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지막 이야기

'이것도 썩 좋지는 않구만, 그렇다고 마이너스 먹일 정도는 아니고.'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한숨을 뱉는다.
'이따위 제 4의 벽 깨부수는 놈들은 이제 한 트럭도 아니고 배 한 척 채울 정도는 되겠군. 「데드풀」처럼 할 자신 없으면 안 하는 게 좋은데 말이지.'
마지막에 하이퍼링크 처리된 불그스름한 빛깔의 문장을 붙들자 밑줄이 그어진다.
'분량이 어째 섭섭하다 싶었지.'
문장을 가볍게 누르는 순간 스크린이 빛을 잃는다. 기계는 버튼을 눌러도 묵묵부답이다.
'거 참 너무하네, 왜 전원이 나간 거야?'
다음 순간, 머리 위의 전등도 문득 빛을 잃는다. 창 밖을 보아하니 다른 전등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대인답게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을 두들기지만 어떤 버튼을 눌러도 이미 매끈한 유리를 덧댄, 과하게 비싼 벽돌이 되어 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살핀다. 흐릿하던 하늘에 먹먹한 구름이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타임랩스 영상처럼 빠르게 불어나며 소용돌이친다. 어찌나 낮은지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구름에 정신이 팔린 동안 슬금슬금 커지던 바람소리가 으스스하게 울음소리가 되어 창을 두들긴다. 창 밖의 나무들이 힘없이 이파리와 가지들을 휘젓고, 먼지구덩이에서 주워온 솜뭉치같은 안개가 여기저기로 굴러다닌다.
'으음, 어쩌다 정전이 되었고, 동시에 스마트폰도 나갔고, 마침 지금 날씨가 과하게 험악하군. 이거 좀 무섭네.'
그때 밖에서 경적소리가 기가 막히게 진한 스키드마크를 그릴 법한 급제동 소리를 곁들이며 울리고, 그에 이어 당연하다는 듯이 금속 찢어지는 소리와 폭발음이 들린다.
'으음. 좀 많이 무섭네.'
그리고 어린아이의 울음섞인 애원까지 들려오기 시작한다.
"거기, 거기 아무도 없어요?"
'이거 죽여주게 무섭네.'
평소대로라면 아마도 동정심에 나가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동정심은 코빼기도 없고 오히려 오싹함만 더할 뿐이다.
"제발 누…려주세…제발, 119라…"
돌개바람이 중간중간 울음소리를 묻으며 날뛰어서 분명히 들리지조차 않는다.
"어…엄마…엄마아아…"
'이런 제기랄.'
어줍잖은 정의감이 이제야 고개를 들추기 시작한건지, 나는 겉옷을 주워섬긴다. 아마도 밖은 평소보다 한참 추울 것이라 좀 따끈하게 걸친다. 계단을 뛰어내려가 대문을 힘차게 열어젖힌다. 거무스름한 안개가 내 시야 안의 온 세상을 덮으며 반기고, 거기에 놀랄 새도 없이 흉악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 사정없이 따귀를 올려붙인다. 초장 18대씩.
"…아아…흐아앙…흡…"
이젠 도와달라고 빌 정신머리조차 없는지, 울며 코만 훌쩍이는 쪽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때 뭔가 발에 치여 날아간다.
'얼씨구?'
꽤 괜찮은 나프타 라이터가 하수구 뚜껑 언저리에 걸쳐져 있다. 집어서 뚜껑을 열자 환한 불꽃이 일자로 솟구친다.
"지, 집에 가고, 흡, 싶어요"
저놈 때문에 이 험악한 바닥으로 뛰쳐나왔지. 그나마 같은 높이에 있는 탓에 소리는 수월하게 들린다. 거기다가 맨날 다니던 거리라 이 지경이 되어도 갈 수는 있다. 저 모퉁이만 돌면 거기 있다는 것도 알…지만 코너를 돌자마자 라이터를 닫으며 몸을 숨긴다.
무정한 살기를 내뿜는 거대한 형체가 자기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이 울음소리를 쉬지 않고 읊는다. 마치 석고상처럼, 피부와 똑같은 희뿌연 잿빛의 눈과 마주치는 날에는 뼈는 커녕 영혼조차 추스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라이터 없이 저 소름끼치는 얼굴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기이하게도, 공포와 함께 기시감이 찾아온다.
'저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놈을 봤었다. 저놈의 얼굴을 확실히 봤었다. 그놈에 관한 문서에서 설명을 곁들인 사진을 본 적 있었다. 그 문서의 이름은 SCP-087이었다.

'수십 수백번을 강조했고 그만큼 잘 인지하고 있다. 재단은 진실이 아니라고, 여긴 어반 레전드와 크리피파스타를 모아놓은 곳일 뿐이라고, 빌어먹을 합성사진들과 그럴듯한 설정들일 뿐이라고.'
그 설정이 얼마나 그럴듯한지 내 코앞에서 우는소리를 뚝뚝 흘리고 다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저 새끼는 계단통에 처박혀 있지 않고 나와서 뭐하는 거야?'
나는 왔던 길을 되짚으며 달린다. 빌어먹을 강풍은 갈수록 험악하게 빨라지는데 이상하게 안개가 쓸려나가지를 않는다. 쓸려나가는데 공기는 하나도 없고 다 안개인 것처럼. 그리고 그 안개를 뚫고 내가 대략 3분 전에 나왔던 문으로 087보다 더 무서운 놈이 튀어나온다.
'거 참 너무하네.'
흔한 외계인들처럼 흰자 없이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한 쌍의 눈동자를 가진 늙은이 여유롭게 내가 3분 전 나온 문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식사라도 하고 싶다는 것처럼.
내 내장만큼은 저녁신사 신세를 피하길 바라며 어둠 속으로 무작정 달려간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탓인지, 어느새 나는 길 한가운데에서 숨을 몰아쉬며 걷고 있었다. 공포로 가득한 안개 속에서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말 너는 그게 너의 세상이라고 해도 세상이 멸망하는 걸 볼 각오가 되어 있나?

