어려울 줄 알았는데, 먼저 말도 걸어주고, 뭐, 좋은 얘들이었다.
우리 또래 얘들이 뭉치면, 꼭 우리끼리의 비밀은 한두개씩 만들고 다닌다. 이를테면 부모님 몰래 비밀 아지트를 만든다던지, 엄마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낸다던지,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달랐다.
고래.
우린, 냇가에 고래가 산다는 사실을 안다.
마침 이 옆이 그 '고래가 사는' 냇가다. 잠깐 구경이나 하고 갈까.
떨어졌던 나뭇잎이 사라지고, 푸른빛 잎사귀가 머리를 내밀었다. 노을진 산마루턱엔 다시 환한 햇빛이 내려쬐고, 야트막한 언덕 한가운데에서 있던 나무엔 분홍을 머금은 벋꽃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삼십 리를 도망쳐 온 한 사내의 피칠한 발목에서 흘러내리는 액체의 색이 변하지 않음은 착각이 아니었다. 입술을 과하게 깨물어 흘러나온 핏물이 스르륵 떨어졌다. 사내는 알아채지 못했다.
삼십 리 저편, 회색빛 건물 속에서 바라보는 한 줄기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갈색으로 흘러내린 뱀은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사내는 입맛만을 다셨고, 어떤 사내는 다른 이를 불렀으며, 한 아낙네는 못 번 체했다.
갈색빛을 비추던 노란 등불은 색조없는 빛으로 바래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 있던 사내는 회색이다. 또한, 그 옆에서 비추는 등불은 회색이다.
피냄새가 가득했던 방을 뒤로하고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아파트의 한 방에서 노란빛이 새어나왔다. 어떤 집은 하얗다. 어떤 집은 파랬다. 사내가 서 있는 나무 위는 초록색임이 분명했다.
사내가 마주친 다른 사내들의 냄새가 보였다. 파란 냄새, 노란 냄새, 초록 냄새. 노을이 진다. 해의 강렬한 붉은빛이 온몸을 덮치고, 길쭉한 탄자국을 바닥에 새겼다. 검은색이었다.
언덕 위에서, 사내가 쓰러졌다. 가파른 숨을 삼키며 주위의 냄새를 살핀다. 녹색. 그리고 검은색. 이제는 해가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나뭇가지가 서서히 사내의 몸을 덮어왔다.
조용히, 붉은 냄새를 풍기며 사내가 들어왔다. 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무언가를 가볍게 집어들었다.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점멸했다.
버튼이 딸각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방의 어둠에 은색만이 남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집 안으로 발을 딛었다. 캄캄했다. 그에겐 이 어둠을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감정마저 얼어붙어 하얗게 샌 밤이었다. 언덕을 덮은 희뿌연 공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별칭 : 키크는 꿈
일련번호 : SCP-204-KO
등급 : 유클리드(Euclid)
특수 격리 절차 : SCP-204-KO는 현재로써 격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SCP-204-KO의 접근에는 3등급 이상의 보안 인가가 필요하다.
민간에서 발생하는 SCP-204-KO에 의한 사고는 일년에 대략 20건 정도의 비율로 발생한다. 직접적인 격리 실패의 발생 시, 재단의 언론조작팀이 가스 유출 사고 등으로 위장해 처리한다.
설명 : SCP-204-KO는 변칙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꿈이다. SCP-204-KO의 꿈을 꾸는 사람은 높은 절벽이나 낭떠러지, 아파트 옥상 등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SCP-204-KO의 경험자들은 SCP-204-KO의 경험이 대체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상황'처럼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일부는 '갑작스레 바닥이 꺼지는 상황'처럼 구체적이지 않고 인과성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진술하였다.
SCP-204-KO를 꾸는 모든 인원은 단단한 바닥에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충돌 직전 베타파의 강렬한 증폭과 함께 해당 인원은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꿈에서 깬 인원은 약한 긴장증 증세를 보였으나, 대부분 하루 이내에 회복되었다.