'설마 그 빌어먹을 클릭 한 방에 이 난리법석이 시작된 거라고?'
보이는 전자제품은 다 나갔고, 전기 자체도 나갔고, 내 손으로 스마트폰을 고칠 방법은 없을 테니, 뒤로 버튼을 눌러서 이걸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재단의 수많은 SCP들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두 놈을 마주쳤고, 두 놈 다 마주치면 사망 확정이다. 얼마나 더 많은 놈들이 안개 속에 숨어 있을까?
'만병통치약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피자 상자라도 어디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주저않는다. 지금까지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목까지 끔찍하게 말라오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조금 그런 감이 있기는 했지만,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시했다. 하지만 목말라 죽겠다는 지경이 되자 라이터를 들고 마실 것을 찾아 흔든다. 하지만 편의점은커녕 자판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거보다 대체 여기 어디야?'
나는 처음 보는 도시의 중심가에 와 있었다. 하늘을 어슴푸레하게 가리며 큼직하게 솟은 현대적 빌딩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알아볼 법한 건물을 찾기 위해 가늘게 뜨고 살피는 동안, 저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도와달라고 하려다가, 앞서 마주쳤던 움직이는 놈들의 전례를 떠올리며 가장 근처에 있던 문으로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작고 조금 낡은 듯한 건물의 간판에 그려진 붉은 비둘기 로고와 그 옆에 있던 짤막한 단어만 겨우 읽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 눈을 믿지 못한다.

무진우체국

우체국 안은 썰렁하다. 소포를 부치려던 고객들과 사무를 보던 직원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바람이나 한 번 쐬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공허하다. 무채색의 복도를 가로질러 가까운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변기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스친다. 근처에 정수기가 있기를 바라며 화장실을 나선다.
창밖의 희미한 빛 아래로 그림자들의 거대한 행진이 끝도 없이 대로를 가득 메운다. 내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저기에 합류하지도 않을 것이고, 저게 나를 죽여서까지 나를 삼키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굳이 나가서 악수하고 싶지는 않다.
주변을 눌러보다가, 희미한 전기불이 눈에 띈다.
'목말라 죽는 것보다는 SCP한테 죽는 게 차라리 빠르겠지…아마도.'
내가 모퉁이를 돌아서 마주친 건 SCP가 맞았지만, 그게 날 죽이지는 않았다. 상식을 초월하는 자판기는 역시 전원이 없이도 키패드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동전을 찾는다. 딱 하나, 500원짜리가 딱 하나 남아있다.
'500엔은 아니지만 이것도 받기는 하겠지…?'
넣기 직전에 어떤 청소부가 떠오른다. 기회가 딱 한 번이니, 일단 시도라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입을 뗀다.
"어, 그러니까…" 젠장, 이 난리가 터진 이후에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자판기에게 하는 말이라니.
"내가 상황이 많이 곤란해서 그러는데, 제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될까?"
500엔을 넣고, 신이든 자판기든 제발 날 도와주기를 바라며 키패드의 7을 누른다.
턱 소리를 내며 떨어진 패키지 덩어리를 집는다. 불빛에 비추자 알아보지도 못할 공식과 그래프들이 그려져 있다.
'먹고 이빨이나 왕창 안 빠지길 바란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다트 모양으로 생긴 사탕을 셋 다 입에 넣는다. 달달한 게 혀에 닿자 그 비쩍 마른 입안에도 침이 돌기 시작한다. 갑자기 기운이 돌면서 저쪽에 있는 방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이유없이 솟구치는 자신감에 반신반의하며 문을 열자 자그마한 휴게실이 있고, 거기 한 구석의 냉장고가 눈에 띈다.
"설마."
냉장고 안에 선선한 생수가 담긴 500ml 병이 가득 들어 있다. 나는 있는대로 실컷 들이키며 주머니에 물을 집어넣고 휴게실을 나선다. 그 다트 모양을 감안하면 신이 나를 불쌍히 여긴 게 분명하다. 혹은 자판기가.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다. 소름끼치는 시체들이 길거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해 삭풍과 안개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며 발길 닿는대로 걸어간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세상이 정전인데 불빛이 환하게 빛나는 카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제일 싼 거 한 잔만 주세요."
"저런, 손님. 악몽같은 하루를 보내신 거 같네요. 괜찮으세요?"
"아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기 따뜻한 데서 몸 좀 녹이고 있어요."
향긋한 커피냄새가 코를 가득 채우자, 몸이 풀어진다. 무진에 이런 카페가 있다니. 무진이라서 필요한 건가.
"죽 들이키세요."
달달한 커피를 입이 데거나 말거나, 그대로 입안에 털어넣고는 입을 뗀다.
"제가 종말을 시작한 거 같아요."
주인은 놀란 얼굴을 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묻는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뭐랄까…아카식 레코드를 만났거든요."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정말 너는 그게 너의 세상이라고 해도 세상이 멸망하는 걸 볼 각오가 되어 있나?"
"그렇다면 이건 그저 보여주는 것일 뿐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래요. 아마도 꿈이겠죠. 내가 깨워 줄게요."
"어떻게…"
"바로, 지금.t"