SCP-204-KO가 꿈에 출현한 이후, 해당 꿈을 꾼 피험자는 수면 후 약한 수준의 성장통을 동반한다. 성장통은 빠르면 하루 이내, 길면 일주일까지 지속된다. 성장통을 끝낸 피험자는 아무런 변화 없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피험자가 긴 성장통을 겪었음에도 그에 따른 신체에 어떠한 변화도 나타나지 않은 점은 괄목할만 하다. 현재 SCP-204-KO에서 발생하는 변칙적인 충격량과 송과선1과의 관계가 조사중에 있다.
현재 통계적으로 계산된 SCP-204-KO가 아닌, 추락하는 형태의 꿈의 비율은 약 37%이다. 이는 SCP-204-KO는 이미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이는 SCP-204-KO의 무력화나 격리에 대한 재단의 대책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사료한다.
SCP-204-KO는 모든 사람의 꿈에 무작위적으로 출현한다. 현재까지 이유로 SCP-204-KO의 출현을 완벽하게 방지하는 방법은 현재까지 고안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제한적인 경우에서 SCP-204-KO의 출현을 유도할 수 있다. 필요한 준비물은 다음과 같다.
- 트리아졸람(triazolam)2계 의약품
- 재단 표준 세타파 발생 장치
- [데이터 말소]
- 모르핀 1~2방울
- 순수한 공포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 PTSD를 앓고 있는 피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음.
- 전기충격기, 혹은 바늘3
- 물을 가득 채운 욕조4
위의 준비물을 갖춘 뒤 수면을 시도할 경우 약 18%의 빈도로 SCP-204-KO가 꿈에서 출현한다. 이 방식을 통해 불러온 SCP-204-KO는 자연적으로 출현했을 경우와 동일한 변칙성을 가진다.
자각몽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SCP-204-KO를 꾸는 상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간단한 실험 설계 후 실험 204-KO-4가 실행되었고, 피험자 전원이 사망하고 기지의 11%가 손상되었다. 실험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실험 204-KO-12 이후, 민간에서 발생하는 일부 폭발사고의 원인이 규명되었다.
실험 204-KO-4
실험 기록 204-KO-4-1 :
일련번호 :
등급 : 안전(Safe)
특수 격리 절차 :
설명 : SCP-???-KO는 변칙적 현상을 일으키는 백열등이다. SCP-???-KO는 198█년에 제조되어 일반적인 백열전구의 수명을 훨씬 뛰어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작동한다. SCP-???-KO는 전원을 연결하지 않아도 항상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이다. SCP-???-KO가 발하는 빛에 반해 생성된 그림자는 항상 두 갈래가 되며, 변칙적 특성을 가진다.
SCP-???-KO에 의해 생성된 두 갈래의 그림자는 물체와 관계없이 1:0.4의 길이비를 가지며, 시간에 따라 조금씩 그 위치가 바뀐다. 긴 그림자가 '분침' 역할을, 짧은 그림자가 '시침' 역할을 하며 물체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림자의 각속도는 긴 그림자가 분당 1도, 짧은 그림자가 시간당 5도로 통상의 시계와 동일하다.
두 그림자가 물체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림자의 밝기는 항상 일정하나, 그림자가 SCP-???-KO쪽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 그림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경우,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는 바로 다음 '시각'으로 그림자가 이동한다.
그림자가 순간이동하는 현상은 단순히
"헉… 헉…"
거친 숨소리. 눈앞에 보이는 표지판, '산 정상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잡히는대로 주변의 나무를 꺾어쥐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씨바… 뭔 동네 산이 이렇게 높아?"
헥헥대며 마지막 계단을 내딛었다. 눈앞에 그녀석이 웃고 있었다. 난간에 몸을 아슬하게 걸친 채,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금만 있으면 불바다가 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걸까. 거친 숨소리를 눈치챈 그가 건넨 말은 생각보단 간단했다. 물론 나 역시.
"오셨네요?"
"…그래."
"설마 진짜로 찾으실 줄은 몰랐어요. 꽤 복잡하게 꼬았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복잡했어. 조금만 더했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겠지."
"고마워요. 찾아줘서."
"고맙긴. 이게 우리 일인데 뭐."
"덕분에 마지막이 외롭진 않겠네요. 정말 고마워요. 정말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마지막'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와서 자살이라도 한다는 거야?
"어…"
턱.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몇몇 건물은 무너져 있고, 다른 건물들은 똑바로 서 있다. 건물의 각 층에서 빛나는 전구들, 밝게 점멸하는 수많은 네온사인들, 깜빡이는 신호등, 거리를 수놓은 거대한 간판들… 우리가 이 남자로부터 지켜낸 모든 것들 앞에, 그 남자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처음처럼 그 난간 위에, 아주 위태롭게.
그의 묘한 미소를 깨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핫. 이제 다 끝난 일이에요. 그렇게 불안한 표정 짓지 마요. 그러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서 뭘 하려는 거야?"
"성질도 급하시긴요. 일은 다 끝났다니까요. 곳 있을 '불바다'나 기다리자구요. 편안하게."
철컥
둔탁한 금속음이 일어났다. 총구를 이녀석에게 조준하고, 손가락은 당길듯 말듯. 이녀석을 죽여야 할 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그럴 자신이 생겨버렸다.
"장난은 집어치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당장 폭발물의 위치를 말해. 우리 요원들이 몇 주간 수색했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아니면 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얘긴가? 무엇이든 좋아. 빨리 말해. 지금 나는 너의 위치도 확보했고, 맘만 먹으면 너를 데려가 없애버릴 수도 있어. 그러니 당장-"
"그만. 그만. 제발 흥분 좀 가라앉혀요. 이제 아무도 상처입지 않을 거에요.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을 거고, 당신들 중 누구도 나 때문에 골머리 앓는 일도 없을 거에요. 날 믿어요. 그러니 제발, 머리 좀 식혀요. 맥주라도 좀 마실래요? 아이스박스에 넣어놔서 시원할 텐데."
"휴……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말 들어주는 것도."
"거참 고맙군요. 잠깐 여기 앉아봐요. '불바다'가 타오를 때까지, 내 얘기나 좀 들어주지 않을래요? GOC의 아가씨?"
냉정해지자 사라. 마지막 날, 우리가 받았던 편지의 '불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이녀석을 믿어도 되는건가? 지금까지 충분히 속아왔잖아. 그러면 난 대체 어떻게-. 총을 움켜쥐었다. 눈동자를 보자. 눈동자는 어떻지? 그의 눈동자는-.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아,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속게 되는 건가. 아마 처음부터 우린 이럴 운명이었을까.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휴우우우. 그래, 내가 졌다."
"아, 아이스박스는 거기 벤치 뒤에 있어요."
치익 소리와 함께 맥주캔을 땄다. 살얼음이 언 맥주는 참 달콤했다.
"자 그럼…"
귀가 쫑긋 세워졌다. 기분좋은 밤바람이 머리칼을 넘겼다. 나뭇잎이 시원하게 찰랑인다.
정말, '막장'이라기엔 어색한 날씨다.
맥주캔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시원한 감탄사가 밤공기를 타고 흩어져 내렸다.
[[tab a2]]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여지껏 추적추적 내리던 빗물이 지붕을 훑으며 떨어졌다.
발밑에 쓰러져 있는 나와 똑같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조용히, 그 조그만 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일련번호 : SCP-001-KO
등급 : 무효-타우미엘(-Taumiel)
특수 격리 절차 : SCP-001-KO는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며, O5 구성원 모두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O5 평의회 이외에 SCP-001-KO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인원은 반드시 제거한다.
설명 : SCP-001-KO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의식'의 일종이다. SCP-001-KO는 O5 평의회만 그 존재를 알 수 있으며, 평의회 인원이 아닌 사람에게 SCP-001-KO를 가르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이는 'SCP-001-KO'라는 정보 자체의 특성으로 보인다. 현재 SCP-001-KO에 대한 정보는 O5 평의회를 포함한 재단 내 소수 인원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되었다. SCP-001-KO의 변칙성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SCP-001-KO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유출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파루시아-제타 규약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며, '다음 세대'를 위해 무기한 유지된다.
SCP-001-KO는 새로운 O5 요원이 부임했을 경우에만 시행된다. 실제 의식에는 과학적, 변칙적 의미는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O5 평의회 스스로의 의지로 계속 행해지고 있다. 만일 신임 O5 요원이 SCP-001-KO의 시행을 거부하거나 회피할 경우, 관용적인 판례로 해당 요원의 진급을 완전히 백지화할 수 있다.
SCP-001-KO의 정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다.
녹음일 : 1███년 ██월 ██일
O5-01 :
1███년, SCP-001-KO는 변칙성을 소실하였다. O5 평의회의 만장일치로 SCO-001-KO는 무효-타우미엘 등급으로 재분류되었다.
경고: 항목-001에 대한 추가 정보는 잠겨 있으며, 현재 5등급 분류되어 있습니다. 항목-001에 대한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정신자적 살해 물질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5등급 정신자적 면역 조정을 받지 않은 감독관이 아닌 인물은 살해 물질에 의해 살해됩니다. 당신은 경고를 받았으며,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dj서닌장의 제안 발췌
전문 : 타우미엘 등급 열람자료, 신임 O5 전용
이 문서는 1███년부터 191█년까지 모든 신임 O5 요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발송된 바가 있다. 문서는 1███년에 작성되었으며, 추가적인 변경은 불허한다.
안녕하십니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저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기분이 어떠신가요? 별다른 일이 없다면, 기분이 아주 상쾌하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시간은 1███년, 그리니치 천문대의 표준시각으로 정확히 21시 42분이 되었군요. 당신의 시간은 언제인가요? 만약 조금 졸리다면, 아니면 조금 피로한 시간이라면 잠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고 당신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다시 찾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문서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기시켜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아주 총명하고 지적인 사람이 되어있겠군요. 저는 재단의 관리자인 O5-01입니다. 예상했던 것만큼 심각한 얘기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서를 본 뒤, 당신은 평의회에서 편지 한 통을 전달받을 겁니다. 그 메일에 무엇이 쓰여 있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편지의 좌측 하단에 작게 그려진 성배를 찾아야 합니다. 아마 돋보기를 써야 할 겁니다. 만약 없다면, 저와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있다면, 그것은 게임이 시작된다는 신호탄입니다.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기 때문에, 당신은 편지를 뜯자마자 24시간을 맞춰 놓은 타이머를 작동시켜야 할 겁니다. 그 편지는 일종의 초대장으로, 편지를 뜯은 지 정확히 24시간 안에 회의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회의장의 위치는, 음, 잘 고민해 봐야 할 거에요.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편지를 따라 회의장으로 도착하면, 당신은 재단과 평의회, 그리고 수많은 비밀을 마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겁니다.
아무쪼록 수고하세요.확보하라. 격리하라. 보호하라.
O5-01
발견 물품-001-01
1번째 O5-██의 퇴역 당시 그의 자택에서 입수한 문서이다. 문서는 총 8개 묶음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 2개는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문서 1 : 가장 처음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서류더미이다.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날짜 : 1███년 ██월 ██일
이번에 헨더슨Henderson 교수님의 중국 답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예! 답사지는 중국 태산(泰山)이라는 산인데, 이번에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단다. 탐사는 한 달 정도 걸릴 예정이라는데… 중국 특산물이 뭐더라?
날짜 : 1███년 ██월 ██일
알고보니 이번 답사는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참가 인원표를 보니 우리들 말고도 벌써 이십 명은 더 참가하기로 되어 있다.
내일이 출항이다. 몇시간이라도 자둬야지.
날짜 : 1███년 ██월 ██일
버킹엄궁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드디어 첫 출항에 나섰다. 으음. 배가 좀 많이 흔들리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다.
날짜 : 1███년 ██월 ██일
배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던 사람은 미국에서 왔다는 금발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스튜어트 앤드류St.Andrew라고 소개했고, 나는 그 이름이 본명이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5 그는 차분하고 지적이었으며,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쉽이 있었다.
아직은 그를 신뢰할 수 없다.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날짜 : 1███년 ██월 ██일
앤드류와 얘기를 좀 더 나눠 보았다. 미국에서는 철학을 전공한 박사였고, 휴가 차 오게 된 영국에서 우연히 만난 헨더슨 교수님과 친해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군. 굉장한 스펙이야. 될놈은 되는건가. 앤드류 말고도 제인Zane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이자는 영국에서 사서를 했었다고 한다. 별 사람이 다 모여 있군, 여기.
날짜 : 1███년 ██월 ██일
배가 조금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함장이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선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날짜 : 1███년 ██월 ██일
날이 개었다. 폭풍우가 치는 동안, 배 지하의 선실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서로의 사상, 철학, 지식들, 그밖에 모든 것들을 안주삼아 나누는 술주정은 꽤나 즐거웠다. 이젠 앤드류와도 꽤 친해졌다. 왜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는지 이해가 된다.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그녀석이 품고 있는 특이한 신앙이다. 천주교나 기독교, 유대교같은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신'에 대한 관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녀석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화형당했을 거다.
날짜 : 1███년 ██월 ██일
작은 암초에 몇 번 걸리긴 했지만 문제없이 광주 항구에 입항했다. 지금은 근처 숙소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피곤하다.
날짜 : 1███년 ██월 ██일
우리의 목적지인 태산까지는 아직 한참이다.
매일 느끼는 거지만, 중국은 역시 영국과는 많이 다르다.
당분간은 적응하는 데에만 집중해야겠다.
날짜 : 1███년 ██월 ██일
도착했다. 우린 당분간 산 아래에 있는 중국식 저택에서 생활할 것이다.
태산을 직접 본 기분이 어떻냐고?
엄청난 충격이다. 난 이렇게 큰 산을 생전 본적이 없어.
날짜 : 1███년 ██월 ██일
앤드류가 재미있는 걸 갖고 왔다. 어느 골동품점에서 구매했다는 황금빛 술잔이다. 골동품이라기엔 너무 반짝거리는데, 모조품을 산 게 아닐까 싶다.
날짜 : 1███년 ██월 ██일
정말 정말 특이한 꿈을 꿨다. 장소는 그대로 태산이었고,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까지 똑같았다. 딱 하나 다른 점은, 주위의 모든 공간이 금을 입힌 듯 반짝였다는 것이다. 벽도, 물컵도, 빵도, 심지어는 공기까지도. '굉장한 경험' 밖에는 그걸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주석 : 일기의 형식으로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서 1은 모두 타이핑된 사본으로 출력되어 있었다.
문서 2 : 문서 1과 내용적, 시간적으로 연결된다.
날짜 : 1███년 ██월 ██일
앤드류가 탐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교수님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날짜 : 1███년 ██월 ██일
탐사에 진전은 없다. 요즘 들어 앤드류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무슨 일이 있는걸까.
날짜 : 1███년 ██월 ██일
오늘 앤드류와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앤드류는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그는 새로운 '신'을 이곳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또, 신을 이 세상에 부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잠깐이지만 그가 악마 숭배자처럼 보였다.
날짜 : 1███년 ██월 ██일
또 같은 꿈을 꿨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황금색 꿈. 이 꿈만 벌써 5번째 꾸고 있다. 앤드류가 가져온 황금색 잔과 연관이 있는걸까? 너무 억지스럽지만, 내 머리속에서는 계속 그게 원인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날짜 : 1███년 ██월 ██일
맙소사. 앤드류도 그 꿈을 꿨단다. 심지어 앤드류만이 아니라 탐사팀 모두가 그 꿈을 꾼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정말 그 성배와 관련이 있는 현상인걸까?
날짜 : 1███년 ██월 ██일
녹취록 012-01 : O5등급 전용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